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ㆍ형제 기다리는 남한 가족들의 사연
  • 박병출·고재열·고제규 기자 ()
  • 승인 2000.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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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가족들, 눈물과 한숨으로 보낸 세월 지우며 환한 웃음
‘설렘과 흥분으로 먹지 않아도 배 부르다.” 평양음악무용대학 김옥배 교수(68)의 동생 김숙배씨(65)는 잠도 설친다고 한다. 가족은 이번에 처음으로 김옥배씨 소식을 알았다. 어머니 홍순길씨(88)는 너무 기뻐 말이 안나온다고 했다.

50년 동안의 무소식이 희소식으로 바뀐 것은 류인자씨(59)나 신재순 할머니(88)도 마찬가지다. 북한 원로 국어학자인 류 렬씨(84) 맏딸인 인자씨는 며칠이 지났는데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전쟁통에 부모·동생과 떨어져 남에서 홀로 살아온 류씨의 감회는 더욱 남다른 듯했다.

김일성종합대 교수이자 북한을 대표하는 수학자인 조주경씨(68)의 어머니 신재순 할머니는 아예 안정이 필요하다며 외부와 연락을 끊었다. 조씨는 신 할머니가 스무 살에 남편을 잃고 기른 외아들이다. 서울대에 다니다 월북한 조씨는 지난해 12월3일 〈로동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자기 학비를 대기 위해 낮에는 떡장사와 삯빨래를 하고, 저녁에는 물지게 장사를 하는가 하면, 아들 몰래 매혈(賣血)을 하다가 거리에 쓰러진 일도 있다며 피눈물을 토했다. 신 할머니는 아들과 헤어진 뒤 부산 내원정사에 몸을 맡긴 채 홀로 살아 왔다.

잊었던 혈육이 북쪽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오래 전에 접한 가족들도 있다. 정창모씨 동생 남희씨(53)는 1988년 로스앤젤레스 교포신문에 오빠 기사가 실려 생존 사실을 알았다. 정씨는 “살아 있는 것도 고마운데, 그곳에서 유명한 화가가 되어 놀랐었다”라고 설레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정씨 가족은 드러내놓고 좋아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월북 가족’이라는 족쇄에 시달린 탓이다. 생존 사실 알고도 속앓이

오영재씨가 생존한 사실은 동생 형재씨(62·서울시립대 교수)가 가장 먼저 알았다. 공교롭게도 정보기관 덕분이었다. 오교수는 형의 존재를 속이고 1956년 육군사관학교에 수석 입학했다. 군에서 엘리트로 인정받아 2년 동안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1964년부터 육사 교수로 재직했다. 1966년 느닷없이 방첩대에 끌려간 오교수는 방첩대 과장인 전 대통령 노태우 소령으로부터 형 소식을 전해들었다. 오교수는 그 자리에서 벅찬 감격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감격은 한순간, 그때부터 오교수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연좌제는 월북이든 의용군 징집이든 가리지 않고 남쪽 가족을 얽어맸다. 오형재씨는 소령 이후 더 진급하지 못하고 군복을 벗었다. 오씨는 5공화국 초까지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기적으로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한참 나이가 어린 경찰로부터 “오선생, 시간 있나? 나 좀 만나야겠어”라는 반말까지 듣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꿈에 그리던 아들이 살아 있어도 이제는 보지 못하는 어머니들의 남은 한(恨)도 깊다. 정창모씨 어머니 이업동씨는 자식을 잃은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1975년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전쟁으로 두 아들을 잃었다. 첫째 아들 정훈모씨(당시 26세)는 폭격으로 숨졌고, 정창모씨는 의용군으로 월북했다. 어머니 이씨는 죽은 자식은 잊지만, 살아서 집 나간 자식을 못 잊는다는 말을 자주 되뇌었다. 아버지 정인성씨도 1987년 부인의 뒤를 따랐다. 정씨는 죽을 때까지 두 아들의 사망 신고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눈으로 죽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사망 신고를 하지 못한다며 버텼다. 그가 숨진 1987년 이후에야 두 아들은 사망 처리되었다.

시인 오영재씨의 어머니 곽앵순씨도 1995년 세상을 떠났다. “영재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기쁜 표정을 지을 수 있느냐”라며 팔순잔치 때까지 사진기 앞에 서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그래도 곽씨는 그나마 나은 편. 1992년 아들의 편지와 선물을 받아 볼 수 있었다. 1990년 <한겨레신문> 9월4일자 ‘북에서 만난 문인들’이라는 기사를 쓴 미주민족문화예술인협회 회장 김영희씨 도움으로 남쪽 가족과 오영재 시인은 한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오영재씨는 1992년 어머니 팔순을 맞아 편지와 옷감을 보내 왔다(위 상자 기사 참조).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들 꿈을 꾸었다던 곽씨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뚜렷이 기억했다. “내가 영재를 보낸 것이 1950년 여름이지. 무화과나무 아래서 칼국수를 먹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오형재씨는 형 영재씨를 위해 이 무화과나무를 사진 찍어 보관하고 있다. 국어학자 류 렬씨의 맏딸 인자씨 역시 부모와 헤어지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1951년 1·4 후퇴 때 그녀의 어머니는 “밖에 나간 아버지를 찾아 뒤따라가겠다”라며 딸을 피난하는 친척들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50년 동안 류씨는 혼자 남겨졌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남쪽 가족은 헤어진 가족들이 북한에서 펼친 활약을 듣고 더 놀라워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오빠가 유명 화가가 되다니’

평양음악무용대학 김옥배 교수 동생 김숙배씨가 떠올리는 언니는 전쟁이 터진 와중에도 무용 연습을 하겠다며 명동에 있는 YWCA 사무실로 향하던 모습이다. 김씨는 그런 언니라면 북한에서도 무용 재능을 발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창모씨의 동생 정남희씨(53)는 오빠가 그림을 그렸던 기억은 없다고 했다. 중학 1년 후배인 우석대 장명수 총장(67) 역시 “전주북중 시절 창모 선배는 미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남희씨는 오빠가 미술가 소질은 타고났다고 추정한다. 전주 지방에서 유명한 서예가 효산 이광열이 정창모의 외할아버지이고, 아버지 정인성씨 역시 평생 화랑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50년 동안 헤어졌던 이산가족은 보름만 지나면 상봉한다. 물론 북측이 선정하는 100명 명단에 가족이 포함되어야 가능하다. 평생 잊지 못할 8·15 만남을 기대하며, 50년 동안 떨어져 살았던 가족은 어느 때보다 긴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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