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학살, 처절한 모정
  • 광주·羅權一 주재기자 ()
  • 승인 1997.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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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아 할머니, 계엄군 구타로 정신이상 된 막내딸 17년째 병 수발
광주시 풍향동에 사는 한 마리아 할머니(본명 한업분·73)는 막내딸을 만나기 위해 한달에 두세 번씩 국립 나주 정신병원이 있는 전남 나주시 산포면을 찾는다. 지병인 당뇨병·고혈압·신경통에 시달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한씨는 지팡이에 겨우 의지해 벌써 15년째 정신 병동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다.

만성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며 정신 병동에서 치료 중인 할머니의 막내딸 김영옥씨(39)는 이제는 결혼도 못한 채 마흔 고개를 앞두고 있지만, 80년 5·18 당시에는 꽃다운 스물셋 처녀였다. 변변치 못한 가정 사정으로 광주에서 중학교를 중퇴한 김씨는 공장 일을 다니면서도 못다 한 공부를 계속할 작정으로 교과서를 놓지 않았던 참하고 예쁜 막내딸이자 동네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딸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해 5월19일. 김영옥씨는 도청앞 금남로 주변 골목을 걷다가 계엄군의 곤봉을 피해 도망치던 군중에 떠밀려 넘어지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정신 분열 상태에서 아버지까지 죽음으로 몰아

한쪽 신발을 잃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온 김씨는 그때만 해도 크게 놀랐을 뿐 정신은 말짱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집에서 5백m쯤 떨어진 큰언니 집에 피신해 있던 김씨는 들려오는 계엄군의 소총 소리에 가족이 걱정되어 집으로 달려가다 골목길에서 계엄군 2명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새벽에 돌아다니는 게 수상하다. 대학생이 아니냐’는 추궁에 말도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던 김씨는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총 개머리판으로 온몸을 구타당해 초죽음이 된 뒤에야 ‘한동네 사람’이라는 동네 할머니의 증언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 뒤부터 김영옥씨는 정신이 이상해졌다. 말이 없어졌고, 헛소리를 했으며, 소총 소리와 계엄군에 쫓기는 악몽에 시달렸다. 비가 오면 알몸으로 옥상에 올라가 빨래를 하는가 하면, 식구들이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대하면 집을 나가 몇 달 동안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82년 7월 나주정신병원에 처음 수용된 뒤부터 83년 11월에는 광주 정신요양원인 은성원에, 86년에는 대구 달성희망원과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한 김씨는 조금이라도 안정되면 집으로, 병이 다시 도지면 병원에 수용되는 생활을 반복했지만 심한 조울증은 지금껏 계속되어 왔다.

집안꼴이 엉망이 되어 버린 그 와중에 아버지 김옥천씨(당시 73세)가 86년 집에서 막내딸 김씨가 던진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머리를 맞아 이틀 뒤 숨을 거두었다. 정신 이상자인 김씨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집을 나갔다 다시 돌아온 뒤 가족 앞에서 희죽희죽 웃기만 했다.

김영옥씨는 그 뒤 90년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보상 조처에 따라 1급 장애 부상자로 분류되어 보상금을 1억여 원 받았다. 또 95년부터 의료보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병원비 걱정은 덜게 되었다.

한씨는 딸이 정신 병동에 입원한 뒤 광주시 풍향동에서 나주까지 50리 길을 버스를 세번씩 갈아타면서 병원을 찾아다녔다. 막내딸이 좋아하는 초코파이와 우유를 싸들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한씨와 김영옥씨의 모습은 나주 정신병원의 환자와 간호사 들에게는 이제 익숙한 장면이 되었다.

종교에라도 의지해 보기 위해 한씨는 93년에, 막내딸은 이듬해에 광주 계림동천주교회에서 영세를 받아 ‘한 마리아’와 ‘김 아가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막내딸이 병이 완전히 나아 집으로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한씨는 ‘사람 구실도 못하는 인생이 불쌍하지, 차라리 죽어 버리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나는 늙고 병들었지만 딸이 낫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는 신세야’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국립 나주정신병원에는 5·18 당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붙들려 모진 고문에 정신 이상자가 된 김영철씨(50)도 함께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는 상무대 영창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려 머리를 벽에 부딪쳐가며 자살을 기도했던 인물. 81년 성탄절 특사로 풀려나 82년 뇌수술을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아 84년부터 나주정신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5·18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그날의 고통은 너무나 오래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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