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정치 무관심 선거 때는 혼신 지원
  • 吳民秀 기자 ()
  • 승인 1997.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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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1장관 직에서 ‘해방’된 직후부터 대권 주자의 행보를 거침없이 내딛고 있는 김덕룡 의원 진영에는 남모르는 고민거리가 한 가지 있다. 김의원의 부인 김열자씨가 정치와는 담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부터 계보원·참모·기자 들로 문전 성시를 이루는 다른 차기 주자 후보들의 집과 달리 김의원 집은 비어 있다시피 한다. 새벽 5시 반만 되면 김의원은 정치 현장으로 출근하고, 김씨 역시 뒤이어 일터로 향한다. 김씨 직업은 내과 의사. 현재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에서 ‘자인내과’를 운영하고 있다. 큰 아들 원일씨는 미국에, 둘째 아들 도형씨는 일본에 유학 중이어서 집을 지키는 이는 김의원의 장모뿐이다.

그렇다고 밤에 집을 개방하는 것도 아니다. 밤 12시쯤에야 부부가 얼굴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김의원 가족은 정치에 관한 한 ‘무풍 지대’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일찌감치 정치에 남편을 빼앗긴 김씨가, 남편으로부터 동의를 받아낸 유일한 소신이다. 요컨대 ‘누구에게나 개인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고, 남편 또는 아버지가 정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식구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김의원은 13대에 처음으로 금배지를 단 이후 지금까지 아내와의 이 약속을 지켜오고 있다.“정치인 부인 아닌 내과 전문의 김열자”

이처럼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는 김씨의 성격은, 언론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문민 정부 출범 직후 김의원이 정무1장관에 막 취임했을 무렵이다. 김장관과 인터뷰를 한 여성지 기자가 집요하게 부부 사진 촬영을 요구했다. 참모진이 고심 끝에 아무 설명 없이 김씨를 모셔왔다. 그러나 김씨는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자마자 도망치다시피 그곳을 빠져나갔다. 한마디로 자신은 ‘정치인 김덕룡의 부인’이 아니라 ‘내과 전문의 김열자’라는 것이다.

이번 <시사저널> 인터뷰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뷰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참모들의 설명을 듣고, 기자는 일단 병원으로 찾아갔다. 병원 접수실에서 진료증을 끊은 뒤, 차례를 기다려 김씨를 만났다. 기자를 보자마자 김씨는 “이런 식으로 오면 곤란하다”라고 첫 마디를 꺼냈다. 병원이 중증 신장병 환자 전문 클리닉이어서 그런지, 기자의 신분을 금방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차나 한잔 하고 가라며 김씨는 끝내 정식 인터뷰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깐깐한 태도와 달리 김씨의 외모는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인상이었다.

어색한 대화가 20분쯤 이어졌다. 김의원이 여권의 차기 주자 후보 중 한 사람이고, 따라서 언론이 그 가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너무 서구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냐고 꼬집자 김씨는 “한국 정치가 그렇게 후진적이냐? 개인 생활은 보장해줘야 한다”라고 받아넘겼다.

그러나 이런 김씨도 선거 때만큼은 적극적으로 정치인의 아내가 된다. 13대 총선 당시, 김씨는 20년 동안 몸 담았던 국립의료원을 그만두었다. 당시 그의 직책은 내과 과장. 야당 총재인 YS 비서로 정치에 입문해서 변변한 수입도 없이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을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온 직장이었다. 그 이후 김씨는 말 그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뛰었다. 95년 현재의 병원을 개업했지만, 지난 총선에서도 지인들을 중심으로‘표 안나게’ 선거를 도왔다는 것이 김의원 참모들의 전언이다.

김씨가 동갑내기인 김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경기여고에 다니던 때였다.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서 남성중학교를 마치고 경복고에 유학온 김덕룡이 부친의 소개로 서울 가회동에서 하숙했는데, 하숙집 딸이 바로 김씨였다. 그렇게 알고 지내다가 김씨는 이화여대 의대에 진학했고, 김덕룡은 재수해서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김덕룡이 대학에 진학한 후 서로 소식이 끊긴 두 사람은 6·3 사태 때 다시 만났다.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으로 6·3 사태의 도화선이 된 문리대 단식 투쟁을 주도하던 김덕룡은, 이대 의대 팀의 일원으로 의료 지원을 나온 김열자씨와 몇 차례 조우했다. 그후 김덕룡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김씨는 미래의 시어머니 및 시누이들과 함께 부지런히 옥바라지하는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은 68년 결혼에 골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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