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쳐 정권 재창출” 부활의 노래
  • 崔 進 기자 ()
  • 승인 1997.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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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 캐스팅 보트 자신… 영입파·독자 후보 놓고 고심
ㅍ요즘 흔들리는 민주계의 처지는‘등소평 잃은 중국’에 곧잘 비유된다. 최형우 고문이 갑자기 쓰러지자 조타수 잃은 배처럼 뒤뚱거리는 민주계를 두고 나온 얘기다. 등소평은 생전에‘처변불경, 처변불경(處變不驚, 處變不輕)’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급한 상황이 닥쳐도 당황하거나 가볍게 행동하지 말라. 최고문이 입원한 뒤 그의 대리인 노릇을 하고 있는 김정수 의원은 3월18일 소속 의원 44명이 참석한 ‘최형우 쾌유 기원 모임’에서 등소평의 이 말을 인용하며 민주계가 지금 무너지면 영영 무너지고 마니 단결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민주계가 정상을 되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마(魔)의 30분. 민주계의 운명은 정말 순식간에 변했다. 최고문에게 최악의 날로 기억될 지난 3월11일 오전 7시20분께. 민주산악회(민산) 간부 4명이 최고문의 구기동 집을 찾았다. 최고문은 3월8일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중요한 일이 있으니 11일 아침 일찍 집으로 오라고 말해 놓은 터였다. 11일 아침 최고문은 민산 간부 가운데 1명을 2층으로 불러 다소 상기한 표정으로 당 대표를 맡게 되었으니 민산이 더욱 분발해 자기를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그때 어디선가(서석재 의원으로 추정) 전화가 걸려왔다. 상대방이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자 최고문은 ‘뭐하러 나가느냐’고 몇 차례 거절하다가 마지 못해 8시20분께 집을 나섰다. 이어 약속 장소인 플라자 호텔에 도착해 쓰러진 시각은 8시50분께. 다 따놓은 대표 자리가 30분 사이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당시 최고문 집을 방문했던 민산의 한 간부는“그날 새벽 5시께 최고문 부인이 청와대에 들어가 손명순 여사로부터 대표 지명 축하 인사까지 받고 나온 것으로 안다. 그런데 청천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최고문이 쓰러지다니…”라며 아쉬워했다. 최고문계로 분류되는 민주계 중진 의원도 최근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온산이 그냥 쓰러졌겠나.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깜짝 놀랄 만한 사정이 있지만,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3월13일 전국위원회에서 이회창 대표 체제가 등장했다. 민주계는 기습당한 군대처럼 충격과 당혹감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이후 3월25일 현재까지도 민주계는 평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분위기다. 민주계 의원들은 ‘더 두고 보자’고 애써 자신을 추스르면서도 말끝마다 “어떻게 쟁취한 정권인데…”라며 한숨을 길게 내쉬는 경우가 많다. 아닌게 아니라 노동법 사태와 한보 사태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김현철 비리에다 4월부터 국회에서 한보 청문회가 열리면 주로 민주계가 치도곤을 당할 것이 뻔하다.
첫째, 고위 당직자회의에서 고위 자(字)를 빼자고 했는데 얼핏 들으면 민주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권위주의적이다. 둘째, 전국위원회나 주례 회동에서 김대통령에게 깍듯이 예우를 갖추지 않고 있다. 셋째, 3월20일 다른 대권 주자들을 향해 해당 행위 어쩌고 말한 것은 독선적인 스타일을 반영한 것이다. 넷째, 3월21일 중간 당직자 인선에서 파격적으로 3선 의원을 대표 비서실장에 앉힌 것도 권위주의적 발상이다.

민주계가 이처럼 이대표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이회창을 못믿겠다’는 불신감이다.‘법대로’ 하는 그가 정권을 잡을 경우 대통령은 물론 자신들의 안전과 지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선입견이 짙게 깔려 있다. 다음은 노선 문제. 개혁지상주의를 내세운 민주계로서는 5,6공 세력을 중심 축으로 활용하고 있는 이대표와 공존하기 어렵다는 논리다. 최형우 고문의 한 측근은 “민주계, 특히 최고문과 이대표 사이에는 쉽게 건너기 어려운 불신의 강이 흐르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제 민주계는 어디로 갈 것인가. 민주계의 미래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첫 모임은 3월18일 낮에 열린 민주계 중진 13인 회동. 우선 명칭 문제를 놓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민주개혁모임’‘개혁 모임’ 등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현시점에서 개혁이라는 용어가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중진들의 지적에 따라 결국 ‘민주화세력 모임’으로 낙착되었다. 그런데 이 명칭에는 몇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우선 보수 세력을 끌어들이고 있는 이대표 진영을 은근히 비민주화 세력으로 규정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실제로 이 날 한 참석자는 지금 우리 주변에는 개혁 세력이 어려움을 겪는 틈을 이용해 과거로 회귀하려는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면서, 민주화 세력의 대동 단결을 호소했다. 공교롭게도 민주계는 이대표 체제가 등장한 이후 김상현·정대철·김근태 부총재 등 국민회의 비주류 3인 및 민주당 의원들과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다. 정가에 민추협 동맹군 재규합설이 다시 나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추협 사람들은 정이 있다.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수도 있다.” 민주계 중진의 이 말이 그런 소문을 더욱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다.

민주계내 소계파, 대권 구도 제각각

최고문이 이끄는 민주산악회도 거의 매일 크고 작은 모임을 갖고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3월19일 강남 뉴월드호텔에서는 민주산악회 전국 시도 협의회장 및 지부장 4백여 명이 모였다. 이 날 일부 간부들은 김대통령을 겨냥해, 민주산악회를 강제로 해산하더니 정작 자기 아들은 온 나라를 통째로 삼키도록 방치했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민산은 4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세 과시용 산행에 나설 참이다. 명칭도‘시산제’에서 아예 ‘최고문 쾌유 기원 시산제’로 바꾸었다.

과연 민주계가 좇는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민주계 의원은 종이 위에 도표까지 그려가며 ‘민주계의 꿈’을 상세히 설명했다. “당이 어려울 때 나온 이회창 대표 체제는 절묘한 카드라고 본다. 이대표는 일단 달리는 말 위에 올라탔다. 그대로 잘 달리면 대권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마할 가능성도 50%다. 그가 문자 그대로 정치를 잘하면 좋지만 주변 아마추어 참모들의 어설픈 전략만 듣고 법치를 하려들 경우 서로가 불행해질 수 있다. 민주계가 이대표와 완전히 결별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잘 들어 보라. 범민주계는 전체 지구당위원장의 3분의 2, 대의원의 3분의 2가 넘는다. 그 가운데 절반 가량이 이탈한다 해도 경선 때 결정적인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조용하게 결속을 다지면서 세를 보여줄 참이다. 정치는 세 싸움 아닌가. 그동안 대통령의 만류 때문에 자제해 왔지만 앞으로는 우리의 힘을 보여주겠다. 그리고 민주계가 아직 반(反)이회창은 아니다. 얼떨떨함과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이 어우러져 있는 상태, 굳이 표현하자면 유보라고 할까.”

민주계는 그런 유보적 상황을 결론적 상황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내부 세력 분포가 복잡해 결론을 도출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민주계 지구당위원장의 3분의 2 이상이 자기 편이라고 주장하는 최고문과, 소장파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는 김덕룡 의원, 중립적인 서석재 의원, YS 직계인 강삼재·서청원 의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다. 그들이 생각하는 대권 구도도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이수성·이홍구·박찬종 고문 등 제3자를 영입하자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김덕룡 의원을 추대하자는 사람들도 있다.
이수성 고문, 민주계 내에서 상종가

이회창 대표 체제가 등장한 이후 민주계 내에서 상종가를 달리고 있는 사람은 단연 이수성 고문이다. 민주계가 이고문을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대통령이 총리 직을 막 내놓은 그를 곧바로 당에 진입시킨 데에는 뭔가 원모 심려가 있지 않느냐는 추측에서다. 대통령의 숨겨 놓은 카드일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고문을 그토록 서둘러 투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계가 이고문을 선호하는 또 다른 배경은 민주계가 현정권의 주체라는 부담 때문이다. 한마디로 민주계로서는 훗날을 생각하여 법대로 밀어붙이는 인상을 주는 이대표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이수성 고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당내 조직 기반이 취약한 그를 당선시킬 경우 당내 다수파인 민주계가 최대 지분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도 하고 있다. 이고문은 또 80년 초 신군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전력을 갖고 있다. 이 점 역시 민주계가 내세우고 있는 민주화 세력론에 부합한다.

그러나 정치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를 두고 영입론을 논의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 중론이다.‘정치인 이수성’의 능력이나 자질이 전혀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좀더 지켜보자는 자세다.

만에 하나 민주계가 이고문을 지원할 경우 박찬종 고문의 거취가 큰 문제다. 박고문은 이수성 고문과 함께 민주계 내에서 가장 주목되는 대안 중의 한 사람이다. PK 출신에 수도권 고정표를 확보하고 있으며 한때 민추협에서 같이 활동했던 민주화투쟁 동지라는 점에서 민주계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 특히 최고문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박고문과 연대할 방안을 모색해 왔다. 그러나 민주계 내에 박고문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이 큰 걸림돌이다.

한때 민주계의 희망으로 떠올랐다가 지금은 대권 복병으로 한 발짝 물러선 이홍구 카드도 여전히 살아 있다. 청와대의 일부 관계자들이 통합적 리더십과 화합형 지도자를 지금껏 들먹이는 대목만 해도 그렇다. 요즘 민주계 의원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이홍구 고문이 갑자기 권력분점론을 내세우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혹시 ‘김심’이 담겨 있지 않느냐는 생각에서다.

다음은 최고문이 쓰러진 이후 민주계의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른 김덕룡 의원. 사실 민주계가 앞으로 행로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바로 김의원의 거취다. 오래 전부터 대권 행보를 해온 김의원측은 민주계 의원들이 자신을 추대해 주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말하자면 민주계 내에서 ‘DR 대세론’이 형성되기를 바라고 있다.

김의원의 한 측근은 “무임 승차하려는 사람과 과거로 회귀하려는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 민주계의 진정한 입장이라면, 다른 주자와 손잡고 살 길을 찾아보자는 발상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김의원이야말로 개혁의 상징이자 민주계의 유일한 대안 아니냐”라고 말했다.

김덕룡, 민주계 후보 되기에는 장애물 많아

그러나 김의원이 민주계의 추대를 받기에는 장애물이 너무나 많다. 오랫동안 경쟁 관계이던 최고문 진영이 김덕룡 카드를 받아들일지 의문이고, 서열을 중시하는 상도동 선배들이 그를 흔쾌히 옹립할지도 의문이다. 또 민주계 내에는 그의 지지자 못지 않게 그를 싫어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다. 부산 출신 한 초선 의원은 만약 김의원을 무리하게 민주계의 대안으로 밀어붙일 경우 민주계가 깨질 우려가 있다고까지 말할 정도다. 서석재 의원은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30쪽 딸린 기사 참조)에서 “현시점에서 민주계 단일 후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모임의 순수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김덕룡 의원은 사실상 대권 도전을 선언한 상태인 만큼 우리는 그와 적당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이인제 지사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이인제 경기도지사는 3월24일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민주계 선배들과 의논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일종의 독자 노선이다. 이지사는 민주계의 지지 여부와 상관 없이 민심에 직접 호소해 당심과 김심을 쟁취하겠다는 전략이다. 여의도에 20평 남짓한 사무실을 내고 중견 언론인을 영입하는 등 대권을 향해 발벗고 나선 이지사는 3월 말부터 대구·경북을 필두로 전국을 순회하는 강연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지금 민주계는 김심이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중간 보스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부지런히 내부 결속을 다지고 있다. 민주계는 계파 결속과 대권 재창출이라는 공동 목표를 지향하고 있지만,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대권을 보는 총론적 시각은 같지만, 각론적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몇 차례 굴절을 겪기는 하겠지만, 결국 김심과 민주계는 차기 대권 만들기 과정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하나가 되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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