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 발굴 현장 ''문화 대참사'' 전모
  • 朴晟濬 기자 ()
  • 승인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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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발굴 현장 분규 전말/문화재청·문광부 ‘모르쇠’ 일관… “발굴 팀과 주민만 벌거벗고 싸웠다”
단위 면적당 사상 유례 없는 대규모 유물이 쏟아져 나온 한신대 발굴단의 풍납토성 발굴 작업은 여건만 뒷받침되었더라면 국내 고고학사에 길이 남을 개가를 올리며 헤피 엔딩이 될 수 있었다.

먼저 발굴단장 유봉학 교수(한신대 박물관장)가 이끄는 발굴팀의 의욕이 남달랐다. 현장 발굴은 같은 대학 권오영 교수(국사학과)가 맡았는데, 그는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부터 백제 초기사를 전문으로 연구했고, 부산 동아대에 있다가 연구를 좀더 효율적으로 하려고 수도권에 있는 대학으로 옮길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권교수팀은 ‘굴삭기 사건’이 터진 문제의 현장에서 지난해 9월27일 첫 삽을 떴다. 이후 한신대 발굴팀은 애초 유적지에 아파트를 지으려 했고 나중에 발굴 작업의 실질적인 스폰서가 된 (주)대동·경당연립 재건축조합측과 발굴 비용 조달 문제로 자주 실랑이를 벌였다. 이들은 지난 겨울 내내 강풍이 몰아치는 ‘바람드리’(풍납동의 옛 이름) 발굴 현장에서 살을 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작업을 강행했다. 그 때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일부 여학생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을 견디다 못해 권교수에게 ‘솜바지를 사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백제 지배 구조 밝힐 열쇠

한신대 발굴팀이 작업한 곳은 풍납토성 한복판. 주변에 연립 주택과 아파트가 밀집해 있고 발굴 면적도 1천2백 평(전체 사업장 규모는 2천 평) 남짓해 겉보기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파트 공사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곳은 발굴팀에게, 아니 대한민국 국민에게 백제 유물만 5백 상자 분량이 넘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준 ‘보물 창고’였다.

한신대 발굴팀이 지난 5월8일 현장에서 철수할 때까지 모두 2백20개 구덩이에서 파낸 유물은 분량은 물론 내용에서도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대부(大夫)’ ‘정(井)’ ‘직(直)’ 자가 새겨진 토기·벽돌(전) 조각 등이 있다. 특히 ‘대부’ 이름 토기 조각은 백제의 지배 구조에 대한 활발한 논의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발굴팀은 기대한다.

현장에서는 또 중국 도자기 조각과 함께 서부 경남산 가야 토기까지 출토되었다. 이 유물은 백제가 중국은 물론 문헌상으로는 사실 관계가 불분명했던 가야와도 교류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9호 유구에서는 문자가 새겨진 유물 조각, 직구호·고배·삼족기 따위 토기류말고도 다량의 말뼈가 출토되었다. 5월19일 문화재 전문위원 13명으로 구성된 ‘긴급 조사단’이 굴삭기 사건의 피해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을 때에도 말뼈는 단연 눈길을 끌었다. 말뼈가 출토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량의 말뼈가 한 구덩이에서 나왔다면 이는 혹시 제사터가 아닐까’ ‘지금으로 치면 벤츠나 다름 없었을 말들이 한꺼번에 12마리씩 부장되었을 정도라면 이같은 값비싼 물건이 발견된 이 제사터를 과연 누가 썼을까’….

발굴 현장에 대한 의문과 관심은 유적층의 맨 밑바닥에서 대형 건물 터가 나온 뒤로 더욱 증폭되었다. 가로 10m, 세로 16m(추가 발굴시 더 길어질 수 있음)에 이르는 이 건물 터는 국내 고고학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였다. 어쩌면 이 건물 터는 풍납토성의 성격과 기원을 둘러싼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58쪽 상자 기사 참조). 한신대 발굴팀은 건물 터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유보한 채 일단 ‘일반 건물지는 아니며 특수한 기능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한신대팀의 발굴 현장, 바꾸어 말해 경당연립 재건축조합 사업장은 바로 이같은 유물·유구의 중요성 때문에 관련 전문가는 물론 전국민의 관심을 받는 ‘최고의 발굴 현장’으로 떠올랐다. 대체로 발굴 종료 시점에 현장에서 한번 열리기 마련인 지도위원회의(보통 학계 원로로 구성됨)가 지난해 12월 이후 벌써 세 차례나 열렸다. 유적 발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 남겨

모래땅을 한 꺼풀 벗겨내 유구를 찾아내고 유물을 수습하면 새 모래땅이 나오고, 이를 벗겨내면 또 다른 유구가 드러나는 일이 거듭되면서 그만큼 발굴 작업은 복잡다단해지고 시간도 오래 끌었다. 한신대 발굴 현장의 맨 윗층은 비록 각종 공사로 인해 군데군데 ‘교란’된 흔적이 있었지만, 전체로는 기원 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서기 4~5세기 때까지 백제인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적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같은 사실 때문에 풍납토성 유적 발굴 작업은 해당 지역 주민이 굴삭기를 동원해 유적 발굴 현장을 일부러 훼손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굴삭기 사건’의 원인은 일단 한신대 발굴단과 발굴 조사를 의뢰한 (주)대동·경당연립 재건축조합 간의, 추가 발굴 비용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경직된 법령, 일관성 없는 정책, 무성의한 행정력에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굴삭기 사건’은 이들 발굴 현장 외부의 요인들이 완벽하게 합작해 고고학 발굴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는 것이다.

먼저 발굴에 따른 비용을 사업자가 부담해야 한다는 현행 규정(문화재보호법 제74조)부터가 문제로 지적된다. 경당연립 재건축 부지의 경우, 한신대 발굴단이나 조합은 모두 이같은 ‘악법’을 지키기 위해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다. 조합원 대부분이 영세한 시장 상인이고, 그렇지 않아도 공사 지연에 따라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한신대 발굴단은 하루 평균 2백만원에 이르는 발굴 단가를 최대한 줄여 1백80만원까지 끌어내렸다. 주민들은 공사 지연과 이자 손실에 따른 부담까지 고스란히 떠안으며 발굴단에 자금을 댔다.

이 과정에서 지난 4월28일 한신대 발굴단이 조합측에 제시한 보고서 발간 비용 8천8백만원 지불 요구는 사태를 악화시킨 결정타가 되었다. 발굴을 진행한 쪽은 발굴 작업이 끝난 뒤 2년 안에 발굴 관련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 발굴 보고서 발간에 따른 비용은 전체 발굴비에 포함되어 사업자가 책임지게 되어 있었다.

한신대 발굴단이 조합에 보고서 발간 비용 얘기를 꺼낸 시점은 현장에서 2차 발굴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이처럼 보고서 발간 비용 문제가 늦게 거론된 이유는 현장에서 출토된 유물량이 워낙 많아 발굴단이 비용을 미리 계산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리한 요구’를 용케도 잘 참아온 조합측은 ‘더 이상의 비용 부담은 못한다’고 협상을 자르고 나왔다. 5월8일 잔류 인력만 남기고 현장에서 철수한 발굴단은 5월12일 추가 비용·보고서 발간비에 대한 지침을 달라는 요청과 함께, 철수 사실을 문화재청에 정식 보고했다. ‘발굴 중단’ 보고는 조합측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다. 현행 법규로는 발굴이 종료되어야 비로소 본 공사에 착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태가 악화하는 동안 행정력은 작동을 멈추었다. 발굴단과 주민은 저마다 관계 요로를 찾아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며 지원을 요청했지만 송파구청·서울시청·문화재청, 더 나아가 문화관광부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딴청을 피웠다. 핑계거리는 다양했다. ‘돕고는 싶지만 자칫 돈을 잘못 썼다가는 감사 때 지적받는다’ ‘관련 부서와 협의하겠다’ ‘그런 문제라면 저쪽을 찾아가 얘기해 보라’ 등등…. 관련 관청들 핑계거리도 ‘가지가지’

때때로 해당 부처 공무원들은 ‘선례‘를 내세웠다. 한번쯤 예외를 인정할 수도 있지만, 일단 예외를 인정하면 이것이 선례가 되어 뒷감당을 못한다는 논리였다. 밀려드는 민원을 피하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이들은 ‘계약 사항 존중’이라는 원칙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기도 했다. 발굴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쌍방간 계약’의 문제이므로 자신들이 나설 수도 없고, 나서지도 않겠다는 것이었다. ‘발굴자’를 심사해 선정하는 문화재청에서도 무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풍납토성 유물은 ‘남의 나라 유물’이었으며, 발굴은 ‘남의 나라 작업’이었던 셈이다.

일관성 없는 문화재 정책과 행정 당국의 무성의한 태도는 주민의 불만을 한껏 더 부풀려놓았다. 유적지로서 풍납토성의 중요성은 일찍이 1997년에 제기되었다. 이형구 교수(선문대·역사학과)는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의 왕궁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이 지역의 훼손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아 왔다. 그러던 중 이교수가 한 아파트 공사장에서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곧장 관계 당국에 알림으로써, 유적의 중요성이 새삼 알려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 사건 뒤 당국이 취한 조처이다.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이교수의 신고를 접수해 해당 지역에 대해 긴급 ‘구제 발굴’을 실시했지만, 발굴이 끝난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발굴 터를 덮어버리고 공사 허가를 내주었다. 현대리버빌 아파트와 아산중앙병원 기숙사아파트 등 근래 들어 솟아오른 몇몇 고층 건물은 대개 이런 과정을 거쳐 토성 안에 자리잡았다.

설명회 한 번 없이 ‘시굴 보류’


정부는 일찍이 1993년 풍납토성을 사적으로 지정했는데, 토성 안 지역은 사적에서 제외해 민간에 불하했다. 그나마 당국은 사적으로 지정했던 토성벽(전체 길이 3.5㎞) 중 일부 구간을 얼마 전에 해제했고, 지난해에는 규제 완화 차원에서 토성 안 ‘고도 제한’마저 풀었다. 심지어 토성 외곽의 해자(성밖에 둘러치는 물길)로 추정되는 시내는 정밀 조사가 필요한데도 오래 전 복개되어 그 위에 이미 집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이미 전체 면적의 70% 정도가 재개발되었거나 재개발이 확정된 토성 내의 땅을 두고 정부가 ‘문화재 보존 구역 지정’ 어쩌고 하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으니 주민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주민 처지에서 더 기가 막힐 노릇은 이미 재개발이 확정되어 주민들까지 이주시킨 사업장에 대해 행정 당국이 개발 여부에 대한 주민 설명회 한 번 없이 ‘시굴 보류’ 지시를 내린 일이다. 경당연립 재건축 사업장 인근 미래마을과 외환은행 재건축조합 사업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 사업장의 조합원들은 “되면 된다, 안되면 안된다는 대답을 속시원히 들어 보는 게 소원이라면 소원이다”라고 푸념한다. 문화재를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주민 편익과 권리가 철저히 무시되는 또 하나의 ‘문화 파괴’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권오영 교수와 함께 한신대 발굴단에 소속되어 발굴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이남일 교수는 풍납토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최근 사태에 대해 ‘문화재 정책의 총체적 난맥상이 빚어낸 결과’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교수는 대학원 재학 시절인 1979년,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곡리 선사 유적지’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경험을 말한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발굴 작업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국가적 관심 사항이어서 발굴 작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기관에서도 자기 일처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자국 문화재를 보는 인식 수준은 아마도 이 때를 고비로 퇴보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불안정한 군사 정권과 세계화 구호가 한창이었던 문민 정부 시절을 거치며 이같은 경향이 더 악화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라고 이교수는 말한다.

‘굴삭기 사건’이 벌어진 뒤 엿새째 접어든 5월19일 문제의 사건 현장에서는 또 한편의 쓸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이 날 11시 문화재위원회 소속 전문위원 13명이 한신대 발굴단의 안내를 받아 유적 훼손 상황을 파악하고 사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일행 중에는 학계의 존경을 받는 최영희(3분과)·함병삼(6분과) 씨 등 원로 학자들이 상당수였는데, 이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굳어 있었다. 이들이 버스에서 내려 현장을 둘러보는 동안 담장 바깥에 일찍부터 몰려와 있던 풍납동 주민들의 표정도 똑같았다. 경찰은 조사단이 빠져나갈 때까지 만에 하나 주민들이 저지를지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출입문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풍납토성은 당국의 무관심 탓에 지난 몇십년간 일개 ‘흙성’으로 전락했다가 20세기 막바지에 접어들어서야 극적으로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같은 역사적 발굴 현장에 대한 민·관·학계의 첫 번째 대규모 합동 상면치고는 너무나 살풍경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석촌동 고분과 몽촌토성이 충분한 조사를 거치지 못하고 공원화하면서 백제 초기 역사를 밝혀줄 유적이라고는 사실상 풍납토성 하나만 달랑 남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곳에 대한 발굴 작업은 발굴팀을 이끈 권오영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발굴팀과 주민이 팔을 걷어붙이고 씨름판에서 격투하는 동안, 나머지는 모두 구경꾼이 되어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꼴’이었다.

“과연 이러고서도 우리나라가 21세기 문화 대국을 자처할 수 있는가.” 풍납토성 발굴 과정에서 온갖 곤욕을 치른 권오영 교수는 요즘 이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심각한 회의에 빠져 있다. 단돈 1억원도 안되는 돈 때문에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던 풍납동 주민과 본의 아니게 ‘철천지 원수’가 된 신세를 한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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