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으로 열린 도로’ 널려 있다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7.06.1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설계 부실·안전 시설물 부족 등 ‘함정’ 수두룩…신호등 등 구조 개선 서둘러야
반환 카운트다운에 돌입한 홍콩에 가보면 공중에 설치된 보행자 통로를 흔히 볼 수 있다. 보행자가 차 없는 이 공중 통로로 다닌다면 차에 치이고 싶어도 치일 수가 없다. 미국이나 캐나다에는 고속 도로의 중앙 분리대 너비가 20m나 되는 곳이 꽤 많다. 분리대의 높이도 노면보다 다소 낮다. 운전자가 깜박 졸아 차가 굴러도 팬 곳으로 들어가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런 도로에서 중앙선 침범 사고는 일어날 수 없다.

우리나라 도로는 안전에 소홀하다. 교통 사고의 주범이 사람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런 도로 환경 요인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사고 발생을 거든다. 도로가 안전과 인연이 별로 없게 된 것은, 정치적 결정으로 급조되는 도로가 많은데다 도로 설계(국도는 건설교통부, 지방도는 자치단체)와 안전 시설물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행정 조직이 다르고, 이들 사이에 손발도 잘 맞지 않는 탓이 크다.

대부분의 교통 전문가들은 정부가 도로 설계 당시부터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시거(운전자가 전방의 위험물을 발견하고 정지하거나 피할 수 있는 거리)나 구배(노면 경사도) 등을 정밀하게 따져 교통공학적으로 도로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설계 잘못은 처음부터 사고 다발 지점을 만드는 꼴이다.

중앙 분리대, 차로 규제봉, 펜스, 가드레일, 갈매기 표지, 예고 표지 같은 안전 시설물도 태부족이다. 가령 96년 말 현재 고속도로 구간 중 25.9%에는 중앙 분리대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보·차도 구분이 없는 도로도 전국에 널려 있다.

가파른 커브길 같은 위험 지구에 ‘절대 감속’이라는 표지판만 세워 놓았을 뿐 제한 속도를 명시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가령 커브가 심해 20∼40㎞까지 줄이지 않으면 이탈하기 딱 좋게 되어 있는 고속도로 전출로의 경우 훨씬 전부터 조금씩 속도를 줄여 진입할 수 있도록 몇 차례 속도 제한 표지판을 붙여야 사고를 막을 수 있다.

“계도·단속·도로 정비 삼박자 맞춰야”

88년 서울시는 교차로 횡단 거리를 줄이기 위해 횡단보도를 교차로에 바짝 붙였다. 그러나 서울시는 이 조처를 그 전 상태로 환원할 방침이다. 횡단보도를 교차로에 붙인 것이 사고를 많이 일으킨다고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고친 이후 우회전과 좌회전 차량이 보행자를 치거나 신호 주기 동안 통과하지 못한 좌회전 차가 반대선 차선에서 오는 직진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가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사고 다발 교차로 95곳 가운데 올해 안에 26곳의 횡단보도를 교차로 바깥 쪽으로 옮겨 설치하기로 했다. 공무원의 탁상 행정이 돈 버리고 목숨을 앗아가는 엄청난 결과를 낳은 셈이다.

물론 반대로 구조를 제대로 뜯어고쳐 교통 사고를 크게 줄인 사례도 적지 않다. 대구시는 88~94년 65억원을 들여 1백38개 교차로에 대해 교통섬 설치, 신호등 설치 및 조정, 횡단보도 위치 조정, 차선 조정 등 구조 개선 작업을 마쳤다. 이 결과 교통 사고가 35% 가량 줄었고, 사망자와 부상자 수도 각각 83%, 30% 줄었다. 서울에서도 한남 교차로 같은 곳에서 구조를 뜯어고친 결과 사고가 훨씬 줄어든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흔히 ‘3E’를 교통 안전의 삼박자라고 부른다. 국민을 가르치는 것(Education)과 지도 단속하는 것(Enforcement), 도로 환경을 개선하는 것(Engineering)이 그것이다. 신부용 교통환경연구원장은, 한국에서 사망 사고가 많은 것은 이 삼박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면허 시험 체계부터 운전자 교육에 이르는 교육 과정, 사고 예방에 소극적인 도로교통법규, 실적 위주의 단속 등이 어우러져 후진형 교통 문화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통과학연구원 임평남 부원장은 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고 예방을 위한 대안은 이미 넘치게 나와 있다. 이것을 정부가 추진할 의욕과 열정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