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새긴 그날 그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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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7.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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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6월의 거리에서 그의 별명은 ‘악바리’였다. 경찰이 사진 기자를 폭행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하면, 십중팔구는 그가 피해 당사자였다. 경찰이 묵인하는 ‘포토 라인’만 넘지 않으면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당하는 폭력에 잠시만 카메라를 들이대면 폭력은 그대로 사진 기자에게 돌아왔다.

고명진 <한국일보> 사진부장(46·상명대 겸임 교수). 87년 일선 기자로 현장을 뛰었던 그에게 ‘방패 부대’는 ‘백골단’보다 더 악랄했다. 방패 부대가 높이 쳐든 방패 안쪽에서 학생들은 줄줄이 끌려가며 얻어맞았고, 사진 기자는 그 방패 바깥쪽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것은 조직적인 취재 방해이자 보도 통제였다. 절대 권력 앞에 약자인 학생·시민 들은 오히려 폭력의 가해자로 둔갑하기 일쑤였다. 그는 화염병과 돌을 손에 쥔 경찰, 도망가는 시위대의 뒤통수를 향해 직격탄을 쏘는 경찰의 모습 등을 차곡차곡 카메라에 담았다.

가장 아끼는 사진은 6월26일 평화대행진에서 건졌다. 6월항쟁의 대미를 장식한 이 날 문현로터리에 집결한 부산 시민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경찰이 경고에 이어 다연발 최루탄을 쏘려는 순간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젖힌 채 태극기 앞으로 뛰어나왔다. “최루탄을 쏘지 말라.” 정신이 번쩍 나는 절규였다. 그는 정신 없이 셔터를 눌렀다. <아! 나의 조국>은 그렇게 얻은 사진이다(52∼53쪽 큰 사진).

고부장은 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당시 시민들이 그토록 절절하게 염원했던 메시지 ‘비폭력’을 담아냈다. 이 사진은 6월의 거리를 담은 그의 사진집 <그날, 그 거리>에서도 세계보도사진전에 입상한 작품을 제치고 맨 앞장을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 사진들을 신문 지면에 전혀 내보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국내 신문 모두가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외압과 내부 검열’ 속에 사진들은 사장되었다. 6월항쟁에 불을 당긴 연세대생 이한열군 피습 사진(53쪽 상황 일지 사진 참조)이 외신에 실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 사진은 뭐하러 찍어?” 동료들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 80년대를 지나며 ‘쓰잘 데 없는 사진’이란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자인 그에게 사진은 ‘작품’이 아니라 ‘역사의 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기가 찍은 사진마다 육하 원칙에 맞춰 꼼꼼하게 설명을 적어 둔다. 독자들이 10년 전 6월항쟁을 생생한 현실처럼 떠올릴 수 있는 데는 그의 공로도 적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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