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업 방아쇠 당긴 ‘약값 실거래 상환제“
  • 權銀重 기자 ()
  • 승인 2000.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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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값 거품 빠지자 병원 수입 ‘뚝’…의약분업 돼도 부패 고리 끊길지 미지수
이번 의료 대란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지난해 11월15일 도입된 약값 실거래 상환제였다. 실거래 상환제란 보건복지부 고시가가 아니라 제약회사와 병원이 실제 거래하는 가격으로 의료보험조합이 약값을 지불하는 제도인데, 약값의 거품을 빼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 이전까지 병원들은 약값을 많게는 10배씩 부풀려 환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웠다.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 병원과 제약회사는 이중 계약을 맺었다. 병원은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환자에게 불필요한 약을 처방했다. 병원과 제약회사의 부적절한 관계는 약물 남용을 불렀다. 먹지 않아도 될 강도 높은 항생제를 환자에게 처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한국인의 항생제 내성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개인 의원이 소아 감기 환자에게 항생제를 처방하는 비율이 세계보건기구(WHO) 처방기준인 25%보다 세배나 높은 75%에 이른다.

제약회사는 값싼 자기 약을 써준 대가로 병원에 뒷돈을 갖다바쳤다. 이른바 리베이트다. 보건복지부는 이런 검은 거래를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현행 의료보험 수가로는 병원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훤히 꿰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도 정부를 설득해서 의료보험수가를 올리는 것보다는 약값을 부풀리는 것이 훨씬 수월했기 때문에 은밀한 거래는 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언론과 시민단체에 의해 폭로되면서 부패에 기댄 안정이 깨졌다. 시민단체는 예전처럼 부패의 주범으로 의약계를 지목하지 않고 의약계에 약품을 저가로 공급하는 제약회사를 주목했다. 제약회사가 제공하는 저가 의약품과 검은돈이 의료계를 병들게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여론에 밀려 보건복지부가 약값 실거래 상환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금 먹은 사람이 물을 켠다는 한 의약도매상의 비유처럼 의사들의 반발은 거셌다. 이때부터 이미 의료 대란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거래 실시되자 의협 대표부 성토

폐업을 지지한다고 밝힌 개업의 김 아무개씨는 “실거래 상환제가 도입되면서 약값에서 거품이 빠져 병원 경영에 엄청난 압박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전공의협의회의 한 관계자도 “약값 실거래가 실시되자 의협 대표부를 성토하기 시작했고 의사들이 동요했다”라고 말했다. 약품 의존도가 높아 타격이 큰 내과·소아과·가정의학과 의사들이 타격이 적은 정형외과·이비인후과 의사들보다 폐업에 참가하는 비율이 높았던 점도 이를 반증한다. 보건복지부가 2월에 발표한 약값 실거래가제 이후 동네 병원 매출 조사에서 내과가 42.7%, 가정의학과가 27.0%나 순익이 준 것으로 드러났다.

실거래 상환제로 자신의 소득이 정확하게 드러나게 된 것도 참기 힘든 일이었다. 인의협 관계자는 “의약 분업은 음성적인 의료 시장을 공적 시장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간섭받지 않고 높은 소득을 올리다가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자 의사들이 똘똘 뭉치게 되었다”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주사제마저 의약 분업으로 잃게 되자 의사들의 위기감은 더욱 높아졌다. 주사제는 일반 약품보다 이문이 큰 데다 의사와 환자를 묶어주는 고리 역할을 해왔다. 약보다 주사가 훨씬 효과가 높다는 ‘미신’에 사로잡힌 환자가 많은 탓이다. 호남 지역 면소재지에서 2년간 개업한 경험이 있는 이 아무개 의사는 “막무가내로 주사를 2대씩 놓아달라는 노인이 많았다”라고 회상했다. 한 약품 도매상인은 “일반 약품과 달리 주사제는 냉장과 차광을 해야 하는 등 관리가 까다로운데도 의사가 주사제를 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라고 꼬집했다. 의사들은 이처럼 제약회사가 제공한 랜딩비(약품 채택비)나 리베이트 같은 뒷돈을 대체 조제가 가능한 약국에 빼앗기는 것도 못마땅했다.

제약회사가 병원과 의사에게 돈을 뿌리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재단발전기금·매입 할인·할증(일명 프로: 덤으로 약을 더 주는 것)·약품 임상연구비 등 회계 처리가 되는 양성적인 방법이다. 또 리베이트(처방 사례비)·랜딩비·의국비(밥값과 술값)·학회지원비 등 오로지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음성적인 뒷돈이 있다. 병원에 비해 금액은 미미하지만 약국에도 뒷돈이 오간다.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에 따르면, 준종합병원 의사는 한달에 2백만~3백만원 정도의 음성적 수익을 올린다고 귀띔한다. 인의협은 100병상당 20억원, 보건의료산업노조연맹은 100병상당 10억원+α의 뒷돈이 떨어진다고 본다. 보사부는 1998년 조사를 통해 이런 검은돈이 의료기관 매출액의 15%인 8천8백억원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참여연대는 1998년 12월 약가 차액을 1조2천8백억원으로 추계했다. 약품으로 뒷돈을 챙기는 방법은 병원마다 약간씩 다르다. 국·공립 의료원은 제약회사와 계약하면서 약값을 높게 산정해 제약회사로부터 그 차액을 커미션으로 챙겼다. 개인 병원을 포함한 민간 병원은 보건부 고시가보다 훨씬 싸게 산 약을 환자에게 처방하고 비싸게 청구해 뒷돈을 챙겼다. 본사가 입수한 ㅎ제약의 리베이트 장부를 보면 1998년 11월 한 품목의 특판비와 사례비로 9천만원이 뿌려진 것을 알 수 있다(그림 참조).

뒷돈과 관련된 비리 사건은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영남대가 1993년부터 고려약품 등 5개 업체와 수의 계약을 퉁해 의약품 1천7백54억원어치를 조달하면서 매출 할인·대학발전기금·장학금 명목으로 99억5천만원을 받았다고 한 시민단체가 폭로하기도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993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소속 8개 병원이 동아제약 등 13개 제약회사로부터 1991∼1993년 95억원을 받아 재단으로 전입했다고 지적했다. 발전기금으로 돈을 받는 것은 지금도 대학 병원들이 가장 애용하는 방법이다.

또 결산 회계에 올라 있는 매입 할인 항목으로도 병원의 뒷돈 규모를 알 수 있다. 매입 할인이란 의약품 판매업자가 의료기관으로부터 받아야 할 외상 금액의 잔액을 할인해 주는 것인데, 제약회사가 의료기관에 주는 랜딩비나 리베이트로 해석할 수 있다. 보건의료산업노조연맹 자료에 따르면, 1999년 안산병원을 증축한 고대병원의 추가경정예산에 기록된 매입 할인이 1997년 37억원에서 1998년 89억원으로 늘었다가 1999년에는 11억원으로 줄었다. 건설비를 조달하기 위해 리베이트를 미리 당겨 쓴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원칙적으로 이런 관행을 뿌리 뽑고 국민 건강을 도모하자는 것이 의약 분업의 취지다. 거래된 뒷돈 액수만큼 약을 더 먹어야 했던 국민에게 제대로 된 의약 서비스를 제공하고, 약값의 거품을 은밀하게 챙기던 의사에게는 수가를 인상해 적법한 수입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들이 이런 윈윈게임을 원하는지는 의문이다. 이번 폐업 사태에서 의쟁투는 의사 처방료 1천6백91원을 약사 조제료 3천7백3원보다 훨씬 높은 9천4백70원으로 올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정부가 제시한 인상가 2천8백63원의 3.2배다. 이 주장대로라면 의사들은 한달에 천만원 가까운 추가 수익(1일 환자 50명 기준)을 올리게 된다. 이런 무리한 요구는 의사들이 폐업한 순수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그래도 홍보비·광고비보다 싸다”

의약 분업이 실시되어도 뒷돈을 챙길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 의사는 “지난해 실거래 상환제를 도입해 1조3천억원 규모의 약값 거품 중에 9천억원이 줄었지만 나머지 4천억원의 거품이 여전히 남아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시행되는 실거래 상환제에도 허점이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와 의사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는 ㄷ제약의 한 관계자는 뒷돈이 사라질 리 없다는 점을 암시했다. 그는 “어쨌든 의약 분업이 실행되겠지만 대체 조제 문제를 어떻게 매듭짓느냐에 따라 리베이트나 랜딩비가 지금처럼 의사에게 갈지, 아니면 약사에게 갈지 결정된다”라고 말했다. 제약협회의 한 관계자는 “신약 홍보비나 광고료보다 리베이트나 랜딩비가 훨씬 싼 현실이므로 의약 분업이 실행되어도 판촉 중심의 영업 전략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건의료산업노조연맹의 한 관계자는 “이미 병원 자본이나 의사들이 약국을 직영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의약 분업의 취지가 무색해질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병원 자본과 의사들의 도덕성이 아쉽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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