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본에는 '꾸벅' 한국에는 '뻣뻣'
  • 卞昌燮 기자 ()
  • 승인 1996.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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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군 범죄자 처리 노골적 차별…SOFA 개정에도 ‘고자세’ 견지
66년 체결된 뒤 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들에게 ‘합법적인 보호 장치’구실을 해 지탄의 대상이 되어 온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이에 대해 지한파로 알려진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4월27일 한 경제인 모임에 참석해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 그는 “한·미 주둔군지위협정 개정 협상이 오는 6월5일 15대 국회가 개원하기 전에 타결될 것이다”라고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의 발언은 개정 협상이 지지부진하던 때에 나온 것이어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발언이 나온 지 6개월이 지난 지금 레이니 대사의 말은 거짓말로 판명되었다. 한·미 양국 협상팀이 9월11~12일 외무부에서 주둔군지위협정에 관해 7차 협상을 벌였지만 형사 재판권과 관련한 핵심 쟁점 사항에 관해 끝내 미국측이 양보하기를 거부해 결렬되었기 때문이다.

협상이 결렬된 지 근 한 달이 된 지금 우리 정부의 입장은 어떠한가. 협상에 참여했던 외무부의 한 고위 실무자는 지난 10일 기자와 만나“한국 정부는 7차 협상에서 미국측이 내놓은 수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에 대한 문안을 작성해 미국측에 곧 통보할 방침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당분간 양국 간에 냉각 기간이 필요하므로 협상이 재개돼 타결되려면 시일이 꽤 걸릴 것이라고 말해, 결국 올해 안에 협상이 마무리되기 어렵다는 점을 비쳤다.

7차 협상에서 불거진 최대 쟁점은 그간 협정 내용 가운데 제일 큰 불평등 조항으로 지목되어 온 제22조 형사 재판권 관할 문제였다. 한국측은 일본의 경우처럼 미군 또는 군속이 살인이나 강간 등 중범죄를 저지르면 기소 전이라도 신병을 한국 수사 당국에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또 미국 정부 대표가 입회한 경우에 한해 피의자 진술을 증거로 채택할 수 있다는 규정을 개정하자고 요청했다. 아울러 한국 사법 당국의 상소권을 제한하는 규정도 폐지하자고 요구했다.

이 세 가지 요구에 대해 미국측은 △한국 사법 당국이 미군 피의자를 기소할 때 신병 인도와 관련한 범죄 유형을 줄여야 하며 △미국 정부 대표가 입회하지 않은 피의자 진술은 무죄이고 △한국측은 피의자의 구금 및 수감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모두 거부했다. 서울의 한 서방 외교관은 “기본적으로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 및 그 군속은 미국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을 모두 누릴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한국 법체계가 미국 법체계를 따라야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살인 사건 법정에 피고인 불참할 판

미국측의 이같은 뻣뻣한 자세는 지난해 일본 오키나와 미군 기지 주변에서 미군 병사 3명이 열두 살짜리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이 일어난 직후 미국 정부가 보인 태도와는 대조를 이룬다. 당시 미국은 월터 먼데일 주일대사는 물론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나서서 감정이 격앙된 일본 국민에게 사과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한국의 경우 92년 동두천시 미군 클럽 종업원 윤금이씨나 최근 동두천시 접대부 이기순씨 피살 사건을 포함해 많은 살인 사건이 저질러졌지만 책임 있는 미국 관리 가운데 누구 한 사람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없다. 접대부 이씨의 경우 서울지검이 미군 피의자 에릭 스티븐 이병에 대한 구속 영장을 발부받아 주한미군 당국에 신병 인도를 요청할 방침이지만 주둔군지위협정 제22조가 개정되지 않는 한 성사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미국측은 서울지검의 신병 인도 요청에 대해 비공식으로‘스티븐 이병을 미8군 교도소에 수감한 상태이므로 굳이 한국에 신병을 넘길 계획이 없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91년에 개정된 제22조 형사 재판권 합의 의사록 양해 사항 제5항에 따르면, 미군 피의자를 구금하려면 미군 당국과 먼저 합의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스티븐 이병의 경우 미군 당국이 합의해 주지 않으면 그는 재판이 끝나 형이 확정될 때까지 미군 교도소에 남게 된다. 살인을 저지른 중범죄 피고인을 기소해 재판하는 한국 법정에 피고인이 나타나지 않아도 되는 기막힌 형국이 벌어지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한 미국 소식통은 “한국의 형사법상 일단 피의자를 기소하면 형이 확정될 확률이 십중팔구이지만 미국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라고 말해 미군 피의자를 한국측에 넘길 수 없는 데 대한 나름의 속내를 비쳤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3만7천여 주한미군의 규모에 버금가는 미군이 주둔하는 일본의 경우다. 오키나와 기지 성폭행 사건 이후 미·일 양국 정부는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미군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기소 전이라도 일본 경찰이 신병 인도를 요청하면 이에 응하도록 했다. 물론 일본도 미군 주둔에 따른 주둔군지위협정을 미국과 맺고 있으며, 한국처럼 불평등한 것으로 이름난 제17조 형사 재판권 조항과 관련해 불만이 많다. 그럼에도 일본은 미국의 적극적인 협조로 운용의 묘를 살리고 있다. 즉 제17조 자체는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양국 공동위원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해 미군 당국이 미군 범죄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 당국에 최대한 협조하도록 한 것이다.

미국이 주일미군 범죄 사건과 관련해 일본에 협조적인 데에는 나름의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주한미군의 경우 대북 억지력의 일환으로 긴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고, 또 대다수 한국민이 주둔을 원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민이 원하는 한 미군은 한국 땅에 언제까지나 주둔할 수 있으며, 이는 현실적으로 주한미군, 나아가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영향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주둔군지위협정을 포함해 주한미군이 관계하는 일체의 문제에 대한 영향력이 한국측에 비해 월등히 클 수밖에 없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은 영어본이 정본

일본은 다르다. 특히 주일미군의 대다수가 주둔하는 오키나와의 경우 지난해 성폭행 사건 때문에 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미군 기지 철수를 결정했을 정도로 반미 열기가 뜨겁다. 한국민이 미군 주둔을 원하는 반면 일본인은 정반대 태도를 보인 것이다. 미국 정부가 주일미군 범죄 문제나 기지 이전 문제에 협조적 자세로 나오게 된 직접적인 배경에는 미군이 하루빨리 나가주기를 바라는 오키나와 주민 대다수의 따가운 눈초리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실력 행사가 주일미군 당국에게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압력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한·일 양국과 각각 주둔군지위협정을 유지하면서도 미국 정부는 안보 현실 면에서 사정이 다른 두 나라에 대해 차별을 두어 대우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양국의 주둔군지위협정을 보면, 협정의 평등성 및 상호성에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한·미 협정의 경우 협정 시행 조처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협정 시행에 필요한 모든 입법 및 예산상의 조처를 입법기관에 구할 것을 약속한다’고 되어 있으나, 미·일 협정은 어느 일방 정부가 아닌 양국 정부가 모두 협정 시행에 필요한 조처를 취하도록 명기하고 있다. 또 협정을 해석하는 문제와 관련해 한·미 협정은 영어본을 정본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미·일 협정에는 이런 차등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이 빠른 시일 안에 낙관적으로 타결되리라고 전망했던 레이니 대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정 수준이 미·일 주둔군지위협정과 비슷할 것’이라고 천명했었다. 그러나 막상 외무부 실무자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그렇게 될 가능성은 꽤 적어 보인다. 현재 형사 재판권 조항을 포함해 일부 조항을 개정하는 데도 수년씩 걸리는 마당에 31개 조에 이르는 본문 조항을 하나하나 미·일 협정 수준과 비슷하게 고치는 것은 사실상 무리라는 지적이다.

어차피 주한미군이 언젠가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그 때까지는 불평등한 조항을 그때그때 개정해 가면서 껴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주무 당국자들의 생각인 것 같다. 이런 분위기에서 결국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한국측의 최대 압력 창구가 한국 정부의 공식 협상팀이 아니라 주한미군의 범죄를 고발하고 여론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일부 시민단체들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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