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망명해도 평양은 모두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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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7.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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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주 모스크바 대학 교수-발레리 데 니소프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 특별 대담
황장엽 비서 망명 사건 이후 평양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시사저널> 객원 편집위원인 이창주 모스크바 대학 교수가 발레리 데니소프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와 전화로 인터뷰해 황비서 망명 후 평양의 생생한 표정을 전해왔다. 이 대담은 지난 2월26일 모스크바 시간 오전 9시30분부터 10시10분까지 약 40분간 진행되었다. <편집자>

이창주 교수:지금 서울은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가 망명한 사건으로 흥분과 우려가 대단하다. 현재 평양의 상황과 표정은 어떤 상태인지 설명해 달라.

데니소프 대사:이곳 평양은 서울과 달리 아주 평온하며 모든 상황이 정상이다. 물론 이곳의 언론 보도에 한계가 있으나 정부와 당·군 간부들을 포함해 평양의 상당수 시민이 황장엽 비서의 망명 사건을 알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고위 당간부의 이탈에 따른 위기감이나 우려보다는 황비서의 배신에 분노를 느끼며 오히려 더 단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창주:황장엽 비서의 망명 문제는 한반도 분단사에서 매우 역사적인 상징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북한 정권에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이 겉으로 아무리 태연한 모습을 보이며 망명의 의미를 평가 절하한다 해도 과거와 현재까지 북한 정권에 대한 황비서의 기여와 역할과 비중을 감안할 때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주변 나라나 국제 사회, 당사자인 한국이 갖는 관심은 비상하다고 할 수 있다. 현지 외교가의 흐름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데니소프:북한의 처지에서는 좋지 못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정치적으로도 충격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태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초기에는 평양 주재 외교관들이나 북한 지도부에서도 혼란을 드러냈 다. 최근 황비서는 북한의 국가 경영에서 핵심적인 역할과 임무를 갖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명성에 비해 실제적인 손실은 크지 않다는 것이 북한 지도부의 판단으로 보인다. 평양 주재 외교관의 활동 또한 활발하며 변화가 없다. 합작법인이나 평양 주재 외국 상사나 기관 또한 특별한 영향을 받지 않고 잘 운영되고 있으며, 러시아의 경우는 나진·선봉 지대 투자 및 북한 기업과의 합작법인 설립 등 경제 협력 프로그램을 그대로 진행해 나가고 있다. 이창주:황비서 망명 사건을 긴급 보도하면서 한국의 방송과 신문은 일제히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을 실었다.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북한 체제의 붕괴가 시작되었다거나 공동화 현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혹자는 통일 정책 및 대북 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해외 언론들도 서울발 기사를 인용해 한몫 거들고 있다. 과거에도 탈북자 가족이 망명해올 때마다 전문가라는 이들이 나와 같은 내용의 요란스러움을 되풀이했지만 이번 경우는 심각하다. 과연 황비서 한 사람의 망명으로 북한 체제가 흔들릴 정도로 허약한 것인지, 한반도 문제의 실제적 전문가이자 현지 대사로서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진단해 달라.

데니소프:나도 소식을 들어 알고 있다. 현재의 북한 체제와 정권은 지극히 안정적이다. 아울러 국제적 협력 관계도 잘 발전되어 가고 있다. 이 말은 국제 사회가 이 사건과 무관하게 북한을 돕고 있음을 뜻한다. 미국이 주도하며 러시아·중국·일본·독일·프랑스 등이 지지하고 협력하는 북한의 연착륙이 국제 사회의 대북 관심사이다. 북한이 겪고 있는 현재의 심각한 경제 상황은 이 틀 속에서 극복될 것으로 나는 전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북한의 개혁과 개방이 진행되리라고 본다. 이 프로그램에 한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대북 정책의 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번 황비서 사건과 비슷한 사태가 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북한 체제 붕괴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적어도 현재의 북한 구조에서 볼 때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다. 평양에 곧 미국 연락사무소가 세워질 전망이다. 연락사무소가 평양에 들어오면 평양의 외교 사회도 새롭게 변화하리라고 본다. 이곳에 있는 외교관들은 미국 연락사무소 개설 시기가 임박했다는 소식에 반가워하고 있다. 한국의 북한 전문가들은 한반도 주변 정세와 북한의 특별한 구조와 체제를 정확히 분석할 필요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창주:아무리 핵심적인 역할이 없었다 하더라도 북한 권력의 핵인 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망명한 사태는 북한 권력 체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예컨대 군부 중심의 강경한 보수주의로 갈지, 개혁·개방을 통한 국제 사회 편입 정책을 적극화할지, 아니면 주체사상 이론을 고수하며 이데올로기 중심의 틀을 유지할지 불투명하다. 머지 않아 김정일 비서의 당 총비서 및 국가 주석 취임도 예상된다. 어떤 형태의 변화가 예상되는가?

데니소프:북한 정권의 권력 구조는 어떤 식으로든 개편되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질지는 예측키 어려우나 이곳 분위기를 두 가지로 전망할 수 있다.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국내적으로는 보수 입장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개혁·개방의 현실 외교에 초점을 맞추리라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일정 기간 강경 세력이 주도하는 대내외적 체제 강화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보다는 전자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이렇게 될 경우 북한 권력 엘리트들이 자리를 옮길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현재 북한에는 황장엽 이후 세대의 이론가가 많이 성장해 있다. 최근 전면 중단된 상태이지만, 이들 중에는 40년대부터 80년 초에 이르기까지 해외 유학 경험을 축적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북한 체제의 속성으로 보아 국내 정치에 미치는 군부의 영향은 여전하리라 본다. 이 부분은 특별히 변화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다. 바로 외교부를 포함한 경제 분야에 새로운 엘리트들이 등장하리라는 점이다. 특히 앞으로는 외교부의 역할이 상당히 커질 전망이다. 이러한 현상은 북한 정권의 가장 핵심적 과제일 북·미, 북·일 수교 일정과 관련해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중국과 관계를 새로 정립하는 일도 중요한 사안이다.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는 순조롭다. 이번 황장엽 사건에서 초기의 외교적 제스처를 제외하고는 북한이 중국에 대해 어떤 특별한 곤란을 겪지 않게 하고 있음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교수가 지적한 대로 금년 7, 8월로 예정된 김정일의 국가 주석 취임이 이루어지면 적극적인 대외 정책이 정부를 중심으로 해 전개될 것이다. 남북 관계에서 이러한 과정과 시기가 절대로 필요하며, 이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두가 협력해야 한다고 본다.

이창주:내가 판단하기에는 이번에 발생한 황장엽 비서 망명 사건이 실질적 남북 관계나 국제 관계에는 별다른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본다. 남북 관계는 현재 최악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으므로 일부 전문가들이 논하고 있는 새로운 긴장 국면이나 대남 적대 정책 강화 등은 전혀 특별한 의미가 없다. 황장엽 비서의 망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한국에서는 안보 의식·안보 태세를 강화한다는 명분이 선거 정국과 맞물려 보수주의 논리가 지배할 전망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체제를 강화하는 데에 역점을 두게 될 것이다. 어느 경우든 분단 조국의 통일에 기여하기 위해, 분단 민족의 불행을 구원하기 위해 망명을 결심했다는 황장엽 비서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데니소프:전적으로 이교수의 지적에 동의한다.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대남·대북 공작 형태의 접촉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국제 사회의 지지도 받지 못한다. 다자 협상 방식 참여와 더불어 남북간 당사자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반도 통일 문제는 예측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내가 여러 회의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남북 모두가 체제에 대한 간섭과 비난을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민간의 교류 폭을 넓혀 나가야만 한다. 이 절차를 통해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고 신뢰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경우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민간 교류를 차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황장엽 망명 사건에도 불구하고 4자 회담 설명회 개최가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남북 관계의 본질과 이해 관계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것이 남북 관계의 현주소이다. 그리고 좋은 실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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