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악법 무서워 스스로 가위질
  • 宋 俊 기자 ()
  • 승인 1997.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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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 외 판정’ 받을까봐 자체 검열 강화…새 영진법 ‘독소 조항’이 원인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왕가위 감독·홍콩)에 이어 <나쁜 영화>(장선우 감독)가 잇달아 심의의 철퇴를 얻어맞자 영화계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동성애를 주제로 다루었기 때문에 수입 반려 판정(6월24일)을, <나쁜 영화>는 윤간·오럴 섹스 장면이 국민 정서상 납득하기 어려우므로 등급 분류 보류 판정(22일)을 내린다는 것이 공연윤리위원회(공륜·위원장 김상식)의 공식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영화인들은 심의 기준이 너무 자의적이라며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아이다호> <크라잉 게임>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프리스트> 등은 동성애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이다. 또 <필라델피아> <결혼 피로연> 등은 동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바운드>는 여주인공들의 동성애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이들은 모두 공륜을 통과했다. 그런데 왜 <부에노스아이레스>만 문제가 되느냐는 지적이다. 게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탁월한 영상 감각으로 올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 영화계의 ‘공증’을 받은 작품이다.

<나쁜 영화>의 경우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태여서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아시아의 섹스 산업을 폭로주의 관점에서 다룬 <쇼킹 아시아>를 상기한다. 섹스숍 풍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성전환 수술을 하는 게이의 피범벅이 된 성기 절단 장면 등이 드러나는 <쇼킹 아시아>는 공륜 심의를 통과한 뒤 올 상반기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 장선우 감독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10대 문제아들의 일상과 일탈을 ‘페이크 시네마(Fake Cinema:픽션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촬영하는 실험적 형식)’ 기법으로 다루겠다고 기획 초기 단계부터 밝혀 왔다.

상황 따라 심의 잣대 왔다갔다

영화인들이 분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번 조처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청소년 윤리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마녀 사냥’ 식으로 다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청소년 문제의 책임이 왜곡된 사회 구조 대신 영화 탓으로 돌려지는 것도 억울할 뿐더러, 상황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고무줄 심의’ 아래에서 어떻게 표현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더구나 이같은 상황이 두 영화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숨어 있다. 지난 7월 중순 문화체육부가 내놓은 새 영화진흥법의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 때문이다. 이 개정안은 오는 8월 공청회를 거쳐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그런데 최근의 분위기가 이 과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새 영화진흥법은 제정 당시부터 많은 논란을 빚었는데, 이에 대해 새 법의 산파 격인 신한국당과 문체부는 시행령을 통해 보완하겠다고 누누이 말해 왔다. 그런데 문체부가 내놓은 시행령에는 개선의 여지가 별반 담겨 있지 않았다. 합리적인 영화 심의 제도를 갈구해온 영화인들의 눈길이 시행령 개정안에 쏠릴 것은 당연했다.

새 영화진흥법의 골자와 제정 과정을 살펴보면 문제의 핵심이 확연히 드러난다. 96년 10월4일 헌법재판소가 영화 사전 심의 제도를 위헌이라고 판정했을 때만 해도 마침내 표현의 자유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97년 4월10일 탄생한 새 영화진흥법은 전보다 막강한 심의 권한을 품고 있었다. 영화에 등급(‘모든 관객 관람 가’에서 ‘연소자(18세 미만) 관람 불가’까지 4등급)을 매긴다는 것이 새 심의 체계의 골자인데(제12조), 경우에 따라 등급 분류를 보류하는 권한을 부여한 독소 조항이 문제였다(언론이 ‘등급 외 판정’이라 지칭하는 것이 바로 이 조항임).

이 조항의 여파로 영화계에서는 ‘알아서 기기’ 관행이 새로 생겨났다. 예전에는 ‘과감하게’ 심의를 신청한 뒤 가위질(필름 삭제)을 받으면 그만이었는데, 새 법의 경우는 심의를 신청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 되었다. 일단 등급 분류 보류 판정을 받으면 3~6개월 안에 자진 수정하여 재심을 신청해야 한다. 그러는 사이에 영화 제작 혹은 수입에 쏟아부은 거금(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는 10억원 가량, 수입 영화의 경우 많게는 40억~50억원에 이른다)의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러다 보니 위험하다 싶은 부분은 자진해서 삭제하게 된다.
비상업 영화의 경우 ‘교육 목적’에 한정하여 심의를 면제한다는 조항(제13조)도 예전에 비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목으로 꼽힌다. 영화 선진국의 경우 독립 영화·소형 영화·실험 영화의 창의력이 영화산업의 밑거름이 된다는 취지에서 대부분 심의를 면제해 준다.

새 영화진흥법은 탄생 과정도 진통의 연속이었다. 헌재의 위헌 판결이 내려지자마자 영화계가 둘로 나뉘어 벌이기 시작한 심의 논쟁은 신한국당 개정안과 국민회의 개정안이 절충점을 찾지 못하고 표결로 결말이 날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한쪽은 안병섭(한국영화학회 회장) 이태원(한국영화제작자협회 회장) 임권택(한국영화연구소 이사장) 정지영(감독협회 부회장) 김동원(독립영화단체 대표) 등 영화 검열 철폐 운동을 벌여온 단체가 주도한 ‘완전 등급 분류를 위한 범영화인 대책기구’이다. 여기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8개 시민 단체가 가세했고, 이들의 의견은 후에 국민회의 개정안으로 수렴되었다.

다른 한쪽은 한국영화인협회(이사장 김지미)와 전국극장연합회(회장 강대진) 등이 앞장선 ‘영화진흥법 개정 범국민 대책위원회’이다. 두 단체는 원래부터 검열 철폐에 적극적인 단체가 아니었다. 이들과 문체부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신한국당 개정안의 밑그림이 잡혔다.

재심의 제도·심의위원 구성 등에도 문제

전자의 골자는 △민간 자율의 등급분류위원회를 두고 △완전 등급 분류제를 실시하여 △등급 외 작품을 상영할 성인 전용관을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등급 외 작품 전용관은 청소년의 출입을 효과적으로 막는 동시에 성인의 볼 권리도 함께 충족시키는 대안이라는 점, 그리고 등급 외 판정을 받은 작품 가운데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는 영화는 상영될 권리가 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후자는 공륜(97년 11월1일부터는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대체)의 심의를 지지하면서, 성인 전용관 신설 제안을 포르노 전용관이라며 일축했다. 시기상조일 뿐더러, 법을 신설해 가며 포르노 극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포르노 전용관 논쟁이 벌어졌는데, 여기에는 적지 않은 오해가 묻어 있다. 등급 외 영화와 포르노를 동일시하는 시각이다. “포르노 영화는 심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 대상으로서 별도의 유통망을 통해 번식할 뿐이다. 포르노는 풍속 저해 물품의 수출입을 금하는 관세법과 음란물 제조·반포를 처벌하는 형법에 저촉되지만 등급 외 영화는 그렇지 않다”라고 한국영화연구소 김혜준 기획실장은 밝혔다.

우여곡절 끝에 신한국당 개정안이 새 영화진흥법으로 제정되었지만 후유증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앞에서 밝힌 독소 조항말고도, 몇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법의 취지이다. 미국·프랑스 등의 경우(왼쪽 상자 기사 참조)는 청소년 보호와 성인의 관람 권리를 동시에 겨냥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자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등급 심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 취할 수 있는 이의 제기 조항도 미흡하다. 미국의 재심의 제도는 바람직한 본보기에 해당한다. 여론 조사를 통해 심의의 질을 평가하는 감시제도도 곁들이고 있다.

반면 우리의 경우는, 1차 심의에 불복할 경우 흡사한 방식으로 2차 심의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 대개의 경우 2차 심의는, 1차 심의 때 지적된 부분을 잘라낸 상태에서 진행하는 것이 관행이다.

심의위원 구성도 문제이다. 영화·비디오 분야의 수입 심의 위원과 본심의 위원, 상근 위원(총 34명)의 평균 연령은 58세이다(97년 기준). 이 가운데 외화 번역가를 포함하여 영화에 종사했던 사람은 13명뿐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감각을 선보이는 매체를 심의하기에는 너무 노년 세대에 치우친 감이 있으며, 전공도 모호하다. 전공에 따라 영화를 읽는 깊이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심의가 존재하는가. 이제 그 본질을 물을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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