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와 피해자, 그 끝나지 않은 아픔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7.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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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원 출신 정규형씨, 시민 사살 후 가정파탄·정신질환 이중고
80년 5·18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진압작전에 투입된 정규형씨(42·서울 중랑구)는 17년 전 5월24일 겪은 일로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다. 정씨에게 그날의 ‘악몽’은 현재진행형이다. 밤마다 꿈속에 광주 시민 3명이 나타나 잠을 설친다는 정씨는, 구리시에 있는 한 정신병원을 오가며 겨우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한때는 정씨도 아내와 두 자녀를 둔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정씨의 증세가 깊어가자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에게만큼은 아빠의 과거를 알리고 싶지 않은 정씨이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앞선다. 차라리 세상에 자신의 진실을 알리고 사죄를 구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그러나 세상이 아직은 자신의 사죄를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만 같다.

이런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정규형씨와 기자는 지난 2월16일 서울발 광주행 호남선 심야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정씨의 꿈에 나타난다는 광주 시민 3명이 묻혀 있을 장소를 찾아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주고, 유족과 화해하자는 데 의기가 투합해 출발한 길이었다.

서울역에서 이리역에 이르는 동안 그가 쏟아놓은 사연을 이러했다.

80년 5월 중순 어느날 서울 장지동 특전사령부에서 화기 하사로 근무하던 정씨는 광주행 명령을 받았다. 3공수 11대대 2지역대 소속이던 정하사는 성남 비행장을 출발해 광주 공항에 내린뒤 5월20일께 조선대학교에 주둔했다. 이튿날 11대대(대대장 임수원) 병력 3백여 명은 교도소 경비에 나섰다. 5월24일 대대장이 팀장인 박성현 대위 입회 아래 정씨를 불렀다. 정씨에게 교도소 밖에 전초로 나가 접근하는 물체는 모조리 사살하라는 특수 임무가 주어졌다. 정씨는 명령을 받고 조수를 데리고 교도소에서 약 3백m 떨어진 운전학원 3층 건물 옥상에 진을 쳤다.

“오후 3시께 젊은이 3명이 가시 거리에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조수에게 ‘점사’(3발 단위로 조절되는 사격) 준비를 시키고 기다렸다가 사격을 가했지요.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데다 당시까지 사람을 직접 쏜 적은 없었기에 불안 속에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정씨는 조수를 데리고 사살된 3명의 시신을 끌고 교도소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아스팔트 위에 끌리는 시신의 머리가 벗겨져 도저히 교도소까지 옮길 수 없었다고 한다. “지도의 좌표를 보고 근처 논기슭을 야전삽으로 판 뒤 묻고 교도소에 들어가 대대장에게 보고하니 ‘수고했다’고만 하더군요.”
이튿날 정씨가 소속한 부대는 광주 공항으로 이동했다가 27일 새벽 11대대 4지역대장 편종식 소령을 따라 도청 진압 작전에 나섰다. 정씨는 광주항쟁이 완전 진압된 후 장세동 대령에게 차출되어 청와대 경호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82년 전두환 대통령의 제주도 순시 경호에 나선 정씨는 경호기인 C123 군용기가 한라산 촛대바위를 들이받고 폭발하는 바람에 책임을 지고 예편했다고 한다.

찾아간 암매장터에는 건물만 우뚝

이후 서울시 공무원, 지하철공사 직원 등으로 근무하던 정씨는 특전사 근무 시절 같은 부대 정보 하사이던 홍 아무개씨가 국회 광주특위에서 증언하는 과정에서 이름이 공개되었다. 그 뒤부터 광주 5월 단체와 학생들로부터 전화 공세가 빗발쳤다. 집에까지 찾아와 ‘양심 선언’을 요구하는 바람에 집을 두번 옮겼다. 이 과정에서 아내와 이혼하는 등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정씨는 간헐적인 정신 분열 증세에 빠졌다.

열차가 이리역을 떠나 광주로 향하자 정씨는 이제까지와 달리 몸을 덜덜 떨며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그를 달래 광주역을 빠져나온 뒤 2월17일 새벽 광주 교도소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시신 3구를 암매장했다는 장소는 이미 개발되어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정씨는 대신 망월동 5·18 묘역으로 가자고 했다. 묘역 앞에 엎드려 하염없이 흐느끼던 정씨는 “누군지 모를 암매장 시신 3명 유족에게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라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씨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굵은 마디마디가 고된 훈련으로 단련되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한동안 주먹을 응시하더니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공수부대에 들어가 국가에 봉사하는 줄 알았던 내 청춘의 흔적입니다. 이것이 죄악이 되었고, 가정과 인생마저 파탄시켰는데 남은 인생이라도 자식들과 제대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이제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정씨는 지금도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한 정신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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