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분노, 명분 없는 한풀이
  • 金恩男·權銀重·高在烈 기자 ()
  • 승인 2000.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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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곪아 터지고 만 의사 사회 해부
‘내인생에서 두 번째로 길었던 6월’.

한 386 세대 의사는 사상 초유의 의료계 집단 폐업에 참여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각인된 ‘첫 번째 6월’은 1987년 6월이었다.

6월항쟁과 의료계 집단 폐업. 한국 사회의 의사 집단에게 이 두 가지 사건은 공통된 의미를 갖고 있다. 좀처럼 자기 표현을 하지 않던 집단이 사회를 향해 발언했다는 공통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두 사건을 대하는 외부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14년 전 4·13 호헌 조처를 반대하는 ‘의사 1백37명 시국선언’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온 의사들에게 일반 국민은 열렬히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이같은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의료계에는 ‘인도주의 실천 의사 협의회’(인의협)처럼 ‘의사의 사회적 책임’을 내세운 단체가 등장할 수 있었다.

반면 ‘국민의 건강권 확보’를 내세우며 의료계가 벌인 이번 폐업 사태를 바라보는 일반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명분이야 어찌되었건 의사들의 행동에는 ‘환자 생명을 담보로 하여 기득권을 지키려는 집단 이기주의’라는 딱지가 붙었다. 폐업이 진행되는 와중에 서울대병원을 찾은 한 시민은 의과대학 본관 앞에 서 있는 히포크라테스 동상을 보며 이렇게 비아냥댔다. “엿 바꾸면, 엿은 많이 받겠다.”

폐업이 끝난 뒤에도 냉소적인 반응은 바뀌지 않았다. 대한의사협회가 폐업 철회를 공식 선언한 6월26일 PC통신과 인터넷에는 “이제 의사는 존경 아닌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빈터흐름) “잊지 말자! 의사 난동”(paxworld) “김대중 정부는 결국 이익 단체의 로비에 굴복하는 허약한 정권인가”(namssu) 같은 힐난이 이어졌다.

이처럼 일방적인 여론에 의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의료계는 전국 병·의원 90% 이상이 참여한 이번 폐업 결과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대한의사협회 회원 전용 게시판(CUG)에 글을 올린 한 의사의 말마따나 ‘지금까지 한번도 단결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단결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 7만 의사가 이 정도로 뭉쳤다는 것’ 자체가 의료계로서는 엄청난 성과였다.

여기에 힘입어 대한의사협회는 의약 분업에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걸려 있지 않은 전공의·봉직의(병원 의사)·교수까지 폐업에 동참한 뜻을 일반 국민이 읽어 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정부 의약분업안에 포함된 약사의 임의·대체 조제 허용 조항 등이 의사의 진료권(의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의료계의 이번 폐업 투쟁은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자존심 싸움’이라는 것이 협회의 주장이었다.

‘밥그릇’ 깨지니 자존심도 흔들린다?

실제로 이번 폐업에 참가한 의사들에게 ‘자존심’은 최대 화두였다. 서울대병원의 한 전공의는 ‘대학에서 4년 동안 배운 것이 의학 지식의 전부인 약사와 14년 이상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쳐야 전문의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의사가 동일선상에서 취급’되는 현실에, 자신들을 ‘반사회적인 기득권 세력’ 내지는 ‘개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민단체에 자존심을 다쳤다고 주장했다.

의사들은 나아가 그들의 자존심을 실추시킨 궁극적인 공적(公敵)이 정부라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의사들이 약가 마진 따위로 부당 이득을 챙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부가 저수가·저부담·저급여 체계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실정(失政)에 대한 책임을 은폐한 채 의사를 파렴치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정부 당국에 분노를 느낀다”라는 것이 민주의사회 김도석 공동대표의 말이다.

문제는 ‘밥그릇’이 흔들리기 전까지 ‘자존심’을 거론하지 않았던 의료계의 태도이다. 따지자면 이번 폐업 사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지난해 11월15일 보건복지부가 단행한 약가 인하 및 수가 인상 조처였다. 이는 쉽게 말해 병·의원이 음지(약가 마진)에서 얻던 소득의 원천을 차단하되, 이로 인한 손해를 양지(의보수가 인상)에서 보전할 수 있게끔 보장하겠다는 조처였다.

그런데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약가는 30.9%가 떨어지며 이른바 ‘실거래가’로 전환된 반면 의보수가는 9% 인상에 그친 것이다. 이로 인해 의사들이 입게 된 경제적 피해는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약가 차액을 주된 수입원으로 삼던 동네 의원(1차 의료기관)의 수입은 월 평균 2백만∼3백만 원 가까이 줄었다. 동네의원살리기운동본부 대표 임동규씨에 따르면, 이때부터 비로소 의사들은 의약 분업을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 인식하게 되었다.11·15 조처 이후 의사협회를 비롯한 의사 단체는 의보수가 재조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부분 시정하기까지 5개월을 끌었다. 인의협 우석균 기획국장은 이 과정에서 정부가 의료 개혁의 강력한 우군이 될 수 있었던 동네 의원 의사를 적으로 돌리는 우를 범했다고 지적한다(의약 분업이 제대로 시행되면 종합 병원 외래와 동네 의원이 경쟁하는 왜곡된 의료 전달 체계까지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구상이다).

분노한 의사들은 ‘수십 년 묵은 한(恨)’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1977년 정부가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부터 배태된 한이었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위해 의보 제도 도입을 서둘렀던 박정희 정권은 의보수가를 당시 관행 수가의 70% 수준으로 책정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보험 환자가 전체 환자의 10% 수준이어서 의사들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1989년 전국민을 대상으로 의보 제도가 확대되자 문제는 심각해졌다. 정부는 특별한 재정 지원 없이 계속해서 저수가 정책을 밀어붙였다. 지역 의보 재정의 50%를 국고로 지원하겠다던 김대중 대통령 또한 아직껏 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의사협회는 이번 폐업 과정에서 이를 집중 공략했다. 폐업에 돌입하며 협회가 낸 신문 광고 문안에는 이런 표현이 들어 있었다.‘사람 허벅지를 꿰매면 6천7백10원, 양복 바지를 짜깁기하면 3만원. 사람 아기를 받으면 4만3천7백50원, 개 새끼를 받으면 15만원’.

월 수입 6백만원의 ‘비결 아닌 비결’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의사들은 솔직하지 않았다. ‘국민 건강권 확보를 위한 범국민연대’(건강연대) 허윤정 간사는 의사들이 정부를 공격하기에 앞서 ‘생계를 위협하는 비참한 수준’의 저수가를 강요당해 왔다고 주장하면서도 월 평균 6백만 원이라는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던 ‘비결 아닌 비결’에 대해 겸허한 자기 고백과 반성을 했어야 옳다고 지적한다(의약 분업을 앞두고 의사협회가 보건복지부에 제시한 고용 의사의 월급 수준이 6백만원이다).

인의협 우석균 국장에 따르면, 그 비결이란 다름 아닌 정부와의 타협이었다. 곧 의사들은 보험 제도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제도를 우회하거나 제도 바깥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찾았다. 약가 마진은 그 중 대표적인 우회 전략이었다. 정부는 돈 들이지 않고 저수가 정책을 강제하는 대신 이같은 관행을 묵인했다.

이밖에도 의사들은 환자에게 비보험 진료를 유도하거나 ‘약 한 번 지어 주면 충분할 환자를 1주일 내내 병원에 오게 하는’ 방법 따위로 저수가 체제를 비켜갔다. 대형 병원은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촬영(MRI) 같은 고가 첨단 장치를 앞세워 수지타산을 맞추었다. 정부는 이들 장비를 보험 대상에서 제외해 주었다. 비록 제도 탓이라고는 하지만 11·15 조처로 밥그릇이 흔들리기까지 의사들은 대부분 이같은 관행에 침묵해 왔다. 이번 폐업 과정에서 의료계가 소리 높여 ‘국민 건강권 확보’를 주장했음에도 ‘의사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국민 건강을 위해 주었느냐’며 냉소적인 여론이 일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인의협 대구·경북지부 김진국 기획국장은 약가 실거래 조처 이후 의사들의 발언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비록 음성적인 수입은 줄었지만 반대급부로 자신들의 발목을 잡던 어두운 구석이 사라지면서 저수가에서 적정 수가로 정책을 전환하라고 의사들이 정부에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의 저수가 정책에 담합하는 과정에서 의사 사회 내부는 곪아갔다. 자본으로 대형 병원과 경쟁할 수 없는 동네 의원 의사들은 ‘몸’으로라도 그 간극을 메워야 했다. 동네의원살리기운동본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개원의의 하루 평균 진료 시간은 10시간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료 인력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역대 정권이 의과대학 증설을 무분별하게 허가한 결과 1990년대 후반 이래 해마다 배출되는 전문의는 3천 명에 이른다.

의료 인력 과잉은 봉직의·전공의의 처우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대형 병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과거 20년 동안에는 개원 의사보다 봉직 의사가 많았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개원 의사(1만7천4백여 명) 수가 봉직 의사(1만4천7백여 명) 수를 앞질렀다. 이는 의료기관의 대형화 속도가 느려지면서 병원에 취직하고 싶어도 자리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개원을 선택한 전문의가 늘고 있음을 의미한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이에 따라 의료계에도 ‘20 대 80 사회’가 도래하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임동규씨의 지적이다. ‘굶어 죽어 가는 의사’를 역설하면서 운전사 딸린 벤츠를 타고 나타나 빈축을 사는 의사협회 간부가 있는가 하면, 개원할 때 빌린 은행 이자가 누적되어 병원을 팔아야 할 형편이면서도 권리비라도 건져 보려고 적자투성이 병원을 유지하고 있는 개원의가 공존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의권’은 의사 아닌 국민들의 권리

이번 집단 폐업 사태는 의사 사회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석균씨는 기득권에 안주하던 의사들이 난마처럼 얽힌 의료 문제의 뿌리를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사회적 성찰’을 시작했다는 데서 변화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러나 폐업에 가담했던 개혁 성향의 한 의사는 의료계 내부에 의약 분업 자체가 무산되기를 바라는 세력이 엄존하며, 이들이 폐업 사태를 강경 일변도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고 비판했다(왼쪽 상자 기사 참조). 의료 개혁의 미래는 이들 ‘이대로 파’를 어떻게 견제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에 앞서 의사들이 진료 현장을 박차고 나가는 명분으로 내걸었던 ‘의권’은 국민이 의사에게 위임한 것일 뿐 결코 의사의 독점적 권리일 수 없다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는 것이 김용익 교수(서울대·의료관리학)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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