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집권 2기 청사진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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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넌스 경쟁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국정 운영 스타일을 선보이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복귀 프로그램’과 집권 2기 청사진을 분석했다.
청와대 관저 분위기를 묻자 이병완 홍보수석은 “쾌청하다”라고 답했다. 말로는 대통령 복귀와 최악의 경우(탄핵)를 둘 다 대비하고 있다지만, 헌재 판결일이 다가올수록 청와대가 복귀 쪽에 무게를 싣고 있음을 의미한다.

청와대가 준비 중인 노대통령 복귀 프로그램은 크게 단기와 중기로 나뉜다. 일단 5월13일을 전후해 헌법재판소 판결이 나면 곧바로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나 국무회의를 열어 짤막하게 첫 반응을 내보내고, 다음날 오전 기자회견을 열어 대통령이 직접 그간의 소회와 향후 국정 운영의 청사진을 밝힌 뒤, 5월15일 제주도에서 열리는 아시아개발은행(ADB) 총회에 참석하는 것이 첫 3일간 프로그램이다.

청와대는 이 프로그램의 기조를 ‘조용한 복귀’로 삼았다. 노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일문일답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고민한 것이나, 당초 5·18 기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던 것을 취소한 일 따위가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조용한 복귀’ 이후에는 청와대 개편-열린우리당 입당-6월5일 국회 개원과 재·보선 실시-총리 인사청문회와 임명동의안 처리-개각 등 굵직굵직한 현안이 이어지게 된다.

청와대 개편은, 정책실을 강화하고 정무수석실을 폐지하는 쪽으로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정치는 당에 맡기고 청와대는 정책 추진에 전념하겠다는 노대통령의 집권 2기 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정무수석실에 있던 정무기획 기능은 홍보수석실로, 시민사회비서관실은 신설되는 시민사회수석실(가칭)로 옮겨갈 것이라는 후문이다.
청와대 개편이 너무 잦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청와대의 한 고위 인사는 “대통령 비서실은 말 그대로 참모 조직이다. 참모 조직은 안정성도 중요하지만, 대통령이 그때그때 어떤 업무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해체되었다가가 탄력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비서실의 개념이 기업의 태스크포스처럼 ‘자리’ 중심이 아니라 ‘일’ 중심으로 운용되리라는 점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무장관 부활도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정무장관이 생기면 그 아래 차관·국장·보좌관 등 줄줄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정치 특보 한 명이 하면 될 일을 가지고 무엇하러 그런 낭비 요소를 만드나”라고 반문했다.

대신 국회와의 관계를 원활히 하는 데는 대통령이 적극 나설 태세다. 6월5일 국회 개원식에 참석해 연설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청와대의 한 핵심 인사는 노대통령이 개원 연설에서 ‘거버넌스 경쟁의 시대’를 강조하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거버넌스(Governance)’는 지난 4월11일 노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산행을 하면서 입에 올린 용어다. 당시 마땅한 우리말이 없다며 거버넌스를 ‘지배 구조’라고 번역한 노대통령은 “이제는 좌우 이념 대립에서 거버넌스 경쟁 시대로 주제가 바뀌고 있다”라면서, 폐쇄에서 개방으로, 수직에서 수평으로, 힘에 의한 지배에서 합의에 의한 지배로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강조했다.

정치학자들에 따르면 거버넌스란 기존 정부, 즉 거번먼트(Government)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정부 시스템이다. 선거를 통해 대표 선수를 뽑아 국정이라는 공공재의 공급을 맡도록 한 국가 권력이 점차 부패하고 효율성이 떨어지고 보수화하고 있다는 반성에서 나온, ‘더 나은 민주주의 시스템’이 바로 거버넌스라는 얘기다. 청와대의 한 참모는 “노대통령은 일찌감치 참여와 분권, 대화와 타협, 권위주의 해체 등을 자신의 국정 철학으로 설정했다. 그러던 차에 이에 해당하는 용어가 거버넌스이고, 이것이 세계적인 흐름이 되고 있다는 각종 서적과 자료들을 접한 후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참모들에 따르면, 노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국이 펴낸 <21세기 새로운 거버넌스>로 알려진다. 원서는 2001년에 발간되었지만, 번역본은 지난해 나왔다.

복귀 직후 야당과 혈전 벌어질 수도

하지만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겠다는 노대통령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 복귀 직후 청와대와 야당 사이에는 한바탕 난기류가 형성될 조짐이다. 김혁규 총리 지명을 둘러싼 갈등이 원인이다. 청와대 인사수석실 검증에서 큰 하자가 없는 한 노대통령은 집권 2기 새 총리로 김혁규 카드를 밀어붙일 태세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상생을 하자면서 왜 하필이면 한나라당이 가장 꺼리는 카드를 꺼내 드느냐고 반발하고 있다. 김혁규 전 지사에 대해서는 한나라당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만큼 인사청문회에서 혼쭐내주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는 내심 ‘경남 대통령’으로까지 불린 김혁규 총리 지명이 부산시장과 경남도지사 재·보선에 미칠 영향을 경계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여권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다. 문희상 정치특보는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대통령이 쓰겠다는 사람을 반대부터 하는 건 상생의 정신에 맞는 것이냐”라고 맞받아쳤고, 노대통령 역시 “한나라당이 세 번씩이나 도지사로 밀었다는 것은 그만큼 한나라당도 김 전 지사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얘기 아니냐”라며 대응 논리를 제시했다. 지역주의 극복을 자신의 정치적 과업으로 여기는 노대통령 처지에서는 다소 무리해서라도 부산시장·경남도지사 선거를 이기고픈 생각이 강한 듯하다. 청와대 개편 때 설동일·정윤재 등 제2기 부산파를 적잖이 기용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대통령은 김혁규 카드를 쓸 경우 6월5일 전에 지명할 예정이다. “앞에 나서기보다 한 발짝 뒤에 서서 가겠다”라고 노대통령이 예고한 통치 스타일의 변화가 야당과 맞닥뜨려 초장에 ‘도루묵’이 되지 않을까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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