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섭 교수 ‘쓴소리’ ‘경쟁력’ 논란 불붙이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9.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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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계에서는‘한 건의 문서’가 화제다. 화제의 인물은 영화 평론가 강한섭 교수(서울예술대학·영화학)이다. 그는 ‘한국 영화 담론의 여섯 가지 신화 혹은 거짓말’이라는 글을 발표해 단박에 논쟁의 중심에 섰다. 거칠지만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정부에 돈 달라고 떼쓰지 말고, 칸 향해 해바라기하지 말라. 독립 영화? 마이너 리그인 것 인정하라. 충무로는 혁명 중이다. 작가 영화 어쩌고 말고, 뛰어들어 싸워라. 원래 문화는 토종이 센 법이니, 할리우드 무서워 마라. 그리고 먹물이나 영화계 높으신 분들, 외국 이론 베껴 가며 예술이니 자국 문화 보호니 거창한 얘기 하지 말고 좀 솔직해지자.’

정부까지 영상산업 진흥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마당이어서 이같은 주장은 잠재해 있던 논란거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영화 열기가 거품이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는 이가 많았고, 왜 유독 영상이냐는 시샘 어린 시선도 있었다. 영상산업에 대한 정부의 기대에는, 달러 벌이뿐 아니라 고용 창출이라는 바람까지 얹혀 있다. 강교수의 주장은 일단 이같은 상황을 돌아보는 몇 가지 잣대를 제시한 셈이다.

“장르 영화 폄하는 사대주의 탓”

그의 글이 처음 실린 영화 전문지 <씨네21> 지면에 이어지고 있는 반론과 지지 글만 보아도 강교수의 주장이 얼마나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지난 5월14일 열린 한 세미나장의 분위기는, 이번 논란의 화제성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영상문화학회가 주최한 ‘한국 영화 담론의 쟁점과 전망’이라는 세미나에는 전례 없이 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이 날 강교수가 발제를 맡고, 영화 평론가 유지나씨,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유인택 대표, 우노필름 차승재 대표, 김동윤 교수(건국대·철학), 고형석 교수(서울대·전기공학부) 등이 토론자로 참여해 4시간30분 동안 진행되었다.

강씨는 자신의 글이 ‘실용적이고, 정략적인’목적에서 쓰였음을 분명히 했다. 즉, 현재 영화 담론의 허구성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문화 정책에 변화를 꾀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우선 그는 영화 담론의 허구성으로 구미 중심의 비주체적인 태도를 꼽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충무로의 장르 영화를 폄하하는 분위기이다. 한국의 멜로야말로 세계 수준이라고 강조해온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존심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한다. 또 (영화의) 내용보다, 평자의 해석이 더 눈에 띄는 ‘너무 진지한’ 비평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텍스트는 멀찍이 밀쳐둔 채 페미니즘·마르크시즘적인 교조를 재확인하는 현학적인 비평이야말로 관객을 영화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재 영화 담론의 강박증을 보여주는 어휘들로 ‘예술·작가·독립·칸’등을 꼽았다. 그는 대신 풀이말을 ‘대중 영화·관객·충무로·아시아 중심의 사고’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보통 사람의, 관객을 위한, 주체적인 사고를 내세운 셈이다.

‘예술 영화는 없다’혹은 ‘예술 영화, 나쁜 일을 더 많이 하고 있다’는 선언은, 특히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여러 주제에 걸쳐 의견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론이 그의 예술 영화론에 대한 반박과 지지에 몰려 있다. 통신 공간에도 이 주장에 대한 언급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강교수는 예술 영화는 없다는 수사(修辭)를 통해 ‘충무로 영화 무시 말라, 신파 멜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통념은 그가 상정하는 것보다 훨씬 깨어 있는 것 같다. 한 네티즌은‘예술 영화가 없다기보다, 예술 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반대로 비예술 영화(상업 영화)를 전제하게 되는데, 그런 이분법이 과연 우리 영화계에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뜻일 것이다’(천리안 pcdragon)라면서 문제 의식을 찬찬히 되짚어 준다. 예술과 상업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자는 주장은, 99년에는 이미 진부해져 버린 셈이다. 강교수는 90년대 한국의 예술 영화 운동이, 할리우드의 허상을 폭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반대로 유럽의 스타일을 한국 영화가 따라야 할 전범으로 여기는 또 다른 물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이런 인식이 누구의 것이냐는 반론이 나올 법하다. ‘강교수는 많은 사람이 예술 영화 = 유럽 영화 = 롱테이크 = 좋은 영화라는 등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는데, 대체 누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인지 궁금하다.’(하이텔 ID KHONSOU)

둘의 구분을 없애는 것보다 둘의 길항 관계를 살피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라는 지적은 더욱 따끔하다(문재철, <씨네 21>). 강교수가 ‘영화는, 어쨌든 상품’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술·상업 영화의 개념을 가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함으로써 영화가 둘 사이의 긴장을 통해 풍부해졌다는 점을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의 예이기는 하지만, 50년대 말 위기에 처한 할리우드가 유럽의 영화 전통과 결합함으로써‘뉴 아메리칸 시네마’라는 것을 창조해내고 이를 회생의 전기로 삼은 것은, 긴장과 흡수의 고전적인 예로 꼽힌다(피터 레브, <유로 아메리칸 시네마>). ‘오히려 한국 영화계를 지배하는 것은, 예술 영화에 대한 지향이 아니라 숫자 콤플렉스다’라는 문씨의 지적은, 강교수가 서 있는 지점을 더욱 명확히 일러준다.

그가 말한 대로 충무로는 혁명 중이다. 조금만 관객을 얕보았다가는 뒤통수를 맞는다는 말도 맞다. 문제는 무비판적으로‘충무로 만세’를 외치는 태도다. 사실‘충무로는 혁명중’이라는 강교수의 말은, 한국 영화가 여전히 고만고만한 장르 영화를 양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새로울 수 있으나, ‘변신을 거듭하는 충무로’가 보기에는 뒷북일 공산이 크다. 그의 논리는‘관객과 겨루어라, 시장이 장땡이다’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류·비주류 간의 긴장 관계를 살피고, 흥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아야 할 때도 그는 ‘충무로 만세’를 외친다. 대신 독립 영화에 이끌리는 영화인을 향해 야멸차게 말한다. ‘기껏 파일럿 필름(테스트 필름) 만들어 충무로 기획자에게 잘 보이겠다는 사람들이 왜 거창하게 독립 영화 개념을 끌어안고 있느냐. 충무로가 독립 영화다.’

‘관객과 겨루라’는 말만으로는, 왜 흥행을 목표로 한 영화들이 판판이 깨지는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의 말대로 셰익스피어가 고매한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작품을 썼기에 위대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왜 같은 조건에서 관객과 겨루고자 했던 다른 작가들이 실패했는지에 대한 답은 들려주지 못하는 것이다.

강교수 스스로 자신의 작업이 ‘전방향 화살 쏘기’라고 이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가 구체적인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감안하면 훨씬 흥미롭다. 예술 영화가 없다는 선언은, 충무로 영화에도 긍지를 가지라는 권유인 동시에 ‘예술 영화 전용관이나 한국 영화 상영관이 필요하다’는 세간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문성근씨와 충무로 포럼측의 주장에 대한 반격도 그가 노리는 바다. 그는 정부 기금을 한국 영화의 편수를 늘리는 데 쓰자는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말한다.
정부 지원, 독인가 약인가

강교수의 논리는‘한 시장주의자의 모험’(이경일, 하이텔 KEN21)이라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시장 지상 노선을 취한다. 그의 불개입 원칙은 ‘정부 지원, 장기적으로는 독약이다’라는 주장에 요약되어 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펴는 현실적인 배경은, 정부가 2003년까지 총 2조2천억 원에 이르는 문화산업기금을 조성할 계획을 확정했으며, 이와 별도로 설치되는 영상진흥금고(금고) 기금도 천억 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가 정부 지원에 대해 이런 극언을 하는 이유는, 돈을 쏟아부으면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낙관이 의외로 참담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영화계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현실적으로 한국 영화에 대한 논의는 두 갈래다. 하나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쟁력 신화를 의심해 보는 것이다. 스크린 쿼터 지키기와 영화 제작 편수 늘리기 정책이 전자의 예라면, 후자는 정부가 설파하는‘문화산업론’이 과대 망상이 아닌지 되묻는 것으로 드러난다. 특히 김영삼 정부에서 ‘<쥐라기 공원>과 현대 자동차’로 상징되던 영상산업에 대한 장밋빛 기대가, 여전히 ‘<용가리>와 신지식인 심형래’로 꼴만 바꾼 채 이어지고 있는 요즘, 과연 문화를 ‘산업’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누구보다 한국 영화의 경쟁력에 관심이 많은 강교수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지원책을 펴는 것에 대해서도, 문화를 산업으로 접근해서 되겠느냐는 ‘삐딱한 시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오른쪽으로 더 나아간다. ‘괜한 간섭 말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는 것이다. 영화계에 필요한 돈은, 어차피 관객(시장)으로부터 나오니 괜히 정부가 돈을 쏟아부어 시장 질서를 교란하지 말라는 것이다.

강교수의 논지는 이렇다.‘한국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뿐 아니라 책·음반·비디오 게임·텔레비전과 경쟁하는 관계여서 관객이 늘어나는 데 한계가 있다.’심지어 <쉬리>와 같은 ‘대박’(흥행 성공작)이 나오면 다른 한국 영화는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로 시장이 빡빡하다는 것이다. 시장이 원하지 않는데도 정부가 인위적으로 제작을 부추겨 많은 영화를 쏟아내면, 그나마 뛰어난 기획력으로 시장에서 자기 몫을 개척해온 영화사의 경쟁력을 갉아 먹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영화계는 이 지원금을 실업 기금으로 내놓으라’고 말한다. 영화계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에 왜 거창한 명분을 끌어들여 세금을 탕진하느냐는 문제 제기이다.

‘서유럽 영화는 50년대에는 경쟁력이 있었지만, 60년대 중반 보호 정책의 우산 밑으로 들어간 후 할리우드에 일방적으로 밀리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보호보다 자유 경쟁이 궁극적으로 문화의 질을 확실히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프랑스가 강력한 문화 보호책을 폈기에 그나마 다른 서유럽 국가에 비해서 할리우드 공세에 버티고 있다는‘정설’과는 다른 해석이어서 눈길을 끈다(109쪽 딸린 기사 참조).

기금 운용 주체에 대한 불신도 한몫

‘가난한 나라에서 세금을 끌어들여 영상산업을 지원하는 것이 영화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설사 정부가 나서는 경우라도 제작비를 직접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유통망 정비 등과 같이 시장을 투명하게 하는 일에 국한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교수가 이런 주장을 펴는 데는, 자유 경쟁을 신봉하는 원칙도 원칙이지만, 기금을 운용할 주체에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는 영진위 구성을 놓고도 ‘유능한 펀드 매니저 세 사람, 깐깐한 회계사 한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 영화인(영화인협회와 충무로 포럼 포함)은 얼씬거리지 말 것, 그래야 기금이 남아난다’는 냉소적인 답변을 내놓은 바 있다. 주인 없는 돈은, 결국 빈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지원 방안에 대한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김혜준씨(한국영화연구소 부소장)는 생각이 많이 다르다. 현재 영화산업은 기능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시장에만 맡길 수 없고, 정책적 개입과 시장 기능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어떤 방식으로 지원할 것인가가 중요하지, 개입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는‘강교수의 우려는 영화계의 기존 관행을 염두에 두었을 때 지극히 현실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토종이 할리우드보다 경쟁력이 있다는 강교수의 ‘신토불이’론에 위안받기보다는, 할리우드의 공세가 더욱 거세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 영화가 오랫동안 대비해 온 듯하지만 아직 허약하다는 것이다. 우노필름 차승재 대표도 비슷한 입장이다. 지원금은 한국 영화가 산업적인 발판을 다지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종자돈이라는 것이다.

영진위가 출범한 뒤 확정될 사항이지만, 기금은 대략 △상업 영화 부문에 대한 투자 △예술 영화 지원 △유통망 정비 등에 고루 쓰일 예정이다. 특기할 것은, 지원 방식이다. 제작을 지원하되, 기금을 까먹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김혜준 실장이 마련한 초안은 투자전문조합을 기본 모델로 내세우고 있다. 영화사·창투사·대기업·개인 투자자 등의 돈을 모아 투자전문조합을 구성하면, 그 액수에 따라 일정 비율을 (융자가 아닌) 투자 방식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투자조합인 ‘소피카’방식을 참조한 것이다.

여의도와의 연계에도 역점을 둔다. 방송사의 외주 제작 비율을 높여 독립 프로덕션 활성화를 꾀하고, 사후에 방영 판권을 사들이는 것이 아닌 선매 방식으로 제작비를 유치하자는 방안이다. 이는 유럽에서 많이 택하는 자국 영화 보호책이다.

정부의 지원이 확정된 마당에, 간섭 말라는 강교수의 주장은 그만큼 신중한 기금 운용을 당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소 논리가 거칠어 논박할 여지가 있지만, 영화계가 한번쯤 짚어보아야 할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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