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창간 7주년 기념 심포지엄 조 순·스즈키 ''지자체 특별 강연''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6.08.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력과 돈, 자치 단체에 넘겨라”
 
“선거를 실시한다고 지방 자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7월 25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지자제 특강에서 조 순 서울시장은 이렇게 목청을 높였다. 시청 직원에 대한 인사권조차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온 그는, <시사저널> 창간 7주년과 지자제 실시 1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에서도 중앙 정부에 대한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 날 그는 ‘압축 성장’이라는 개념을 언급해 참석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말은 선진국들이 백여 년 걸쳐 이룩한 경제 발전을 30여 년 만에 따라잡았듯이, 지자제에서도 그같은 압축 성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자치의 기본틀, 즉 제도와 법률을 정비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중앙 정부가 돈과 권한을 틀어쥐고 있어 자치단체의 운신 폭이 좁은 상황에서는 자치를 제대로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강연 요지였다.

그의 이같은 지적은 스즈키 쥰이치 전 도쿄도지사의 강연으로 인해 더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스즈키씨는 동경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23세 때 내무성에 발을 들여놓은 후 50년 동안 줄곧 지방 행정 분야에 종사해온 베테랑 행정가이다. 79년 이후에는 내리 4선을 기록하며 16년 간이나 거대 도시 도쿄 도정을 이끈 인물로서, 탁월한 행정력을 인정 받아 ‘자치 박사’‘ 행정의 프로’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그는 이 날 강연에서 1888년 이후 시작된 일본 지방 자치의 역사·특징·문제점을 소상하게 발표했다(연설문은 〈시사저널〉 제 353호 58∼59쪽 참조). 그에 따르면, 일본의 지방 자치는 1백8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본격 실시된 것은 2차대전이 끝난 뒤이다. 패전국으로서 미군의 지배를 받던 시절 억지로 강요 당한 것이 바로 서구식 지방자치였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 군국주의가 다시 부활하는 것을 철저히 막고자 했던 미국은 패전국 일본에 4D정책을 실시했다. 4D란 △비무장화(Demilitarization) △비독점화 (Deconcentra-tion) △지방분권화 (Decentralization) △민주화(Democracy)의 영문 머리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 정책들은 패전국 일본의 정치·경제·군사를 민주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지방분권화를 통한 지자제 전면 실시는 일본 민주화에 초석을 깔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46년 미군정은 지자제 실시 3원칙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지방자치단체의 자율성을 강화하고 △자치 행정을 운영하는 데 주민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하며 △지방 행정의 공정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그 해 7월 제정한 일본 헌법 제92조에도 지자제 관련 규정을 삽입했다. ‘지방 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지방 자치의 본지(本旨)에 근거해서 법률로 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일본에 지방자치법이 제정된 것은 47년이다. 이 법은 내무대신으로 하여금 교육·경찰·보건 위생·사회 복지 업무를 철저히 지방에 이양하도록 했고, 49년에는 미국의 재정 전문가이자 컬럼비아 대학 교수인 샤프의 권고에 따라 민주 개혁 조처들을 단행했다. 따라서 일본 민주주의의 기본 틀은 미군정 때 모두 갖춰지게 되었다.

그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정의 압력이 다소 느슨해지자 지자제가 다소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50년이 흐른 지금 일본의 지방 자치는 완숙기에 접어들었다.

조시장 “한국 상황 2차대전 후 일본과 흡사”

그 때문에 이번 심포지엄의 사회를 맡은 조창현 교수(한양대·행정학)는 한국이 일본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은 외부로부터 완벽한 형태의 지자제가 주어졌지만, 한국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정권도 순순히 권력과 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에서 중앙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돈과 권한을 자치단체에 분산하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중앙 정부와 자치단체 간에 갈등을 빚고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한국에서 지방 자치가 본격 실시된 것은 지난해 7월이지만, 지방자치법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일본보다 2년 늦은 49년이었다. 그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2년부터 지자제가 실시되었지만, 이승만 정권 아래서 자치단체는 집권 세력의 정치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마저 5·16 군사 쿠데타로 중단되었다가 91년에야 부활되었고, 지난해부터 본격 실시된 것이다.

조시장은 95년까지의 한국 상황이 2차대전이 끝난 뒤의 일본과 마찬가지라며, 강력한 중앙집권제 아래서 지자제를 실시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지자제가 일단 출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권한은 중앙 정부한테 있어 제대로 자치를 실시할 수 없게 되어 있다며, 정부가 앞장서서 지자제의 기본 틀을 마련해 달라고 정식 요청했다.

그는 자신의 행정 능력에 대해 일부에서 비판을 제기하고 있는 점을 의식한 듯, “현실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를 기준으로 본다면, 지난 1년 간의 지자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전후 일본 지방 자치의 틀을 세웠던 샤프 교수의 권고를 예로 들면서, “중앙 정부의 간섭 없이도 자치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치단체에 과감히 이양하라”고 요구하면서, 50년 전 도쿄의 제도를 갖고 21세기의 자치 행정을 펼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스즈키 전 지사와 조시장의 강연이 끝난 후 간단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첫번째 토론자인 강형기 교수(충북대·행정학)는 질문에 앞서 한국의 의회 의원이 무보수로 활동하는 데 비해 도쿄도 의원은 매월 1백10만엔씩 봉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후 그는 스즈키 전 지사가 추진했던 도쿄도 임해 부도심 건설과 도시 박람회 계획이 퇴임 후 백지화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스즈키 전 지사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러나 당초 자신을 지지했던 도쿄도 의회가 결국은 신임 지사의 결정을 추인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번째 토론자는 국민대 김병준 교수였다. 그는 정부가 권력 이양을 망설이는 것은 권력의 속성상 당연하다면서, 서울시가 ‘서울시특별법’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처지가 비슷한 다른 자치단체와 협력해 정부에 권한을 이양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리고 서울시가 정부한테는 더 많은 권한을 이양하라고 요구하면서도, 25개 구청한테는 권한 이양을 꺼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 물었다. 아울러 서울시 공무원들의 복지 부동 자세가 고쳐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교통·환경 문제 등 서울시가 관장해야”

이에 대해 조시장은 서울시가 한국의 핵심 두뇌이자 심장으로서 다른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서울시 특별법’의 목적이 자치를 제대로 실시한다는 데 있는 만큼 법의 형식을 고집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서울시의 각 구청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행정구일 따름이라면서, 교통·환경·쓰레기 문제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각 구청이 아니라 서울시가 이 문제들을 관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서울시의 간섭을 받지 않고도 구청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기꺼이 구청에 이양하겠다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울시 공무원들의 근무 태도가 불만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서울시의 장래를 가장 걱정할 사람들은 역시 그들뿐이라고 감쌌다.

평일 오후인데도 2백명이 넘는 각계 인사와 독자가 참석해 성황을 이룬 이번 행사는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해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일본보다 50년이나 뒤떨어져 있는 한국 지방 자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지자제의 압축 성장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행사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