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고업 북한에 첫 진출
  • 북경/글·사진 특별 취재반 ()
  • 승인 1997.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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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za·금강산총회사, 촬영 계획 등 합의… 남북 교류·협력 사업 물꼬 틀 수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당국이 대한민국 광고회사가 북한에서 상업 광고를 제작하는 사실상의 광고 합작 사업을 처음으로 허용했다. 특히 남북한 간의 이같은 합의는 황장엽 비서 망명 사건이라는 돌출 변수에도 불구하고 북한 당국이 인쇄 및 텔레비전 광고의 북한 촬영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지대한 관심을 끈다. 또 이번 합의는 지난해 잠수함 사건으로 남북간 공식 접촉이 모두 끊긴 뒤로 올해 들어 이루어진 첫 공식 접촉에서 거둔 성과라는 점에서, 잠수함 사건 때문에 단절된 남북 교류 및 경제 협력 사업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사저널>이 북경에서 입수한 한국의 광고대행사 ‘커뮤니케이션 Aza’(Aza·대표 박기영)와 북한의 대남 경제협력 사업을 총괄하는 광명성경제련합회(회장 김봉익) 산하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금강산총회사·총사장 방종삼) 사이에 맺은 ‘TV·인쇄 광고 촬영 계약서’(초안)에 따르면, ‘금강산총회사와 Aza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도 평양시 일부와 조선의 명산 백두산·금강산·묘향산의 자연 풍경을 선전·광고 및 TV 제작 촬영을 위한 촬영 문제를 토의하고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다음과 같이 계약한다’라고 합의했다. 이에 따라 Aza는 적어도 앞으로 5년간 ‘조선에서 제작되는 텔레비전 광고 및 제작 촬영의 유일 창구로서 판권 위임’을 보장받게 되었다.

금강산총회사 방종삼 총사장과 Aza의 박기영 대표가 지난 2월14일에 합의 서명한 이 계약의 세부 내용에 따르면, △계약 범위는 인쇄·텔레비전 광고 및 제작사업으로 하되 △촬영지는 백두산·금강산·묘향산·칠보산·평양·개성 외 기타 갑방(금강산총회사)이 추천하는 장소로 하고 △텔레비전 제작은 1차 사업(인쇄 광고 촬영 및 제작) 기간에 세부 사항을 결정하기로 했다. 또 쌍방은 인쇄 및 텔레비전 광고에 필요한 촬영·편집·해설문·음악을 공동 책임지고, 우선 이 사업을 ‘5년간 전적으로’(독점) 진행하되 97년 사업 계획은 △1차로 4월께 인쇄 광고 촬영(15일간) △2차로 6월께 텔레비전 광고 촬영(4주간) △3차는 9월께 인쇄 및 텔레비전 광고 촬영(4주간) 순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Aza측이 통일원에 제출한 대북 광고 사업 계획서 및 계약서(초안) 등 접촉 결과 보고에 대한 사업 승인이 차질 없이 진행될 경우, 4월에는 광고 촬영을 위한 제작팀의 방북이 최초로 이루어질 전망이다. 계약자 쌍방은 ‘본계약서 초안은 을방 당국(통일원)의 사업 승인이 있는 날로부터 정식 계약서로 효력을 발생한다’라는 조항을 두고 ‘사업 승인 후 갑방(금강산총회사)이 을방(Aza)의 제작팀과 광고주를 방북 초치한다’라고 합의했다.
광고 촬영 및 제작을 위한 남북 협력 사업은 전례가 없는 사업이다. 그러나 그동안 남북 협력 사업으로 진행된 임가공과 교역 및 합영 사업과는 달리 최초로 합의한 무형의 문화 사업이고 오히려 다른 경협 사업보다 더 부담이 없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통일원의 사업 승인에는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업 승인 및 광고주 선정이 끝나는 대로 빠르면 5월께 한국 주민들은 평양과 금강산 등지에서 ‘조선 인민 배우’와 ‘인민 영웅’ 그리고 ‘평양 어린이 예술합창단’ 등을 CF모델로 하여 촬영·제작한 상업 광고를 신문·잡지에서 처음으로 보게 될 전망이다.

Aza측이 광고 사업을 협상하면서 금강산총회사측에 프리젠테이션용으로 제시한 인쇄 광고 시안의 광고 문안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이렇다.
“통일을 위하여! 진로 한잔을 제의합니다. 평양에 사는 사람과 서울에 사는 사람. 한잔 술을 제의합니다. (주)진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우리 민족의 통일 노래.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혼선 없이 깨끗하게, 통일도 혼선 없이 깨끗하게. 삼성 애니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여기가 금강산입니다. 민족 동질성 회복 운동에 현대가 앞장섭니다. 남과 북이 하나 되도록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는 일을 현대가 시작합니다.”

북한 “황장엽은 황장엽이고 사업은 사업”

이같은 인쇄 광고 시안은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매체(인쇄 및 전파) 광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북한측 협상 대표단의 이해를 돕고 설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Aza측이 제작한 시안일 뿐이다. 또 어떤 기업이 광고주로 나설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시도하는 남북 협력 광고 사업이라는 점에서 광고주들로서도 본격적인 상품 광고보다는 남북이 서로 이해하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기업 및 상품 이미지 광고 쪽을 더 선호할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총회사측은 광고주 선정 문제는 전적으로 Aza측의 자주권에 속하는 것이라며 이를 선선히 위임했다. 따라서 Aza측은 이번 일이 뜻 깊은 사업이라는 점에서 참여를 원하는 기업(광고주)에게 공평한 기회를 보장하는 방식을 택하겠다고 밝혔다. “광고주로 누가 나서느냐에 따라 첫 작품으로 평성(평양-개성)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누비라’(대우자동차) 광고가 나올 수도 있고, 백두산 정상에 오른 ‘스포티지’(기아자동차) 광고가 나올 수도 있다.”

박대표가 이처럼 대북 광고 사업에 자신감을 갖는 까닭은 광고주가 이만한 ‘광고 물건’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북한에서 촬영·제작한 첫 인쇄 및 텔레비전 광고의 경우 국민의 기대 효과는 물론 상징적 효과가 엄청날 것이기 때문에 대기업 광고주들의 치열한 광고 예약 경쟁마저 예상된다. 또 대북 경협 사업 진출을 꾀하는 대기업들로서는 기업 및 상품 이지미 광고 자체가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측면이 크다.

실제로 국내 굴지의 광고대행사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대기업들 치고 광고 사업 진출을 시도하지 않은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95년 처음으로 남북 경협 사업 승인을 받아 남포공단에서 합영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대우그룹의 경우 북한에서 광고 촬영을 추진하는 방북계획서를 통일원에 제출한 것으로 지난해 일부 언론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당시 일부 언론은 대우측이 북한내 고위 인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내 인맥을 통해 북한과 접촉하고 있으며, 이미 평양 거리와 금강산 등 주요 지역을 배경으로 대우자동차 광고를 찍을 구상을 국내 3개 광고회사에 발주해 둔 상태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오보이거나 대우측의 ‘자가 발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처음으로 남북한 쌍방의 계약 체결을 끌어낸 박기영 대표의 광고 사업도 실은 박씨가 롯데그룹 계열의 대홍기획에 다니던 91년부터 추진해 온 것이다. 83년 프로듀서로 입사해 CF 감독으로 ‘가나 쵸코렛’ 광고에 채시라를 처음 발탁했고, 영상사업팀장(부장)으로 잘 나가던 박씨가 11년 만에 직장을 그만둔 것도 대북 광고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수 차례 ‘북한 주민 접촉 승인’을 받아 지난해 5월 북한측으로부터 금강산총회사를 교섭 창구로 지정받기 전까지는 시행 착오의 연속이었다. 지난해에는 북한 당국의 초청장을 받아 북경에서 10월에 금강산총회사측과 실무 회담을 열기로 합의했으나 예기치 않은 잠수함 사건(9월18일)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다 이번에 비로소 결실을 본 것이다.

Aza는 현지 로케이션 및 코디네이션, 진행·모델 섭외, 장비 임대 및 운송, 기타 편의 제공 등 해외 광고 촬영 진행비에 준하는 금액으로 금강산총회사측과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기업들도 해내지 못한 광고 합작 사업이 결실을 맺은 데는 대북 광고 사업을 실현하려는 전문 광고인으로서 박대표의 강한 집념과 오기뿐만 아니라 북한 당국의 유연한 대응도 크게 작용했다.

특히 2월10일부터 시작된 협상 중간에 황장엽 비서 망명(2월12일)이라는 돌출 변수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한국측 협상 관계자들은 잠수함 사건을 떠올리며 이번 협상도 깨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북한측 대표단이 ‘황장엽은 황장엽이고 사업은 사업’이라는 식으로 유연하게 나와 쌍방은 일정대로 2월14일 최종 계약서에 서명했다.

북한 관광산업·투자 유치 활성화 전기될 듯

북한으로서는 이번 광고 합작사업이 지난해 말에 기존 대외 무역회사를 통폐합한 ‘광명성경제련합회’의 지도 아래 이루어진 첫 사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북한 당국은 지난해 말 조선 광명성총회사·삼천리총회사·은하무역총회사 등 한국 기업과 임가공, 투자 유치, 교류·협력 사업에 관여한 모든 총회사(무역회사)들을 광명성경제련합회로 통폐합했다(대다수 언론과 당국은 통폐합된 기구를 ‘조선광명성총연합회’로 잘못 알고 있으나 정확한 명칭은 ‘광명성경제련합회’인 것으로 이번에 확인되었다. 이번 계약서에도 ‘갑방과 을방은 본계약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광명성경제련합회 베이징대표부를 통하여 전화 및 확스 통신으로 긴밀한 련계를 취한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광명성경제련합회 회장에는 김봉익 전 삼천리총회사 총사장이, 부회장에는 대외경제협력추진위 김문성 서기장이 임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명성련합회 설립은 북한 진출을 추진하는 한국 기업과의 협상 및 사업 파트너를 단일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황장엽 망명 사건에도 불구하고 대남 사업의 대외 교섭을 전담하는 유일 창구인 광명성경제련합회가 사업을 지도한 이번 광고 합작 건이 순조롭게 성사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북한이 남북 경협 사업에 유연하게 대응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광고 계약의 순조로운 진행은 금강산 관광 개방 준비를 끝낸 북한의 관광산업 및 투자 유치 활성화에도 중요한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25쪽 인터뷰 참조). 북한 당국은 광고 사업의 북한 진출을 허용함으로써 이미 한국 당국에 관광 개방을 알리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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