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이데올로기 ‘거울’을 깨뜨려라”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9.05.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 계기로 미의 기준 둘러싼 논쟁 가열…
‘미스코리아 대회를 폭파하라.’ 미스코리아 대회(5월23일)를 1주일 앞둔 시점에서 터져 나온 ‘초(超) 강성’ 구호이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미스코리아 대회에 테러리스트가 잠입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구호를 처음 내건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는 이것이 상징적인 의미의 폭파임을 분명히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새삼 미스코리아 대회가 문제인가. 여성 단체가 미스코리아 반대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 들어서였다. 미스코리아 대회장 앞에서 이들이 벌이는 피켓 시위는 이미 연례 행사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올 들어 예년과는 다른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심상치 않은 조짐은 미스코리아 대회 내부에서 먼저 나타났다. 올해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미스 태평양’은 없다. 58년부터 이 대회를 후원해 온 태평양이 손을 뗐기 때문이다. 43년째 미스코리아 대회를 주최해 온 <한국일보>는 다른 후원업체를 끌어들이기 위해 대회를 한 달 남짓 앞둔 시점까지 애를 먹었다(LG가 결국 후원키로 결정했다).
정통 미인 대회는 삐걱, ‘안티’ 대회는 활짝

일반 화장품·패션 관련 회사들이 선뜻 후원에 나서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경제난 여파로 10억원에 이르는 대회 경비를 내놓기가 여의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내세운 이유와 속내가 다른 회사도 있었다. <한국일보>의 제의를 받고 후원 여부를 검토했다는 한 화장품 회사 관계자는 소비자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득보다 실이 크겠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같은 판단에는 미스코리아 심사를 둘러싼 뇌물 수수 사건(93년), 컴퓨터 집계 오류 사건(98년) 따위로 이 대회의 권위가 추락한 데다 미인 대회가 80여 개로 급증해 미스코리아의 신선도가 떨어졌다는 분석이 함께 작용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스코리아 진 출신이 연루된, 이른바 ‘O양 비디오’ 사건이 터진 뒤에는 ‘후원하지 않기를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말이다.

바깥의 조짐은 더 심상치 않다. 미스코리아 대회 반대 운동은 예년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는 지난 5월15일 서울 충정로 문화일보 공연홀에서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열었다. 단순히 미스코리아 대회 반대 운동을 벌이는 대신 대안적인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21세기식 미의 기준’을 창조·제시하려 했다는 것이 주최측 설명이다.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은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입석 표까 매진된 것은 물론이고 행사 당일에는 50여 명에 가까운 국내외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주최측조차 ‘원래 페미니즘 진영의 내부 축제로 기획한 것인데 너무 많은 관심이 쏟아져 어리둥절하다’고 고백할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정통’ 미스코리아 대회가 삐걱거리는 상황에서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에 이목이 집중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선 기존 대회에 ‘물렸다’는 여론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PC통신의 경우, 2∼3년 전만 해도 이 대회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性) 상품화’였다. 페미니즘 이론으로 무장한 ‘전사’들이 주로 이같은 토론을 이끌었다.

최근 들어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지성·교양 부문을 비중 있게 심사한다고는 하지만 1분도 채 안되는 짧은 인터뷰로 이를 재기란 쉽지 않다. 심사위원조차 자인하듯 역시 얼굴 전체의 매력과 균형, 상체·하체의 선과 균형 따위 외모를 심사하는 데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어깨 각도는 20도가 이상적이고, 다리에 근육이 드러나면 안되며, 몸에 상처나 큰 점이 있으면 안된다는 둥 세세한 가이드라인이 따라붙는다(44쪽 표 참조).

어떤 통신 이용자(ID 고픈시인)는 미스코리아 대회를 보면서 가장 코미디 같은 대목이 바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참가자들의 다짐이라고 비웃는다. 이미 아름다움의 기준이 수치·계량화해 있는 미인 대회에서 그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이란 ‘인형처럼 웃는 일’‘몸매의 강점이 완벽하게 드러나도록 아랫배를 집어넣는 일, 엉덩이를 위로 치켜올리는 일’ 외에 무엇이겠느냐는 힐난이다.

그럼에도 이것만으로는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에 쏠린 이목을 설명하기 어렵다. 미스코리아 대회의 진부함을 비웃는 상당수는 상대적으로 후보자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한국 슈퍼엘리트모델 선발 대회 같은 다른 신종 미인 대회에서 대안을 찾는다. 그러나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은 이런 미인 대회조차도 반대한다. 오히려 이 대회를 처음 제안한 김신명숙씨(작가)의 말대로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은 미스코리아 대회로 대표되는, 이 땅의 미인 대회 백여 개를 폭파하려는 시발점’이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폭파’라는 극단적인 용어까지 동원하는 것인가. 그것은 먼저 ‘외모에 대한 획일적인 가치 기준’이 이 땅의 여성들을 질식시키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한 예로 90년대 들어 한국 여성을 지배한 화두가 ‘다이어트’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미인 대회에 등장한 여성들은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들에게 이상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비극적인 것은, 날이 갈수록 그 기준을 따라잡기 어려워지는 현실이다.

75년 미스코리아 후보들의 평균 키는 165㎝, 평균 몸무게는 51㎏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후보들의 평균 키는 174㎝, 몸무게는 50.7㎏이다. 20여 년 사이 평균 키는 20㎝ 가까이 늘어났는데 몸무게는 거의 그대로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섭식 장애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김준기 박사(마음과마음 원장)는 75년 후보들의 체질량지수(신장을 제곱한 수치로 체중을 나눈 것)가 정상 범위 중 최저치였던 데 반해, 지난해 후보들은 거식증 진단 기준이 적용될 정도로 저체중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대다수 여성은 이들을 ‘정상’으로 여겨, ‘정상’인 자기 몸을 ‘비정상’ 기준에 꿰어 맞추려고 노력한다. 다이어트 부작용에 따른 저체중·골다공증 환자가 급증하고, ‘한국 여성의 21%는 헌혈 부적격자’라는 충격적인 통계(95년)가 나와도 이런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외모를 둘러싼 소모전은 여성들끼리의 경쟁 또한 격화시킨다. 미스코리아 대회를 폭파하라는 구호를 전해 들은 미스코리아 출신 한 30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왜 우리들을 그렇게 미워하지요?” 이에 대해 영화 감독 변영주씨(33)는 ‘미인 대회에 출전하는 여성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여성들을 경쟁하게끔 만드는 권력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가부장제와 소비 사회가 만든 ‘외모 이데올로기’

‘아름다움을 둘러싼 여성들 사이의 경쟁’이란 많은 여자아이들이 맨 처음 접하는 동화 <백설공주>에서부터 지극히 친숙한 주제이다. <백설공주>에서 계모는 미모와 권력을 동일시한다. 자기보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백설공주)가 등장하자 계모는 이를 자기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격렬하게 저항한다. 그런데 문제는, 계모가 거울의 말을 통해서만 자기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는 데 있다는 것이 <이프> 편집위원 류숙렬씨(<문화일보> 기자)의 지적이다.

여기에서 거울은 남성의 눈, 가부장제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문제는 20세기 후반 들어 이 거울이 더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여성학자들의 지적이다. 거울이 시키는 대로 따른 여자는 더 나은 결혼 조건, 사회적 성취,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자격증’을 손에 넣는다. 여자가 출세하려면 능력(39.6%), 노력(23.6%) 못지 않게 외모(20.0%)가 필요하다는 것이 보통 사람의 인식이다(96년 9월 <중앙일보> 여론조사). 이에 반해 남자가 출세하는 데 외모는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0.2%).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능력(59.1%) 노력(20.1%) 학벌(12.1%) 인맥(6.5%) 따위이다.

물론 과거에도 외모는 여성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 외모가 점차 ‘사회적 권력과 자본’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해 가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분석이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지위 또한 올라갔다는 20세기 후반에 오히려 여성들이 점점 더 거울에 얽매이게 된 현실은 모순적이다.

일부 여성학자들은 이렇게 모순된 현실이 전개된 배경을 ‘가부장제의 음모’라고 해석한다. 나오미 울프는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법·제도·교육 등 권력에 대한 접근을 어쩔 수 없이 허용하게 되면서 여성의 몸과 얼굴에 대한 온갖 제한·금기·처벌·보상이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외모 중심 이데올로기는 노동 현장에서 ‘남성들의 경쟁자’로 성장한 여성을 견제하는 데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외모에 따라 취업을 제한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백명기 박사(백명기 신경정신과)는 “19세기가 정절·정숙·순결 이데올로기 따위 ‘성욕’으로 여성을 억압한 시대였다면 20세기는 ‘식욕(다이어트)’으로 여성을 억압한 시대이다”라고 표현했다.

여기에 자본주의 소비 문화가 가세한다. ‘우리는 여자이기를 포기한 사람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습니다.’ 이것은 큰 치수(허리 27인치 이상) 옷을 생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한 의류 회사의 선전 문구이기도 하다. 소비 사회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거나 살진 여자는 ‘여자도 아니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동안 연간 1조 원 규모라는 다이어트 산업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처럼 억압적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 운동계가 선택한 수단은 역설적이게도 다시 ‘외모’이다. 이번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은, 한국의 페미니즘이 ‘외모’를 공식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데서 의미를 갖는다. 이제껏 여성 운동계는 ‘못생긴 여자들의 질투’라는 인신 공격에도 아랑곳없이 미스코리아 대회 반대 운동을 벌여 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외모에 모든 것을 걸기 시작한’여성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획일적인 미의 기준 뒤집어 엎겠다”

물론 미인 대회에 나온 여자들이 수영복 입고 푸줏간 고기처럼 늘어서 있는 것 보면 화가 나죠. 민망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어쩔 수가 없어요. 나도 그런 몸매를 갖고 싶어요.” 못생긴 것은 용서해도 뚱뚱한 것은 용서 못한다고 남자 친구가 경고하는 바람에 지난 1년 사이 살을 20㎏ 가까이 뺐다는 원 아무개씨(22·인천광역시)의 고백이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자들은 흔히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것이 가짜 자신감이든 진짜 자신감이든, 중요한 것은 외모가 여성의 정체성마저 규정하고 있다는 현실이다(한설아 논문, <여성의 외모 관리에 대한 여성주의적 접근>).

이같은 현실을 감안해 여성 운동계는 잠시 우회 전술을 택하기도 했었다. ‘미인 대회 반대’ 대신 ‘미인 대회 안방 중계 반대’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워, 공중파 방송에 제동을 걸려 했던 시도가 좋은 예이다. 그러나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계기로 여성계는, 아름다움을 둘러싼 기존 가치 기준을 완전히 뒤엎겠다고 선언했다. 곧 가부장제와 소비 자본주의 사회를 상대로 ‘외모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면 승부를 선포한 셈이다.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에 참가한 한 중년 여성의 말마따나 ‘폭발 직전에 이른 여성들의 분노’는 과연 이런 현실을 재생산하는 거울을 폭파할 수 있을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