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혁명가’ 문국현
  • 장영희기자 (mtviesisapress.comkr)
  • 승인 2004.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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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 모델을 만들어 일자리 창출·경쟁력 높이기를 동시에 실현하고, 교육·윤리·환경 경영을 펼쳐 진정한 경영자로 평가받으며, 사회 변혁 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뉴패러다임의 전도사’ 문국현은 누구인가.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55)에게는 ‘혁명가’ ‘뉴패러다임의 전도사’라는 표현이 늘 붙어 다닌다. 뿐만이 아니다. 문사장이 이끄는 유한킴벌리는 지난해부터 정부와 기업, 학자들의 벤치 마킹 대상으로 떠올랐다. 경영학자들 사이에 문사장이 만들어냈다는 ‘Y-K 모델’(유한킴벌리 생산 방식)에 주목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한다.

가히 문국현 신드롬이다. 그가 올 들어 뉴스메이커로 떠오른 것은 일자리가 화급한 화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사장은 사실 3년 반 전부터 바람을 잡아왔다. 그러나 그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김영호 산업자원부장관이 관심을 보였지만 도중 하차하는 바람에 정부 정책과의 연계 고리가 끊겼다.

2002년 말부터 신용불량자와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해지자 문사장은, 오래 전부터 뜻을 같이하던 ‘혁명 동지’ 이형모 ‘시민의 신문’ 사장과 함께 다시 ‘바람’을 일으켰다. 문사장과 이사장은 2002년 말 뉴패러다임 포럼 준비 모임을 발족하고 지난해 10여 차례 토론을 거듭한 끝에 2003년 12월 포럼을 발족했다. 창립 직후 각계 인사 15명이 참석한 ‘제2 경제 도약을 위한 국민 대토론회’를 열면서 뉴패러다임 포럼은 주목되기 시작했다. 인적 자본을 길러 지속 가능한 일자리와 새로운 경쟁력을 창출하자는, 뉴패러다임 포럼의 발족 취지이자 운동 목표는 큰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기회는 일찍 찾아 왔다. 지난해 12월11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직접 설명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 ‘특강’이 마련되기까지 당시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봉호 정책비서관이 큰 역할을 했다. 하루 전날인 12월10일 신비서관은 대통령에게 <사람 입국을 위한 뉴패러다임(부제:지속 가능한 일자리와 신경쟁력 창출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당시 김진표 부총리 등 각료와 청와대 수석 등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문사장은 ‘Y-K 모델’로 대표되는 신구상(뉴패러다임)을 역설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되던 3월12일 서울 대치동 유한킴벌리 본사에서 만난 문사장은 “예행 학습이 있었던지 노대통령이 누구보다 빨리 Y-K 모델의 본질을 이해했다”라고 말한다. 노대통령이 Y-K 모델 시범 사업 추진 의사를 밝히면서 뉴패러다임운동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3월3일 노동연구원 부설 기구로 뉴패러다임센터(소장 신봉호)가 문을 열었다. 뉴패러다임센터는 정부 예산으로 Y-K 모델을 채택하려는 기업을 대상으로 컨설팅 등 여러 형태의 지원 사업을 펼친다. Y-K 모델을 전파하는 전진 기지인 셈이다.

기존 모델의 한계를 극복할 강력한 대안으로 주목되는 Y-K 모델은 흔히 4조 2교대 혹은 4조 3교대제라고 불리며 일자리 나누기의 대안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이다. 문사장이 말하는 Y-K 모델의 핵심은 평생 학습 체계다. 노동자를 교육하기 위해 생산 현장에 투입되지 않는 예비조가 필요했고, 그 결과 잉여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인건비 부담이 더 늘어나는데도 왜 교육을 부르짖는 것일까.

여기에 Y-K 모델의 묘미가 있다. 문사장은 초과 근로를 없애 충분히 쉬면서 교육까지 받은 노동자들이 어떤 큰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알았다. 지식으로 무장한 노동자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전략인 Y-K 모델은 노사 상생 모델이다(66~67쪽 딸린 기사 참조). 이 모델은 유한에 맞게 다듬기는 했지만, 문사장의 창작품은 아니다. 그는 1983년 미국 연수 때 미국이 일본에 패배했던 1970년대를 말끔히 청산하고 부흥을 꾀한 비결인 생산성 향상 운동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것이다.

1984년 문사장은 미국의 재도약 노하우를 한국에 적용하겠다는 열망을 품고 돌아왔다. 10년 가까이 숱한 반대를 뚫고 대전 공장에서부터 Y-K 모델을 구축하기 시작한 그는 이제 다른 기업, 아니 한국 경제를 구하기 위해 뉴패러다임 전도사로 나선 것이다. 임금 경쟁형이라는 낡은 모델은 승산이 없다는 문사장은 차별화한 기술과 신뢰를 바탕으로 고성과(高成果) 사회를 건설하는 뉴패러다임이 기업과 노동자와 국가가 모두 사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문사장은 경영자인지 시민운동가인지 분명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가 21년째 참여하고 있다는 ‘생명의 숲 가꾸기 운동’을 비롯해 그가 주도적으로 관여하는 환경운동 단체만 해도 10여 개에 이른다. 문사장은 1980년대 초 미국과 호주 등 환경 선진국을 다녀오면서 숲의 소중함에 눈을 떴다. 그때 제안한 것이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환경 캠페인이다. 창업자인 고 유일한 박사의 뜻에 따라 장학과 복지 사업에 주력했던 유한으로서는 커다한 방향 전환이었다.

1985년부터는 신혼 부부를 대상으로 나무 심기 운동을, 1988년에는 숲속 학교인 그린 캠프를 시작했다. 동북아산림포럼 공동대표인 그는 중국과 몽골 지역의 사막화를 막는 조림 녹화 사업과 북한에 묘목과 비료 등을 전달하는 ‘평화의 숲 운동’도 펼치고 있다. 유한은 지난 20년간 산림조합중앙회 산하 숲가꾸기조성운영위원회에 43억원을 기탁했으며, 이 기금으로 국유지 2천여 평에 나무 2천만 그루를 심었다. 문사장은 은퇴 후에도 아름다운 숲을 찾아다니면서 시민운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다.

문사장이 상생의 경영학과 환경 경영 못지 않게 강조하는 것이 또 있다. 윤리 경영이다. 문사장은 “한 세기가 넘게 생존한 세계 일류 기업들은 이윤 창출보다 더 소중한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윤리가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윤경(윤리가 경쟁력이다) 포럼 활동에 열심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유한킴벌리는 골프나 룸살롱 접대를 아예 허용하지 않는다. 접대비가 없어 병원이나 정부 같은 이른바 ‘기관 영업’이 차질을 빚기도 했지만 타협하지 않았다. 사장 판공비도 없다. 경조사 비용은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1995년 사장이 된 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그는 ‘비디오 사보’를 통해 경영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투명 경영이 윤리 경영의 선결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말하는 새 시대 경영자론은 ‘3CEO론’이다.
최고경영자의 E를 교육(Education) 윤리(Ethics) 환경(Envionment)으로 바꾼 것인데, 직원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윤리·환경 경영을 추구해야 새로운 시대를 헤쳐나가는 진정한 CEO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많은 일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묻자 그는 도리어 시간이 남는다고 말한다. 경영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고 직원들이 교육을 통해 자기 직무는 물론 공장 및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므로 권한을 이양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성과 점검 회의에 주력할 뿐 문사장이 결재하는 일은 하루에 한건 내외다. 결재 단계를 8∼9단계에서 2∼3단계를 줄였기 때문에 업무 추진 속도도 빨라졌다. 문사장은 자기를 ‘1분 경영’을 하는 ‘1분 매니저’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의 지인들은 그가 늘 눈이 빨개져 있으며 혼자 이동할 때마다 존다고 말한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중국·타이완·홍콩·일본·몽골 등 동북아 6개국을 연계하는 킴벌리 클라크 동북아시아 경영 협력체 회장으로 선출되어 더욱 눈코 뜰 새가 없으면서도 사회 변혁 운동에 열심이기 때문이다. 그가 늘 잠이 부족한 까닭은 학습 욕구가 남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밤늦게 귀가해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한 달에 경영 및 환경 관련 책을 4∼5권 탐독한다. 결식하는 일도 적지 않다. 바빠서 먹을 시간이 없는 데다 하루 두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문사장은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는 ‘그렇다’고 답했지만 ‘질적으로 보완한다’고 덧붙였다. 밤 10시 넘어 귀가할 때가 많지만, 부인과 두 딸에게 적극적으로 말걸기를 시도하는 가장이다. 설거지를 하거나 집 주위를 산책하며 부인과 이런저런 대화를 한다. 대학생인 두 딸에게도 사귀는 남자 친구와 학교 선생님, 영문학 등을 화제로 삼아 거리를 좁히려고 애쓴다. 그의 영어는 수준급으로 알려져 있다. 원어민이 그에게 교열을 받을 정도로 격이 높은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가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은 고 유일한 박사이다. 대기업에 갈 수도 있었고 부친이 사업체를 꾸리고 있었지만, 1974년 유한에 원서를 낸 것은 유일한 박사의 소유와 경영 분리, 전재산 사회 환원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장관 직과 총선 출마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기업 경영과 시민운동이 자신의 길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신뢰와 윤리를 바탕으로 고기술·고성과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혁명가 문국현’이 꿈꾸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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