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키 고 홈" 외치는 오키나와
  • 오키나와·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6.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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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7주년 기념 ‘주일 미군기지’ 르포/주민 총궐기 “무도한 미군은 가라”
상하(常夏)의 섬 오키나와는 일본 열도가 홍엽으로 물들어 가는 10월 초순에도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하(那覇) 국제 공항에서 자동차로 2시간쯤 달려가자 오키나와 주둔 미국 해병 3사단의 실탄 사격 훈련장이 있는 긴죠 마을이 나타났다. 사격 훈련장은 이 마을 북쪽에 있는 캠프 한센이라고 부르는 미 해병대 기지 뒷산이다.

문제의 강간 사건이 일어난 곳은 긴죠 마을에서 약 1.5㎞ 떨어진 해안가. 주변에는 레드 비치라고 불리는 미 해병대 상륙 훈련장이 있다.

기자가 이 마을 주민의 안내를 받아 사건 현장을 둘러보니, 오른쪽으로는 제방, 왼쪽으로는 사탕수수·감자 밭이 널려 있어 밤이 되면 인적이 완전히 끊기는 곳이었다. 오키나와의 영자 일간지 <오키나와 타임스>와 <류큐신보>의 당시 보도를 종합하면, 오키나와인들을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문제의 강간 사건은 작년 9월4일 저녁 8시께 이 해안가에서 일어났다.
미군 3명, 렌트카 동원해 12세 소녀 윤간

캠프 한센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 3사단 소속 흑인 병사 3명은 그 날 아침 기지 밖에서 빌린 렌트카로 오키나와 중심 나하 시로 쇼핑을 갔다 돌아오는 도중 일본인 여성을 납치 폭행하기로 모의했다. 그들은 긴죠의 번화가 네거리에 렌트카를 세우고 맥주를 마시며 대기하고 있다가 문방구에서 공책을 사들고 나오던 초등학교 6학년 소녀를 발견했다. 뒷날 먼데일 주일 미국대사가 ‘쓰리 애니멀스’(세 마리 야수)라고 부른 그들은 다짜고짜 소녀의 목을 죄며 랜트카로 밀어넣고 준비한 접착 테이프로 소녀의 입과 눈과 손을 감았다. 그리고는 훈련장이 있는 해안가로 끌고가 렌트카 안에서 차례로 폭행했다.

저녁 9시께 가족의 신고를 받은 오키나와 경찰은 긴급 수배망을 펼친 결과 렌트카를 빌릴 때 쓴 필적과 맥주병에 묻은 지문 등으로 미군의 범행임을 밝혀냈다. 오키나와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은 미군 수사기관은 사건 다음날 범인들의 신원을 밝혀내고 구금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오키나와 경찰은 사건 3일 후 흑인 병사 3명에 대한 영장을 청구하고 다음날 미군측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측은 미·일 주둔군지위협정(지위협정) 제17조 5항 C의 규정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

미·일 지위협정이란 한·미 행정협정과 같이 주일미군 군속에 대한 형사 재판 절차 등을 규정하기 위해 60년에 서명 발효된 협정이다. 그러나 양국이 한때 점령국과 피점령국 관계였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미군측에 일방으로 유리하게 체결되었다. 그 예로 문제의 17조 5항 C에는 일본으로부터 공소가 제기될 때까지 미군 범인의 신병은 미군측이 구금토록 규정되어 있다.

오키나와 경찰은 이러한 형사 재판 절차 규정에 묶여 범인들에 대한 취조를 토·일요일을 제외하고 평일 오전 9시~오후 4시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소녀 강간 사건에 치를 떨고 있던 오키나와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오키나와 섬 전체가 또다시 분노로 들끓었다.

오키나와 현 의회를 비롯한 각 지방 의회는 미국에 대한 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미군측에 일방으로 유리하게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미·일 지위협정을 즉각 개정하라고 일본 정부에 촉구했다. 또 오키나와 시민단체들은 소녀 강간 사건을 귀축(鬼畜)에도 못미치는 극악무도한 범죄라고 규탄하면서 ‘범인도 제대로 수사할 수 없는 일본이 과연 독립국인가’라고 외쳤다. 이러한 오키나와인들의 분노는 작년 10월 8만5천명이 참가한 ‘현민 총궐기 대회’를 치르면서 절정에 다다랐다.

당시 궐기 대회를 주도한 다카자토 스즈요(高里鈴代·56) 나하 시 시의원에 따르면, 작년의 소녀 강간 사건은 어디까지나 빙산의 일각이다. 그는 당시 북경에서 열린 NGO(비정부 조직) 포럼에서 ‘군대, 그 구조적 폭력과 여성’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끝내고 나하 공항에 도착한 후 이 사건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강간 저질러도 처벌은 ‘외출 금지’뿐

그는 귀국 후 즉시 항의 집회를 열고 ‘기지·군대를 허용치 않는 행동하는 여성들의 모임’을 조직해, 오키나와 현 의회 앞에서 3일간 연좌 농성을 펼쳤다. 또 강간구원센터를 설치하고 미국에 ‘평화 호소대’를 파견해, 이번 강간 사건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미국의 인권단체들에 직접 호소했다. 오키나와 기지 대책실 기얀 세이타쓰(喜屋武盛達)씨에 따르면,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이후 미군이 일으킨 범죄는 모두 4천5백 건에 이른다. 그 중 살인 사건이 12건, 강간 사건이 10건을 차지한다.

그러나 다카자토씨가 이끄는 여성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으로 오키나와에 미군이 들끓던 51년 5월까지 강간 사건이 모두 2백78건 발생했다. 당시 미군이 오키나와 시정권(施政權)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미군 범인들은 무죄 방면되었다고 한다. 또 월남전쟁 당시에도 수십만 미군이 오키나와를 거쳐 가면서 부지기수로 강도·강간·살인을 저질렀으나, 오키나와인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카자토씨는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72년 이후에도 사정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피해 여성들이 주위의 눈을 의식해 고발을 꺼리기 때문에 25년간 1백10건밖에 사건화화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실제 미군 강간 사건은 10배, 20배를 훨씬 넘는다고 강조했다.

기지촌 코자에서 미군을 상대해 20여 년간 ‘에이 사인’이라는 바를 경영하고 있는 후미코 마담은, 사건을 일으킨 미군들이 응분의 징벌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분개한다. 그에 따르면, 3년 전 코자의 한 스낵 바에서 칠순 노인이 미국 해병대 병사 3명에게 총격을 받고 2백50달러를 강탈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측은 이들을 구속하지 않고 외출 금지령만을 내렸기 때문에 범인 중 2명은 미국으로 도피했다고 한다. 열아홉 살 먹은 일본 여성이 미군 기지 내로 끌려가 강간 당한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스물다섯 살 먹은 미군 상등병이 범인으로 검거되었으나, 그 역시 외출금지령만이 내려졌기 때문에 민간 여객기를 타고 미국 본토로 도피해 버렸다고 한다.
투표자 90%가 ‘미군 기지 축소’ 지지

초등학교 소녀 강간 사건으로 빚어진 오키나와 사태는 곧 이어 ‘기지 반환 운동’으로 비화했다. 오타 마사히테(大田昌秀) 오키나와 현 지사는 강간 사건이 일어난 직후 불평등 조약인 미·일 지위협정을 개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클린턴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미·일 안보조약 강화를 의미하는 재정의 작업을 서두르고 있던 때여서 오타 지사의 요청을 묵살하는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작년 2월 미국 국방부는 ‘동아시아 전략보고(EASR)’를 발표하고, 이 지역에 미군 병력 10만을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와중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오키나와 사태가 미·일 관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안보조약 폐지 운동으로 비화하는 것을 크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당시 미·일 지위협정 개정 요구가 안보조약 개정 요구로 이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오타 지사는 중앙 정부의 미온적 태도에 분개하여 작년 9월28일 ‘전가의 보도’를 뽑아 들었다. 오키나와에는 현재 미군 시설이 42개 흩어져 있다. 미군 시설 총면적은 244㎢로서 오키나와 본 섬의 19.5%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기지 용지를 72년 오키나와 반환과 함께 땅 임자와 대차 관계를 체결해 미군에 제공해 오고 있다. 현재 군용지 임자 3만1천명 중 약 2만8천명이 이같은 ‘계약 지주’이다.

반면 ‘반전 지주(反戰地主)’라고 불리는 지주들(현재 약 백 명)이 정부와의 대차 관계를 거부함에 따라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공용지 강제수용법’ ‘오키나와 지적 명확화법’ ‘주류 군용지 특별 조치법’을 만들어 이들의 토지를 수 차례에 걸쳐 강제 수용해 오고 있다. 이 강제 수용 수속에 오키나와 현 지사가 대리 서명토록 되어 있는데, 오타 지사가 작년 9월 말 대리 서명 수속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오키나와 현 지사의 대리 서명이 없을 경우 일본 정부는 96년 3월과 97년 5월에 사용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땅을 불법으로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오타 지사에게 대리 소송을 명령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오키나와 현은 주민 투표로 이에 대항했다.

지난달 8일 치른 오키나와 주민 투표는 유권자59.53%가 참가하여 ‘기지 정리·축소와 미·일 지위협정 개정’에 90%가 찬성했다. 주민 투표율 59.53%는 지난 6월 실시되었던 오키나와 현 의회 선거 당시의 66.36%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찬성표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현(縣)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실시된 이 투표는 특히 초등학생 강간 사건으로 미군 기지 이전과 미·일 안보조약 등을 둘러싼 오키나와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된 가운데 실시되어 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 기지 이전 문제 등에 대해 직접 의사를 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투표 결과는 중앙 정부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주민 투표 결과만으로 오키나와인들이 전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오키나와’를 외치고 있다고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계약 지주 모임인 ‘오키나와 현 군용지 지주회 연합회’(회원 2만8천 명) 스나카와 사무국장은 ‘유권자 40%가 기권한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주일미군 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집중

오키나와 계약 지주들이 매년 일본 정부로부터 받는 지대는 모두 7백억엔이나 된다. 그것도 매년 5%씩 정기 인상되기 때문에 시중 금리를 훨씬 앞지른다. 또 미군 기지 종업원 약 8천명의 임금도 연 4백80억엔에 이른다. 이러한 수입을 전부 합하면 오키나와의 기지 관련 수입이 2천5백억엔에 이른다는 것이 기지 존속파나 계약 지주들의 주장이다. 오키나와가 전체 관광산업에서 벌어들이는 3천5백억엔에 버금가는 수입원이다.

반면 미군 기지 전면 반환을 주장하고 있는 ‘오키나와 반전 지주회’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미군 기지가 오키나와의 노른자위 땅을 20%나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오키나와의 발전이 늦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키나와 현의 기지 반환 캠페인 책자 <오키나와로부터의 메시지>에 따르면, 오키나와의 크기는 일본 국토의 0.6%인데 주일미군 시설의 75%가 몰려 있다. 이 때문에 산업 발전이 저해되어 1인당 국민소득이 도쿄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실업률도 일본 본토의 2배를 넘는다. 또한 기지로부터 파생되는 관련 수입이 오키나와 전체 국민총생산(GNP)의 5%를 밑돌고 있어 미군 기지가 모두 반환되더라도 오키나와 경제는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기지 반환파의 주장이다.

류큐 대학 마에시로 모라사다(眞榮城守定) 교수는 자기를 기지 반환파라고 전제하면서, 지금 전개되고 있는 논쟁을 그치고 기지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오키나와를 건설할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미군 기지말고도 이용 가능한 토지는 얼마든지 있으며, 미군 기지가 있는 국제 도시 오키나와의 이미지를 활용하면 아시아의 거점 도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키나와 사태가 주민 투표로 발전하게 된 것은 오키나와가 받아 온 차별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키나와는 15세기 초 류큐(硫球) 왕국이 건설되면서 한반도·중국·일본을 잇는 중계 무역지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17세기 초 규슈 지역 사쓰마 번(藩)의 침략을 받고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군·미군을 합하여 23만명이 전사한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키나와인이 12만2천명이나 희생되는 참상을 겪었다.

오키나와 반환 협정을 체결할 당시 일본 총리는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일본 본토 수준으로 축소·정리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반환된 뒤 24년간 일본 본토의 기지는 60%가 삭감된 데 비해 오키나와 기지는 15%만이 축소되었다. 더욱이 복귀 직후 오키나와에는 주일 미군 기지의 절반 정도가 집중되어 있었으나 24년 후 그 집중도는 75%로 늘어나 있다.

다카자토 나하 시 의원은 “일본 본토인들은 겉으로는 우치난 츄(오키나와인)를 동정하는 척하면서도 오히려 오키나와에 일방적 부담을 강요해 왔다. 주일미군 기지의 75%를 오키나와에 방치하고 있는 것은 우치난 츄들의 인권과 존엄을 전혀 존중치 않기 때문이다”라고 비난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인들의 불만이 증폭되자 오키나와 미군 기지 일부를 본토로 이전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또 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후텐마 비행장을 5~7년 내에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미국측과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전 검토 예정지의 본토 주민들이 한결같이 범죄 위험과 소음을 이유로 미군 시설 수용을 반대하고 있어 오키나와 기지가 조금이라도 줄어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후텐마 비행장도 그만한 대체지가 확보될 경우 반환하겠다는 것이 미국측의 약속이다.

한편 이전되는 후텐마 공군기지를 대체해 미·일 양국은 현재 오키나와 앞바다에 해상 헬리포트를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해상 헬기 이착륙장 건설안은 지난해 11월 오키나와 미군 기지 축소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양국이 설치한 오키나와특별조치위원회가 최근 가진 고위급 회담에서 결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헬리포트 건설안은 일본측이 선호하는 가데나 공군기지로 후텐마 공군기지를 옮기는 이전안, 그리고 미국측이 선호하는 미 해병대 기지 캠프 슈윕으로 이전하는 안과 함께 검토하고 있는 세가지 안 가운데 하나로 채택이 유력시되고 있다. 특히 헬리포트안은 나머지 안에 비해 환경영향평가, 소음 문제 최소화, 미군 작전 능력과의 상관성, 그리고 일본의 재정적 부담 능력을 고려해볼 때 최적인 것으로 알려져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니혼 게이자이>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후텐마 기지를 반환하고 해상 헬리포트를 신축하는 방안이 채택되는 대로 그에 따르는 병력 감축도 적극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제3 해병사단은 미국 본토 이외의 유일한 해병부대로 모두 1만8천명 규모이다. 미국은 전반적인 군 축소 계획에 따라 해병대 총병력 17만여 명 중 15%에 이르는 2만5천명을 감축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왔다.

1년 전 초등학교 소녀 성폭행을 계기로 빚어진 오키나와 사태는 주민 투표 후 오타 지사가 정부가 제시한 오키나와 진흥 계획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단 수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수많은 오키나와인들은 ‘오키나와 문제’가 미군 기지가 전면 반환되는 그날까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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