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만족도, PK는 높고 TK는 낮다
  • 장영희 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1996.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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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포스코 경영연구소 ‘한국인의 삶의 질’ 공동 여론조사/ 중요 생활 문제, 건강·돈·교육 순… 환경·교통·치안에 관심
 
한국은 10년 동안 소득이 5배나 늘고 95년 말에 1인당 국민소득 만달러 시대에 진입했다. 통상 만달러 시대는 사람들이 삶의 질에 대한 향상 욕구를 갖기 시작하는 분기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소득 만달러 시대에 들어선 지금 한국 국민은 이에 걸맞는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까. 만약 삶의 질이 경제 수준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시사저널〉은 포스코경영연구소와 공동으로 한국인의 삶의 질을 측정하기 위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 작업은‘삶의 질’이라는 화두를 통해 21세기 한국이 지향해야 할 좌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편집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살아가는(겪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일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백인백색이다. 저마다 다르게 답하고 있지만,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압축된다. 행복 추구와 자아 실현이 그것이다.

삶의 질을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가능성을 누릴 수 있는 정도’ 혹은 ‘개인의 삶을 윤기있게 만들어주는 만족감의 총량’이라고 정의할 때, 중요한 가능성이나 만족감이라는 개념은 결국 특정한 욕구가 충족되는 것과 직결된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대체로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답게’의 정도를 현재 생활 만족도로 치환해 볼 때 한국인의 생활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평균 64.3점밖에 안된다. 한국인은 1인당 국민소득 만달러 시대를 구가하는 국민답지 않게, 자기 삶의 질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자기 삶의 질이 보통 수준(50점)보다 떨어진다는 응답은 32.5%나 되었다. 특히 40대, 학력이 낮고 대구·경북 지역에 살며, 생산직에 종사하며 백만원 미만 소득자들에서 높게 나타났다. 생활 만족도는 학력·소득과 정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과 학력이 높을수록 만족도가 높았다.

생활 만족도를 묻는 이 문항의 응답 가운데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지역간 편차이다. 국민 가운데 스스로 삶의 질이 가장 낮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대구·경북 지역(61.9점) 거주자이다. 이 지역의 50점 이하 응답률(41.7%)은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지난 30여 년간 고도 성장 전략의 수혜자이자 권력을 창출하는 산실로 여겨진 이 지역 사람들의 만족도가 이처럼 낮은 것은 일반 예상을 벗어난 결과이다.

전국 평균 만족도 1등은 현 정권의 ‘실세 지역’으로 꼽히는 부산·경남 지역(65.8점)이 차지했다. 두 지역 모두 경제가 피폐되어 있다는 점에서 과거(3∼6 공화국)의 실세(TK 지역)와 현재의 실세(PK 지역)라는 정치적 이유가 이 두 지역민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밑바닥 의식에 깔려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광주·전라 사람들 “세상은 살만 하당께”


흥미로운 것은 만년 소외 지역으로 꼽히는 광주·전라 지역 거주자들이 높은 만족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호남 사람들의 평균 만족도는 전국 2등으로, 1등과의 차이가 0.5% 포인트밖에 나지 않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만족도가 꽤 높은 축에 속하는 71∼80점대에서는 전국 최고의 응답률을 보였다.

한국인들은 삶의 질을 구성하는 인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변수(복수 응답)로 건강(26.0%)과 경제적 안정(21.8%)을 꼽았다. 건강과 경제 안정을 중시하는 경향은 인구·사회학적 특성을 감안해도 고른 분포도를 보였다. 이같은 중요도 순위는 10년 전 결과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86년 ‘서울 시민의 삶의 질 실태와 시정부의 공공정책 발전 방향에 관한 연구’라는 한 논문은 당시 삶의 질을 구성하는 인자의 중요도를 건강, 경제 안정 및 가정 생활, 교육 순으로 중요도를 매겼다.

건강이 생활 문제 1순위로 꼽힌 것은, 개인의 건강이 일상의 삶을 떠받쳐 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당연해 보인다. 인간의 보편적 욕구인 건강은 그 자체가 삶의 목표인 동시에 전체 삶의 질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경제 안정이 중요하다는 견해는, 경제 수준이 삶의 질을 좌우하는 기초 조건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결과는,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 국민보다 유달리 부에 대한 만족 수준을 높게 설정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 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4∼6월에 아시아 아홉 나라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이 잡지 독자 3천명을 대상으로 사무실 밖에서의 생활·태도·야망을 조사했다.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은 자신의 재정 상태에 대한 만족도가 열 나라 가운데 7위(85점)에 그쳤다.

이런 결과는 위 조사에서 한국인의 28%가 자기 아이들이 가난한 집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싫다고 답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이 수치는 조사 대상국 가운데 가장 높다). 그만큼 한국인은 부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계급 의식이 강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번 조사에서 4인 가족이 생활하기에 적정한 월수입이 평균 2백만원(35.9%)이라고 응답한 것은 수입을 다소 낮춰 응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공보처 조사에서는 2백24만원).

3위로 꼽힌 중요한 생활 문제는 자녀 교육(21.5%)이다. 자녀 교육을 중시하는 한국의 부모들은 월평균 31만2천원을 과외비로 쓰고 있다. 51만원 이상을 쓰는 경우도 7.3%에 달했다. 사람들이 과외비 부담이 과다하다(57.0%)고 여기면서도 소득의 상당량을 과외비로 쪼개는 현실에는 열악한 공교육 상황이 숨어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내 자식만은 출혈을 해서라도 대학에 꼭 보내야 한다’는 부모들의 신앙에 가까운 교육열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학력과 학벌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는 도구이자 신분을 상승시키는 ‘면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정직(37.6%)과 성실(27.7%)이라는 덕목을 유독 강조했다. ‘경쟁에서 이겨라’ ‘공부를 하라’는 응답은 아예 없거나 고작 2%대 수준이다. ‘반드시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로 보아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인데,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른바 ‘모범 답안’을 냈을 가능성이 크다.

이같은 추측을 하는 것은 앞서의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조사 결과와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그 조사에서 한국인들은 조사 대상국 국민 가운데 도덕적인 가치관을 가장 중시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국인들은 정직·근면·자주·자선·사회 위계·권위 존중 같은 가치관이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자율·학식 존중·조화·표현의 자유 등에 대해서는 아예 답하기를 회피했다. 이번 조사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강조하는 덕목으로 시민 정신과 사회 정의에 대한 응답률이 각각 1%대로 나온 것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조사 결과와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결과들은 한국인들이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의미에 대해서는 인식이 낮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부모들이‘자식 농사’를 잘 짓겠다는 생각은 자녀에게 노후를 의탁하는 전통적인 인식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하면서 스스로 노후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10명 가운데 1명 이상이 자신의 노후 대책을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다. 삶의 질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인간에게 노화가 찾아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젊을수록 가정과 취미 생활 중시

70년대는‘일 중독 시대’라고 하리만큼 직장 생활이 삶의 모든 것이었던 시기였다. 이런 경향은 90년대 들어 상당히 엷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사에서 성공적인 직장 생활보다 부부·가족 간의 화목함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응답이 꽤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정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취미 생활에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젊은 사람일수록, 서울에 거주하는 전문직·자유직 종사자일수록 일 못지 않게 가정과 취미 생활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국 직장인들은 10명 가운데 4명이 주말을 집에서 보낸다. 주로 텔레비전(25.0%)을 보거나 잠(15.2%)을 잔다. 취미를 즐기거나 가족과 여행한다는 응답은 각각 10명에 1명꼴이다. 물론 텔레비전 시청을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가족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도 가족 휴양 시설이 없다시피 하고 휴양지의 물가가 비싸고 교통 체증과 싸우는 것이 싫어 포기했다면, 이런 환경적 요인이 삶의 질을 낮추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말에 쉬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직장 또는 집에서 회사 일을 했다고 답한 사람이 10명 가운데 2명 이상이다. 토요 휴무제를 시행하는 직장이 늘고 있지만 한국 직장인(자영업자 포함)의 노동 강도는 여전히 높다고 볼 수 있다.

문화체육부와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이 94년 전국의 만 15세 이상 남녀 2천명을 대상으로 한‘문화 향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여가 시간이 아예 없거나(10.4%) 문화·예술 활동에 쓴 돈이 전혀 없는 사람(31.4%)이 적지 않았다. 이 조사에서 한국인은 여가 활동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시간 부족(44.4%)을 가장 많이 꼽았으며, 돈이 없다(18.7%) 와 정서적인 여유가 없다(17.8%)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생계 유지, 혹은 직장 생활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천만원이 생긴다면 어디에 쓰겠는가’라는 질문에 15.2%가 여행, 10.5%가 문화·취미 활동에 쓰겠다고 응답한 것은 사람들이 여가에 관심이 크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10명 중 3명 “한국 떠나고 싶다”

정보화 사회는 사람들의 문화 욕구를 자극하고 확장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정보화 사회 도래가 아직 멀어 보인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10명 가운데 6명 가량이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또 사용자 대부분이 주로 문서 작성(24.7%)을 위해 컴퓨터를 쓰고 있다. 컴퓨터를 고난도 정보 처리 기기로 쓰는 사용자는 아주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중복 응답)로는 환경 오염(25.4%), 교통시설 확충(17.6%), 치안(14.1%) 순으로 꼽혔다. 이것은 ‘사회·경제 환경의 안전성에 관한 욕구’의 대표 주자로, 어느 나라 정부나 자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우선 배려하는 사안들이다. 의료 서비스, 인권 보호, 공공 시설물의 안전도, 문화 시설, 주택 사정, 법률 서비스 등의 열악함도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는 인자로 나타났다.

사람들의 욕구가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는 사회·경제 환경의 안전성에 관한 욕구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이 주거 문화적 욕구, 자아 실현에 관한 욕구, 물질적 안정에 관한 욕구, 사회 체계의 공평성에 관한 욕구 순인 것으로 연구되어 있다.

한국 직장인들은 자기 삶의 질이 대체로 낮다고 파악하면서도 한국에 살고 싶지 않다고 느낄 때가 별로 없는 것으로 조사되어 흥미롭다. 10명 가운데 7명이 한국에 살고 싶지 않을 때가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 결과는 질문을‘이민 등으로 구체적인 행동에 옮기고 싶을 때가 있었느냐’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민이 자신의 뿌리와 기반을 흔드는 위험을 감수하며 하는 행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10명 가운데 3명꼴로 나타난 응답률을 비중이 낮다고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답한 사람들은 그 이유로 환경 오염, 교통 체증 및 무질서, 열악한 주거 환경, 부실 공사, 부정 부패, 불공정한 법 집행, 반인륜적 범죄 빈발 같은 사회적 이유를 가장 높게 지목했다.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는 정치적 이유와 빈부 격차·물가 상승 같은 경제적 이유, 그리고 사교육비·교육 정책 같은 교육 문제를 꼽은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적을수록, 교육 수준과 소득이 높을수록 살고 싶지 않을 때가 ‘없다’고 답한 비율이 줄어들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세금 더 내더라도 삶의 질 높아졌으면…”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느냐 하는 점은 죽음에 대한 태도 문항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그저 그럴 것(42.9%)’과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것(38.4%)’에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이같은 낙관적인 전망은 ‘희망 사항’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죽음의 질’을 나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조사에서 유의할 대목은 한국 직장인들이 자신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고 밝힌 점이다.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이 기꺼이(11.2%), 혹은 가능한 대로(70.3%) 부담하겠다고 답했다. 이 결과는 실제로 세금을 더 내야 할 때 응답률이 낮아질 가능성은 있지만, 삶의 질 향상을 열망한다는 증거로 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인간은 바른 것과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가치가 존중될 때, 그것을 향유하고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질이 높다고 인식한다. 자기를 계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 삶의 질이 높다고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경제 수준과 걸맞게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2001년 정부 추정치)가 되어도 그것이 갖는 의미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선진국은 더욱 될 수 없다. 경험적으로,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은 경제와 삶의 질이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균형의 미학이다.

70년대는‘일 중독 시대’라고 하리만큼 직장 생활이 삶의 모든 것이었던 시기였다. 이런 경향은 90년대 들어 상당히 엷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사에서 성공적인 직장 생활보다 부부·가족 간의 화목함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응답이 꽤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정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취미 생활에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젊은 사람일수록, 서울에 거주하는 전문직·자유직 종사자일수록 일 못지 않게 가정과 취미 생활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국 직장인들은 10명 가운데 4명이 주말을 집에서 보낸다. 주로 텔레비전(25.0%)을 보거나 잠(15.2%)을 잔다. 취미를 즐기거나 가족과 여행한다는 응답은 각각 10명에 1명꼴이다. 물론 텔레비전 시청을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가족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도 가족 휴양 시설이 없다시피 하고 휴양지의 물가가 비싸고 교통 체증과 싸우는 것이 싫어 포기했다면, 이런 환경적 요인이 삶의 질을 낮추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그러나 주말에 쉬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직장 또는 집에서 회사 일을 했다고 답한 사람이 10명 가운데 2명 이상이다. 토요 휴무제를 시행하는 직장이 늘고 있지만 한국 직장인(자영업자 포함)의 노동 강도는 여전히 높다고 볼 수 있다. 문화체육부와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이 94년 전국의 만 15세 이상 남녀 2천명을 대상으로 한‘문화 향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여가 시간이 아예 없거나(10.4%) 문화·예술 활동에 쓴 돈이 전혀 없는 사람(31.4%)이 적지 않았다. 이 조사에서 한국인은 여가 활동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시간 부족(44.4%)을 가장 많이 꼽았으며, 돈이 없다(18.7%) 와 정서적인 여유가 없다(17.8%)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생계 유지, 혹은 직장 생활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천만원이 생긴다면 어디에 쓰겠는가’라는 질문에 15.2%가 여행, 10.5%가 문화·취미 활동에 쓰겠다고 응답한 것은 사람들이 여가에 관심이 크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정보화 사회는 사람들의 문화 욕구를 자극하고 확장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정보화 사회 도래가 아직 멀어 보인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10명 가운데 6명 가량이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또 사용자 대부분이 주로 문서 작성(24.7%)을 위해 컴퓨터를 쓰고 있다. 컴퓨터를 고난도 정보 처리 기기로 쓰는 사용자는 아주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중복 응답)로는 환경 오염(25.4%), 교통시설 확충(17.6%), 치안(14.1%) 순으로 꼽혔다. 이것은 ‘사회·경제 환경의 안전성에 관한 욕구’의 대표 주자로, 어느 나라 정부나 자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우선 배려하는 사안들이다. 의료 서비스, 인권 보호, 공공 시설물의 안전도, 문화 시설, 주택 사정, 법률 서비스 등의 열악함도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는 인자로 나타났다. 사람들의 욕구가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는 사회·경제 환경의 안전성에 관한 욕구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이 주거 문화적 욕구, 자아 실현에 관한 욕구, 물질적 안정에 관한 욕구, 사회 체계의 공평성에 관한 욕구 순인 것으로 연구되어 있다. 한국 직장인들은 자기 삶의 질이 대체로 낮다고 파악하면서도 한국에 살고 싶지 않다고 느낄 때가 별로 없는 것으로 조사되어 흥미롭다. 10명 가운데 7명이 한국에 살고 싶지 않을 때가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 결과는 질문을‘이민 등으로 구체적인 행동에 옮기고 싶을 때가 있었느냐’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민이 자신의 뿌리와 기반을 흔드는 위험을 감수하며 하는 행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10명 가운데 3명꼴로 나타난 응답률을 비중이 낮다고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답한 사람들은 그 이유로 환경 오염, 교통 체증 및 무질서, 열악한 주거 환경, 부실 공사, 부정 부패, 불공정한 법 집행, 반인륜적 범죄 빈발 같은 사회적 이유를 가장 높게 지목했다.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는 정치적 이유와 빈부 격차·물가 상승 같은 경제적 이유, 그리고 사교육비·교육 정책 같은 교육 문제를 꼽은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적을수록, 교육 수준과 소득이 높을수록 살고 싶지 않을 때가 ‘없다’고 답한 비율이 줄어들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느냐 하는 점은 죽음에 대한 태도 문항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그저 그럴 것(42.9%)’과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것(38.4%)’에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이같은 낙관적인 전망은 ‘희망 사항’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죽음의 질’을 나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조사에서 유의할 대목은 한국 직장인들이 자신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고 밝힌 점이다.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이 기꺼이(11.2%), 혹은 가능한 대로(70.3%) 부담하겠다고 답했다. 이 결과는 실제로 세금을 더 내야 할 때 응답률이 낮아질 가능성은 있지만, 삶의 질 향상을 열망한다는 증거로 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인간은 바른 것과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가치가 존중될 때, 그것을 향유하고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질이 높다고 인식한다. 자기를 계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 삶의 질이 높다고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경제 수준과 걸맞게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2001년 정부 추정치)가 되어도 그것이 갖는 의미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선진국은 더욱 될 수 없다. 경험적으로,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은 경제와 삶의 질이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균형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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