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 쌀 매개로 1년내 수교 가능성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5.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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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순-가토·와타나베 라인 ‘물밑 가동’…무라야마 총리 임기내 수교 별러
지난 2월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일본과 북한 간에 비밀 접촉이 있었다. 일본측 참석자는 호리 고스케(保利耕輔) 자민당 정무조사회(정책위원회) 부회장, 다케우치 유키오(竹內行夫) 외무성 아시아국 심의관이었고, 북한측 참석자는 이종혁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회장이었다. 이들은 이 비밀 접촉에서 김일성 사후 연기되어온 일본 연립 여당의 조문 사절단을 조속히 파견키로 합의하고, 그 대가로 북한에 대해 쌀을 지원키로 했다. 이 합의에 따라 지난 3월 말 와타나베 미치오(度邊美智雄) 전 외무장관을 단장으로 한 연립 여당 방북단이 평양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방북단은 이 때 북한 노동당과 중단된 북·일 수교 교섭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5월 방일한 이성록이 쌀 문제 처음 제기

그러나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평양에서는 쌀 문제가 일절 거론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쌀 문제가 대두한 것은 5월 말 일·조우호학술문화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방일한 이성록 국제무역촉진위원회 위원장이 연립 여당 수뇌들과 접촉하면서부터다.

이성록 위원장은 5월26일 도쿄 젠니쿠호텔 36층의 한 식당에서 열린 조찬회장에서 북한의 처지를 설명하며 처음으로 쌀 문제를 입에 올렸다. 이성록은 이 때 북한 김용순 서기의 친서를 와타나베 전 부총리,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구보 와타루(久保亘) 사회당 서기장, 하토야마 유키오(鳩山夫紀夫) 사키가케 대표간사에게 전달하며 쌀 지원 요청이 북한 정부의 공식 요청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런 교섭 과정을 거슬러올라가 보면 쌀 문제를 계기로 북한과 일본을 연결하는 새로운 인맥이 떠오르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북한의 김용순 서기는 전부터 대일 관계를 총괄해 온 일본 관계 책임자다. 북·일 수교 교섭을 개시하자는 90년 9월의 이른바 ‘3당 공동선언’때도 그는 북한 노동당의 실무 책임자로 활약했었다. 지난 4월 말에 열린 평양 축전에 참의원이자 프로레슬러인 안토니오 이노키를 초청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김용순은 현재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서기라는 직함 이외에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함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위원회는 1년 전 돌연히 등장한 단체인데, 성격이나 기능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싱가포르 극비 회담에 참석한 이종혁은 이 위원회의 부위원장이다. 이성록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이 위원회의 직함을 갖고 있는 북한 인사들을 대동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위원회의 일본측 접촉 창구는 가토 고이치 자민당 정조회장 사무소다. 일본 시사 주간지 <아에라>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양쪽의 다리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은 ‘신일본산업’이라는 회사의 요시다 다케시(吉田猛) 회장이다. 그는 일본에 귀화한 재일교포 3세로서 아버지 대부터 북한과의 무역에 종사해 북한 고위층들에 접근할 수 있는 끈이 많은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가토 정조회장의 수석 비서 사토 사부로(佐藤三郞)씨는 그에게 북한 당국자들과의 접촉을 의뢰해 왔다.

<아에라>는 이 두 사람과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연계 플레이에 의해 지난 2월의 싱가포르 극비 접촉이 이루어지게 됐다고 지적한다. <아에라>는 또 이 두 사람이 국회의원이 아닌데도 3월 말의 연립 여당 방북단 멤버로 평양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일본 언론들의 보도와 달리 이 때 쌀 문제가 깊이 거론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연락역에 불과한 인물들이다. 쌀 문제를 총괄 지휘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가토 정조회장이다.

가토 회장은 자민당 미야자와파의 중견 간부로서 차세대 지도자로 유력한 인물이다. 그는 방위청 장관, 농수산성 장관을 역임했으며, 최근에는 ‘YKK 그룹’이라 불리는 자민당내 서클을 주도하며 자민당의 젊은 실력자로 떠오르고 있다.

북한이 그를 일본의 새로운 창구로 선택한 데는, 그가 자민당의 실력자라는 사실 이외에 쌀 문제를 담당하는 농수산성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른바 ‘농수산족’의 대부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 가토 회장은 중국 사정에 정통하다고 알려져 왔다. 그 역시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차기 총리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대북 카드라는 또 다른 외교 카드가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와타나베 전 외무장관도 북한이 새롭게 주목하고 있는 대일 창구다. 와타나베씨는 3월 말 연립 여당의 방북단 대표로 평양에 들어가기까지 북한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정치가다. 그는 최근 “한·일 합방조약은 원만히 체결되었다”는 발언에서도 잘 드러나듯 북한을 경원하는 보수파 정치인이다. 북한은 문제의 발언이 나온 이후에도 아무런 성명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수교 교섭에서 그가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80년대 나카소네 내각에서 대장성 장관을 지낸 정치가다. 따라서 돈줄을 쥐고 있는 대장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처지이다.

북한은 대일 수교 교섭에서 식민지 지배는 물론 전후의 적대관계에 대한 보상까지 요구하고 있다. 요구 금액은 약 50억 달러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북한은 이 보상금과 관련해 대장성측과 접촉해 왔다.

예를 들어 ‘3당 공동선언’의 일본측 주역이었던 가네마루 신(金九信) 전 부총리가 정계를 은퇴하자 북한은 새로운 대일 창구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를 지목해 접근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가 바로 대장성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상금의 규모를 결정하는 곳은 외무성이지 대장성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와타나베는 북한측으로 보면 또 다른 효용 가치를 지닌 정치가임이 틀림없다.

가토 회장은 최근의 한 강연에서 “북·일 수교 교섭은 현 무라야마 정권이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라야마 정권은 연립 여당 3당 간의 약속에 따라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연립 여당 3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면 그대로 유지된다. 따라서 무라야마 정권은 내년의 중의원 총선거 때까지 존속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도 1년여 임기가 보장되어 있는 셈이다. 가토 회장의 주장처럼 이 1년 사이에 북·일 수교 교섭이 타결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무라야마 총리도 정부·여당 연석 회의에서 쌀 지원 방침이 최종 결정되자 “수교 교섭을 본격 개시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무라야마 총리의 소속 정당인 사회당과 북한과의 관계는 이전처럼 원만치 못한 형편이다.
일본, 생색내고 외국산 쌀 재고 처리

<아에라>는 지난 3월 말 연립 여당 대표단이 방북했을 때 사회당의 구보 서기장이 김용순 서기에게 북한측의 태도를 ‘항의조로’ 확인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이 대일 창구를 사회당에서 자민당으로 옮기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바로 사회당의 불만이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 극비 회담에 사회당 관계자는 한 사람도 초청되지 않았다. 또 북한의 이성록 위원장이 방일했을 때도 사회당은 그의 방일 목적이 쌀 문제라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이 북한에 지원하기로 한 쌀은 실은 일본 국내에서 생산된 쌀이 아니다. 일본은 재작년의 냉해로 태국·중국산 쌀을 긴급 도입하였으나 맛이 떨어져 약 84만t이 재고로 남게 됐다.

일본 정부는 연간 t당 2만엔의 관리비가 들어가는 이 외국산 쌀을 처리하는 데 부심해 왔는데, 북한의 쌀 지원 요청은 그 재고를 일소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다.

여하튼 쌀 제공을 계기로 북·일 관계는 신칸센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목표는 와타나베·가토와 같은 자민당 실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무라야마 총리의 임기 내에 수교 교섭을 타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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