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한·중·일·러가 나설 차례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4.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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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북핵 해법 ‘제3의 카드’ 찾아야
북한과 미국은 지난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 2차 6자 회담의 주요 의제에 대해 물밑 접촉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접촉은 뉴욕 등의 북·미 채널과 중국이 개입된 북한·미국·중국 3각 채널로 동시에 진행되어 왔다. 이같은 접촉 과정을 통해 2차 6자 회담에 대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한마디로 ‘6자 회담의 판은 깨지 않되 시간을 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번 6자 회담에서 미국이 나름으로 성의를 다했다는 점을 입증하고자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떤 식으로든 먼저 판을 깨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핵 동결 선언과 미국의 대북 안전 보장 선언’이 서로 맞교환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전망한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다. 미국측은 핵 동결과 관련한 구체적인 논의는 북·미 양자 간의 실무 채널(워킹 그룹)이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동안 북·미 양자 대화는 주로 북한측의 요구 사항이었다. 미국은 모든 것을 6자가 동등하게 논의해야 한다면서 이를 거부해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미국 보수 세력 내에서도 북·미 대화 채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물론 그것은 정략적인 이유에서다.

우선 6자 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너무 커졌다. 특히 남북한 모두 중국의 중재력에 의존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것은 6자의 틀로는 앞으로 미국이 원하는 대로 회담의 완급을 조절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보는 눈’이 너무 많은 것이다. 미국 처지에서는 6자 회담에서 핵 동결과 안전 보장에 대해 추상적으로 합의해놓고 그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은 북·미 실무협의에서 다룬다는 식으로 빠져나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단 북·미 양자 협의로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지뢰밭이다. 우선 핵 동결과 사찰, 그리고 보상에서부터 양측의 입장 차이가 확연하다. 북한은 영변 5MW 원자로 동결을 선언하고 사찰이 시작되는 시점에 미국이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북한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 제재를 해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핵 동결에서 사찰 그리고 핵 시설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단계 별로 나누어 접근한다.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1단계를 어디까지로 보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은 핵 동결 선언에 이어 핵 사찰이 끝날 때까지를 1단계로 보고 있다. 이 1단계가 끝나야 대북 안전 보장 조처를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찰이 이루어지기 전에 보상을 해야 한다는 북측의 주장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미국측이 설정한 2단계는 핵 사찰이 완료되고 사찰보고서에 따라 영변 핵 시설에 대한 동결 조처가 완료될 때까지이다. 2002년 12월 북한이 추방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이 다시 영변에 상주하고 모든 것이 원상 회복되면 그 시점에서 대북 제재를 해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단계는 북한의 핵 시설에 대한 해체 작업이 끝나는 시점을 말한다. 이때 북한의 안전에 대한 다자 문서 보장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미국과 국제 사회의 경제 지원이 개시된다. 이 국제 사회의 경제 지원에 해당하는 것이 남북 경협과 북·일 수교 회담 등이다. 따라서 최근의 북·일 회담은 맛보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북·미 교섭이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군데군데 ‘스페셜 메뉴’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빠르게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 커넥션 문제이다. 지난 2월4일 파키스탄 핵 개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북한에도 핵 기술을 이전했다고 밝힘으로써 고농축 우라늄 핵(HEU) 프로그램 문제가 또다시 전면에 떠올랐다. 북한은 이미 이를 부인한 상태이기 때문에 북·미 간에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최근 워싱턴 정가에는 고농축 우라늄 핵 문제가 이 상태로 떠오르면 2차 6자 회담 자체도 위험한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북한에 대한 핵 불사용 문제 역시 북·미 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미국은 이 문제를 핵 선제공격 전략과 미사일 방어(MD) 체제, 그리고 일본에 대한 핵우산 등 동북아 전략과 국가 이익의 근간과 관련된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6자 회담이 표류하고 있는 근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미국측은 이처럼 양자 회담을 통해 시간을 끌면서 부시 대통령의 인기가 다시 상승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속셈인 것으로 보인다. 몇몇 국내 전문가들은 오는 6,7월께가 그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때쯤 이라크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가능성이 있고, 또 그때쯤이면 민주당 케리 후보의 거품도 많이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또한 현재 미국 정보기관들이 빈 라덴을 반경 50㎞ 이내까지 포위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적당한 시점에 그를 생포하는 이벤트를 연출하면 부시 지지율이 크게 올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 상황이 되면 북한과의 협상을 무산시키고 대북 제재나 봉쇄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부시가 곤경에 처해 있는 지금이야말로 북한이 가장 비싸게 핵을 팔 수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북한과 미국의 결정에 맡겨두고 있는 6자 회담의 기본 틀이 유지되는 한 북한은 운신할 폭이 크지 않다. 따라서 북한·미국에만 의존하는 기존 협상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북한과 미국이 충돌할 경우 가장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국가들, 즉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다. 여기에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연합(EU) 국가, 그리고 태국 등 아세안 국가까지 포함될 수도 있다.

국내의 한 전문가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한국·중국·러시아 등이 북한이나 미국이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3의 해법을 도출해 국제 사회의 동의를 거쳐 양국에 압박을 가하는 방식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나누어서 진행할 수도 있다. 1단계로 먼저 북한과 협상을 통해 국제 사회가 북한에 대한 안전과 경제 지원을 보장하고, 북한에 핵을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북한은 미국이 아닌 국제 사회를 향해 핵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분을 지킬 수 있다.

북한이 핵 포기에 동의하면 그 다음은 미국의 동의를 얻어낸다. 미국이 그동안 약속해온 ‘대담한 접근(bold approach)’을 시행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북한이 어쨌거나 먼저 핵을 포기한 셈이므로 미국도 체면이 서는 셈이다. 미국의 본심이 북한 핵 폐기에 있다면 이같은 협상 방식을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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