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최초 외국인 역사학도 구수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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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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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국가대학 석사 과정 구수정씨
분단 시대에 남 베트남에 유학한 학생은 단 한 사람이다. 한국 외국어대학 월남어과 제2회 졸업생 이숙자씨는 사이공 대학 석사 과정을 밟고 ‘1947년에서 1888년까지의 천주교 박해사의 비교 연구’를 졸업 논문으로 제출한 채 1973년 4월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 귀국했다.

딘 티엔 호앙 거리에 있는 호치민 국가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역사학과에는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는 유학생 구수정씨가 있다. 그녀가 입학하기 전 이 대학 역사학과를 뚫고 들어간 외국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구수정에게 유학 동기를 물었다. 구수정은 대선 실패 후유증과 동유럽 붕괴를 들었다. 1988년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구수정은 1992년 대통령 선거운동 때 김대중 후보의 텔레비전 연설문 작성팀 요원으로 일했다. 선거에서 패하자 구수정은 냉소적인 심경이 되었다. 사회주의 동유럽권 해체는 사회주의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했다. 이데올로기적·정신적 공황에 빠진 것이다.

가서 보고 체험하자고 결심했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을 떠난 때가 1993년 12월이다.

베트남에서 수많은 벽을 만났다. 이데올로기적 의문을 풀어볼 곳은 역사학과라고 생각했다. 대학 당국의 요구 조건이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입학 허가 구비 서류로 거주지 시·군·동 인민위원회 및 공안을 돌며 신원보증서를 받아야 했다. 학교장 추천서, 어학당 수학 능력 인정서, 교수 2명의 추천서도 필요했다. 그러나 1996년 6월 입학시험일까지 하노이 교육부의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구수정은 우선 입시를 치르도록 허락한 학교의 배려로 지원자 30명과 함께 역사학과 석사 과정 시험을 치렀다. 시험 과목은 전공이 베트남 역사 세 과목(현대사·당사·통사)이었다. 그밖에 철학(역사유물론·세계관의 문제)·영어·베트남어였다. 구수정은 평점 10점 만점에 9.2를 받아 수석 합격했다. 베트남어는 평점 9.9로 발군이었다. 구수정은 석사 과정을 이수하면서 교육부 회신을 기다렸다. 1년 반 후에야 도착한 하노이 교육부 회신은 ‘허가할 수 없다’였다.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한국군 양민 학살’ 파헤쳐 현지 신문에 기고

구수정은 하노이 교육부를 여덟 번 찾아갔다. 교육부 장관을 면담했다. 그는 주장했다. “나는 정식으로 시험 자격 기준에 맞는 모든 서류를 제출했다.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을 두 번 다녀왔다. 베트남 학생과 똑같이 경쟁해서 수학 능력을 인정받았다. 왜 허가하지 않는가?”

그녀가 입학 허가를 받은 것은 대학원 2년 과정을 끝내고 8개월 지나서였다. 그녀가 대학원에서 수강한 과목은 역사입문·역사유물론과 마르크시스트사학·사학의 역사와 베트남 사학의 발전·세계 문명의 역사·베트남의 소수민족·현대자본주의의 자기 수정·도이모이의 역사·베트남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베트남 공산당사·종교와 선교의 역사·민속학이다. 그녀는 1997년 학기말 고사의 민속학에서 10점 만점을 받았다. 역사학과 개설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이 문제는 일부 교수와 학생이 이의를 제기해 교수위원회 심의에 회부되었다. 시험 문제는 ‘참파 왕국은 중앙집권적 왕권 체제였느냐 아니면 민주연방제 정치 체제였느냐’였다. 구수정은 홀로 “비문을 연구한 결과 참파 왕국은 민주연방제였다”라고 확정적으로 답했다. 참파 왕국은 13세기에 멸망하기까지 천년을 지속한 왕국이다. 담당 교수로 참족인 탄 판 교수는 위원회에서 진술했다. “구수정은 철자에 한 글자도 오자가 없었다. 구수정이 갖는 불리와 한계를 생각컨대 답안이 9.9라면 0.1을 가산해야 한다.”

구수정의 논문 주제도 벽을 만났다. 신청한 지 2년 만인 작년 9월에야 허가되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 연구 1954년부터 1975년까지’라는 주제를 학교 당국이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지도 교수는 호치민 시 역사학회 주석인 호 시 콕 교수였다. 그는 6월 초 아침 운동을 하다가 심근경색으로 급서했다. 새로 지도 교수를 정하고 논문 골격을 수정하는 절차가 또다시 그녀를 기다린다.

서른다섯 살이 된 구수정은 지금 우울하다. 열정을 쏟아부었으나 탈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녀는 하노이 교육부 자료실에서 논문 자료 하나를 입수했는데 거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기록이 들어 있었다. 오래 고민하다가 마침내 이 문제를 세상에 던졌다.

그녀는 지금 제기한 문제를 어떻게 실천적으로 풀어 가야 하느냐 고민하고 있다. 깊이 자기 성찰을 하면서도 구수정은 베트남어 신문에 기고하고 있다. 그녀가 예시한 칼럼 제목은 ‘우리의 양심이 가벼워지기 위하여’(라오동 신문), ‘한국 중앙정보부 양민학살 조사한 적 있다’(뚜오이쩨 신문), ‘난민이 난민 고통을 이해한다’(뚜오이쩨 신문) 등이다. 현재 베트남의 다큐멘터리 감독 반 레는 구수정의 베트남 활동에 초점을 맞춘 <원혼의 유언>(베트남 해방영화사)을 제작하고 있다. 8월에 개봉하고 올해 하노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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