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린 사회가 빚어낸 ‘의적 신기루’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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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 둘러싼 ‘의적 신드롬’ 진단/“사회 모순이 빚어낸 현상”…부조리 개선할 계기 삼아야
키174㎝ 몸무게 70㎏ 안팎인 신체 건강한 자. 89년 3월 서울 돈암동에서 일당 5명과 함께 한 문구점 주인을 칼로 난자해 끔찍하게 살해한 강도 살인자. 무기형을 선고받은 뒤 부산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97년 1월 말 교도소 담장을 뛰어넘어 ‘세상 속으로’ 잠적한 탈옥수. 탈옥한 뒤로 90회 이상 크고 작은 강·절도를 해 5억여 원을 털며 공권력과 법 질서를 철저히 유린한 무법자…. 감상과 군더더기를 뺀 신창원의 최근 몇년 사이 모습이다.

지난 7월16일 오후 5시20분께 신창원은 동거녀와 함께 은신해 있던 전남 순천시 대주파크빌 아파트에서 한 시민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2년6개월여에 걸친 도주 행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예상 밖으로 어이없고 싱겁게 끝난 결론 부분만 빼면, 그는 한마디로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러면서도 범죄와 도주에는 거의 타고난 재능을 가진 흉악범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신창원 쫄티’ 왜 불티 나는가

하지만 그에게서 잠시 눈길을 거두어 주위를 돌아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신창원이 체포될 때 입었던 ‘쫄티’가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철부지 아이들 중 상당수는 그를 ‘멋지다’고 말한다. 그가 체포·재수감된 사실에 대해 ‘아쉽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PC통신 토론방에는 흉악범인 그를 오히려 지지·두둔·동정·연민하는 발언들이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외신은 신창원이 잡힌 며칠 뒤 그를 ‘한국의 로빈 후드’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을까. 왜 대중은 그의 실체를 간과하거나 또는 외면하면서 그에게 ‘의적(義賊)’이라는 옷을 입히려고 하는 것일까.

일부 논자들은 1차 원인을 신창원에게서 찾는다. 2년6개월여 동안 도주하면서 경찰을 철저하게 농락한 그 본능적인 감각과 비상한 머리로, 이번에는 또 한번 교묘하게 국민을 농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 김상진씨는 “그는 국민을 상대로 하나뿐인 진실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무수한 거짓을 끼워 팔고 있다”라고 혹평한다.

여기서 진실이란, 그가 일기장에 적은 일련의 ‘사회 고발성’ 발언을 가리킨다. 즉 교도소내 야만적 처우, 다른 말로 교도 행정·행형 제도의 난맥상이다. 신창원은 지난해 7월16일 도주할 때 버리고 간 일기장에서 ‘교도소측의 가혹한 체벌 때문에 탈옥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꼭 1년 뒤 체포될 때 발견된 일기장에서 그는 좀더 구체적으로 교도 행정의 야만성을 폭로했다.‘85년 소년 교도소에 있을 때 담당 교도관이 재소자들을 불러모아 입을 벌리라고 한 뒤 가래침을 뱉고, 재래식 화장실에 얼굴을 처박도록 했다….’

신창원은 바로 이같은 폭로에 기대어 자신의 흉악 무도한 본질을 흐려놓으려고 머리를 썼고, 대중은 그가 쳐놓은 덫에 보기좋게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김상진씨는 “신창원은 매우 지능적인 인물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남의 심리를 이용해 여론 조작을 잘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도 행정의 야만성이라는 진실에, 가진 자에 대한 적대감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 불우한 성장 경험 따위 소품을 적절히 가미해 자신의 범죄를 미화하고 은폐했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신창원이 스스로를 의적으로 보이게끔 행세했다는 것이다.
조세형씨 “언론이 신창원 영웅화 부추겼다”

정반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5공 초기 부잣집만 골라 털다가 붙잡혀 ‘대도(大盜)’라는 별명을 얻은 조세형씨가 대표적이다. 현재 신창원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란은, 그것이 그를 두둔하는 것이든 비난하는 것이든, 신창원이 아닌 제3자의 ‘자기만의 이야기’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고 조씨는 주장한다. “신창원은 강도 살인을 저지른 외에 탈옥까지 했고, 탈옥한 뒤에도 강도짓을 일삼았다. 이런 사람을 도덕적으로 판단한다는 사실 자체가 난센스다. 이미 도덕성을 상실한 범죄자를 어떻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 판단할 수 있는가”라고 조씨는 묻는다.

신창원의 탈옥과 도주 행각 그리고 일기에 대한 조씨의 평가는 냉정하다. 조씨는 “탈옥은 본능적인 것이며, 죄수라면 누구에게나 따라다니는 유혹이다. 또 도주는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신창원은 목숨을 걸고 탈옥을 결행할 만큼 담대하다는 점을 빼면 다른 범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조씨의 논리를 따라가면 신창원에 대한 의적 논란은 그의 실체와는 상관없이 제3자들의 머리 속에 그려진 ‘자기만의 신창원’이었던 것으로 귀결된다. 특히 조씨는 이같은 현상의 배후에 언론이 이제까지 보여온 보도 태도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신창원이 스스로 의적이라고 했나, 영웅이라고 했나. 그러나 그가 체포되기 전 언론 일반은 ‘신출 귀몰’ 어쩌고 하며 도주 행각을 생중계했다. 언론이 동원한 신출귀몰 따위 용어가 한 범죄자를 영웅시하도록 충동질했다”라고 조씨는 말했다.

의적 논란에 대한 제3의 시각도 있다. 문화 평론가 이성욱씨는 신창원을 영웅시 또는 의적시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대중의 로맨티시즘이 숨어 있다고 분석한다. 즉 대중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환멸이 깊어질 때, 한편으로는 원한을 풍자할 대상을,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시할 대상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신창원이 바로 이같은 동일시 과정의 핵심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가 대중이 하고 싶은 말(또는 행동)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의 일기에는…누가 듣더라도 공감할 만한 대목이 기록되어 있었다. 거기에 공감하면서 사람들은 흉악범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나팔수 역할을 한 신창원을 떠올린다”라고 지적했다(〈시사저널〉 제509호 ‘문화 비평’ 참조).

이씨의 개념화는 다른 모범적인 사례를 통해서 설득력을 얻는다. ‘대도 조세형 사건’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으로 거듭나 재소자 선교 활동에 바쁜 조씨가 ‘대도’로 불리며 사회의 눈과 귀를 집중시켰던 때는 82년 11월. 김준성 전 부총리를 비롯해 국회의원 등 유명 인사 집만을 골라 물방울 다이아몬드 등 보석과 거액의 현금·수표를 털고 다니다 검거되었다. 조씨는 유독 고관 대작 집만 골라 털었던 자신의 절도 행각에 대해 “기왕 도둑질을 할 바엔 큰 집을 터는 것이 남는 게 많고, 노동력도 절약된다고 생각해 그렇게 했다. 다만 부촌에 있는 집 중에서도 큰 집을 털다 보니 그게 죄다 한가락 하는 사람들 집이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나 조씨의 절도 유형과 두 번에 걸친 탈옥 시도(82·83년)는 그를 일약 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르게 했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는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민주화 요구를 군홧발로 짓밟고 등장해 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82년이었다. 언론마저 침묵과 굴종을 강요당하던 시절, 비록 절도범이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고 고관 대작들의 부도덕성과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조씨의 ‘솜씨’에 시민은 일종의 통쾌함마저 느꼈다.

탈주범 10여 명이 네 번이나 연쇄 인질극을 벌이다 유혈이 낭자한 자살극까지 벌인 이른바 ‘지강헌 사건’도 이와 유사한 사례이다. 지강헌을 비롯한 미결수 10여 명이 탈주 행각을 시작한 때는,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감되던 도중 호송 교도관들을 때려눕히고 버스를 빼앗은 88년 10월 초순이었다. 곧 서울로 들어온 탈주범들은 안암동·한양대 일대·서울대병원 부근 가정집을 돌아다니며 인질극을 벌이다가 마지막으로 침입한 북가좌동의 한 주택에서 탈주 9일 만에 최후를 맞았다.
임꺽정·장길산 모두 사회 혼란기에 등장

주범 격인 지강헌은 자해 소동을 벌이다가 경찰에 사살되었다. ‘유전 무죄, 무전 유죄’는 바로 지강헌이 죽기 전,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할 때 외친 말이다. 이 말이 나올 무렵 사회는 들끓고 있었다. 노태우 정권 등장과 더불어 전두환·이순자 부부를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을 휩쓸었으며, 이보다 앞서 국회에서는 5공을 심판하는 청문회가 열렸다. 지강헌 사건 뒤 대학가 시위 현장에는 그의 명언을 패러디한 ‘유탄 유석, 무탄 무석’이라는 플래카드가 단골로 내걸리기도 했다.

주인공이 신창원이든 조세형이든 이들은 사회사가가 정의한 ‘고전적 유형’의 의적(義賊)이나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의적의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일찍이 사회사가 에릭 홉스봄은 의적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신사 강도 또는 로빈 후드형 △원초적인 저항 전투자나 게릴라 부대 △테러를 한 복수자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우는 비적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의적 소설사〉를 쓴 장양수 교수(동의대)는 의적을 규정하는 조건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빼앗은 재물로 가난한 자를 돕는다 △민중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다 등 몇 가지 항목을 덧붙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꾸며낸 이야기든 실제 이야기든 의적이 출현한다는 사실은 사회의 불안정성·불평등성을 전제로 하거나 반영한다는 것이다. 특히 역사가들은 정상적인 사회 질서가 무너져 내릴 때 흉악범이 의적으로 둔갑할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임꺽정·홍길동·장길산 등 조선 시대의 유명한 도둑은 한결같이 이같은 부류에 속하며, 최근 논란을 빚는 신창원도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같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에서 의적으로 그려진 임꺽정은 조선조 명종 때인 1559년께에 등장해 1562년께까지 도둑으로 이름을 떨친 실존 인물이다. 소장 역사가 이덕일씨는 ‘실존 인물’ 임꺽정에 대해 “기록에 나타난 행동만으로는 임꺽정에게서 의적의 냄새를 맡아 보기 어렵다”라고 말한다. 단 역사적으로 상황을 짚어 보면 임꺽정이라는 떼도둑의 수괴가 피지배층, 주로 농민에 의해 의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개연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의 섭정과 세도가 윤원형 일파의 전횡으로 사회가 몹시 혼탁해 농민을 비롯한 민중 불만이 날로 높아갔던 시기였다. 게다가 역사 기록에조차 임꺽정이 ‘대낮에도 관문을 포위하고 수령 나졸을 사살하며’ ‘옥문을 부수고 수감된 일당까지 구출하는’ 등 통쾌한 활약상이 나타나 있다.

조선조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를 무대로 맹위를 떨쳤던 홍길동이나, 조선조 숙종 때 (17세기) 중앙 정부에 악명을 떨쳤던 장길산이 처했던 시대 상황 역시 비슷했다. 연산군은 조선조 때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폭군으로 꼽힌다. 장길산이 활동했던 시기는 역사가들 사이에 조선 시대에서 당쟁이 가장 극심했던 혼란기로 손꼽힌다. 홍길동·장길산은 바로 이같은 시대 배경을 무대로 하여 등장한 도둑들이지만, 모두 지배층의 황음(荒淫)·부패·침학에 치를 떠는 농민 또는 피지배층에 의해 의적으로 ‘가치 전화’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주장이다.

이른바 신창원 현상에 대한 해법은 크게 둘로 나뉜다. 사회 일각에서는 신창원 의적화 현상을 가진 자·잘난 사람은 여지없이 깎아내리고 보는 한국 사회 특유의 고질을 반영한다고 본다. 있는 사람의 돈을 무조건 ‘구린 돈’이라고 치부하면서 자신의 무능력·자질 부족을 은폐하려는 못된 버릇이 신창원 의적화 심리 저변에도 깔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신창원 현상을 뿌리 뽑아야 할 사회 악습으로 본다.

반면 신창원 의적화 현상을 사회 모순을 해소할 교훈으로 적극 활용하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사회의 건강성에 빨간불이 켜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임을 빨리 깨달아 사회 체질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사실이 있다. 우리 사회에 의적은 없다. 다만 의적은 사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고, 신화화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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