오나라 오나라 국악 르네상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r)
  • 승인 2004.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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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 주제가를 부른 이동희씨 등 신세대 국악인들이 국악의 대중화·현대화·세계화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고, 힙합 문화와 결합하고, 외국 전위 음악가와 공연하고, 청바지 입고
“오나라 오나라 아주 오나 / 가나라 가나라 아주 가나 / 나나니 나려도 못 노나니 / 아니리 아니리 아니 노네.”

드라마 <대장금>이 방영되는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밤, 우리의 선율이 전파를 타고 퍼지고 있다. 청소년들이 주로 보는 케이블TV 음악 채널에서는 국악 보컬이 가수 은지원과 함께 <어기야 디여> 뱃놀이 가락을 목청껏 외친다.

그런가 하면 창작 판소리 <스타 크래프트>가 게임 주제가로 불리고, 창작 판소리 <슈퍼댁 씨름출정기>는 인터넷 엽기 사이트에서 인기 가요로 등극했다. 10년 전 영화 <서편제>가 우리의 귀를 열어준 이후, 꾸준히 대중화를 시도한 국악이 어느덧 네티즌의 귀에까지 다가갔다.

흥미로운 사실은, 국악 중흥을 이끄는 주인공이 바로 신세대 국악인들이라는 점이다. 신세대 국악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국악 대중화·현대화·세계화를 이끌고 있다.

멀티 아티스트가 된 신세대 국악인들

<대장금> 주제가를 부른 이동희씨(24)는 서울대 국악과에 다니는 학생이다. 2002년 1월 다른 친구들이 ‘독공’을 위해 ‘산공부’를 떠날 무렵 그는 친구 차승민(대금) 박영주(가야금)와 함께 ‘국악 배낭 여행’을 떠났다. 방문하는 도시마다 게릴라 콘서트를 열며 태국 방콕에서 스위스 취리히까지 장장 1만km를 횡단했다.

54시간 동안 터키를 횡단하는가 하면, 탈진한 몸을 이끌고 경찰과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을 반복하면서도 그들은 공연을 멈추지 않았다.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씨가 여행 기간에 붙들었던 화두는 ‘국악을 계속할 것인가’였다.

여행은 이씨에게 명쾌한 답을 주었다. “우리가 월드컵에서 <아리랑>을 응원가로 부르며 하나가 되었듯이 다민족 국가인 네팔에서는 <댓섬 피리리>를 부르며 하나가 되었다. 그 노래를 부를 줄 안다면 모두가 네팔인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음악은 곧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우리에게 맞는 우리 소리가 무엇인가’라는 새로운 화두를 들고 귀국했다.

이동희씨의 같은 과 선배인 이자람씨는 다른 방식으로 국악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국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 ‘예솔이’라는 예명으로 방송에 자주 나왔던 그녀는, 다른 신세대 국악인들과 연대해 국악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2001년 9월 그녀는 국악과 학생들을 모아 ‘타루’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폐쇄적인 전수 문화 때문에 같은 스승을 모시는 사이가 아니면 ‘소 닭 보듯’ 하는 국악계의 닫힌 문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루는 친목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내로라 하는 신세대 소리꾼과 국악 연주자 들이 모이면서 공연 동인으로 발전했다.

20대 초·중반인 타루 멤버들은 기존 창극과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다른, 새로운 국악 뮤지컬을 만들었다. 이씨는 “우리 스스로의 재미를 위해서 공연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관객들도 무척 재미있어 했다. 공연은 멤버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연을 통해서 모두가 멀티 아티스트로 훈련받았다”라고 말했다. 2002년 4월 홍대에서 공연한 창작 뮤지컬 <조선 나이키>가 주목되면서 이들은 여러 곳에서 초청 공연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해 10월 창작 뮤지컬 <나무야 나무야>로 국악계의 메이저 무대인 국립국악당 예악당에 진출함으로써 국악계를 놀라게 했다. <나무야 나무야>를 보러 몰려든 관객이 계단까지 꽉 채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동희씨와 이자람씨말고도 많은 신세대 국악인들이 ‘대한민국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고향인 홍대 앞에서 새로운 국악을 시도하고 있다. 최초의 언더그라운드 국악 그룹 ‘공명’이 태동한 이후 국악 타악 밴드 ‘노름마치’가 홍대앞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을 비롯해, 요즘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은영씨가 이끄는 ‘날라리 밴드’가 주목되고 있다.

이전에 국악은 주로 록 가수의 자양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독학으로 소리 공부를 했던 조용필(<한오백년>)을 비롯해 강산에(<98 아리랑>) 윤도현(<아리랑>) 등이 전통 음악을 재해석한 곡을 발표했다. 그런데 신세대 국악인들이 홍대앞에서 활동하면서 홍대앞 문화를 대표하는 힙합 문화와 결합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힙합 가수 원 선은 국악을 자신의 음악에 차용했고, 박선미씨는 판소리 랩을 선보였다. 댄스 가수에서 힙합 가수로 전업한 은지원이 <어기야 디여>로 히트함으로써 국악과 힙합의 결합에 백미를 장식했다.

신세대 국악인들이 활동하는 또 다른 공간은 인터넷이다. ‘판세’ ‘소리여세’ 등 국악 스터디그룹에는 전공자와 비전공자 수백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런 국악 스터디 그룹에는 국문학과 등 인접 분야 전문가들까지 가세해 새로운 형태의 국악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신세대들이 이처럼 야무지게 도전하는 사이 선배 격인 386 국악인들은 좀더 세련된 형태로 국악 대중화를 시도하고 있다. 국악계에서 지난해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강은일(<오래된 미래>) 김애라(<인 러빙 메모리>) 이꽃별(<꽃별, 스몰 플라워스>)의 개인 음반이 출시된 일이다. 이들은 ‘해금계의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하며 해금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세 사람 중 강은일씨는 파격 행보로 눈길을 모았다. 경기도립국악관현악단 수석 해금 연주자였던 그녀는 갑자기 악단을 뛰쳐나와 삭발을 하고 솔리스트로 활동했다. 프리뮤직을 지향하는 강씨는 홍대앞 클럽에서 재즈 연주자들과 잼(즉석 협연)을 하면서 실력을 키워갔다. 그녀는 전통 속에 미래를 위한 돌파구가 있다는 의미에서 음반 제목을 <오래된 미래>로 정했다.

가수 노영심씨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음악을 맡았던 홍성규씨의 곡을 받아서 좀더 대중적인 곡을 선보인 김애라씨는 미디 음악까지 접목하면서 해금의 보폭을 넓혔다. 셋 중 막내 격인 이꽃별씨는 일본에서 녹음한 <꽃별, 스몰 플라워스>를 국내에서 발매해 막 시작된 해금 열풍에 힘을 더했다.

해금과 함께 국악 기악 연주의 쌍벽을 이루는 가야금계에서는 신세대 연주자 4명으로 구성된 가야금 중주단 ‘사계’가 주목된다. 거침없는 무대 매너로 국악계의 ‘핑클’이라고 불리는 사계는, 바흐 음악과 아르헨티나 탱고 등 다양한 음악을 가야금으로 재해석해 연주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연말 이화여대 문재숙 교수는 가야금으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주해 눈길을 끌었다. 실력 있는 국악 실내악단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작곡가 이병욱 교수(서원대)가 ‘어울림’을 조직해 김혜숙(가야금) 김일륜(가야금) 임재원(대금) 주영휘(해금) 같은 연주자를 육성한 이후, ‘슬기둥’ ‘한국현대음악앙상블’ ‘푸리’ ‘바이날로그’ 등이 국악실내악단의 전통을 잇고 있다.

지난해 가장 주목된 국악실내악단은 작곡가 신창렬씨가 조직한 ‘그림’이다. 2001년 결성된 그림은 피아노 선율이 주가 되는 서양의 뉴에이지 음악과 차별화한,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국악 뉴에이지 음반을 출시했다. 그림의 음반은 다른 뉴에이지 음반과 마찬가지로 CF 배경 음악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언더그라운드 국악 밴드 ‘공명’과 ‘어어부 프로젝트’는 자체 무용이나 영화와 같은 인접 장르와 공동 작업을 통해 괄목할 성과를 내고 있다. 무용가 안은미씨와 공동 작업을 했던 이들은 <반칙왕>과 <복수는 나의 것>의 사운드 트랙을 맡음으로써 국악이 영화 음악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신세대 국악인들의 국악 대중화 작업에 기존 국악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올해 국악계 송년회에서 가장 많이 욕을 먹은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대장금> 주제가를 불러 국악 대중화에 가장 기여한 이동희씨였다. 자신이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는 데 대해 이씨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욕먹는 것이 욕하면서 억지로 따라 가는 것보다는 낫다. 버림받으니 선생님도 고를 수 있고, 선생님 말도 가려서 들을 수 있고, 맹신하지 않아도 되어서 오히려 편하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국악을 시도하는 이들은 보전 위주에 치우쳤던 국악이 시대에 맞게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은일씨는 “민중의 정서가 한이었을 때에는 해금 소리도 구슬펐다. 그러나 이제는 한을 쌓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한다. 그러면 지금 소리도 달라져야 한다. 지금 살아 있는 음악이 되어서 나이트클럽에서도 해금 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 국악은 전성기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형식에 대한 도전이 가장 활발했다. 명창의 역사는 바로 국악 실험의 역사였다. 5대 명창으로 꼽히는 김창환·송만갑·이동백은 창극을 창안했고, 박귀희와 김소희는 여성국극을 창안했다. 박동진은 <예수전> <팔려간 요셉전> 등 창작 판소리를 만들었다.
거문고 산조의 명인 한갑득 선생이 생전에 남긴 말을 보면 국악인들이 이런 새로운 시도에 대해서 얼마나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선생한테 배운 것을 그대로 따라 하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밤낮 배운 대로만 하면 그건 밥만 먹고 똥만 싸는 꼴이다. 자유자재하고 신출귀몰해서 구석구석 기묘하게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는 것이 국악의 맛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소리의 씨김새(꾸밈음)를 잘 활용한 퓨전 국악 음반을 낼 예정이라는 이동희씨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국악이 대중과 친숙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국악을 사랑하고, 그래서 국악을 이해하고, 국악에도 독특한 멋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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