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사들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산다”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8.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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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48주년 여군 르포/헌병·감찰·특전·경리 등 병과에서 ‘남군’ 누르고 맹활약
바야흐로 취업난 시절이다. 여성 대졸자 취업은 더군다나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기’이다. 이러한 시대에 군이 새로운 여성 취업 대상처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군내 성희롱 금지 조처가 내릴 만큼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여군들의 참모습은 어떠할까.

육군 종합행정학교 헌병 교관 김윤정 대위(30·경기대 관광경영학과 졸업)는 육사 출신 장교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둔 엄마이지만, 처녀 때는 몇 차례 ‘사회’ 남자와 선을 보았다. 어색한 자리인 만큼 군대라는 공통 소재로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군대 다녀오셨습니까?”

“예. 방위병으로 갔다 왔습니다.”

“그러세요? 저는 지금 헌병 장교입니다.”

“예?”

여성이 헌병 장교라는 데서 남성들은 당황해 했다. 매사 이런 식이니 사회 남성들과는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이 군에 있을 때 신물 나게 듣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너, 영창 갈래”이다. 영창은 경찰서 유치장과 사회의 구치소 개념을 합쳐 놓은 제도이다. 김대위는 논산 훈련소에서 차출한 헌병 신병들에게 ‘영창 관리’를 교육한다.

이종옥 대위 ‘돈과의 전투’에서 백전 백승

영창에서는 난동을 부리는 병사가 가끔 있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 헌병은 체포술과 포박술, 그리고 난동자의 불만을 처리하는 대화술을 갖추어야 한다. 김대위는 이러한 것들을 교육한다. 헌병 임무에 대한 김대위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는 “더 나은 영창 제도를 만들기 위해 법무부 법무연수원을 자주 찾아가 자료를 구한다. 천안 개방 교도소 업무를 견학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김대위에게 여군들도 사고를 내느냐고 물어보았다. 김대위는 “여군도 사람인데 사귀는 남자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왜 없겠느냐. 아주 가끔씩 휴가를 갔다가 귀대하지 않아 탈영 사고로 처리되는 여군이 있다. 여군 사고는 여군 헌병이 담당한다”라고 말했다.

군내 사건·사고는 대개 헌병대 소속 하사관이 담당하고 헌병 장교는 관리 업무를 주로 담당한다. 김대위는 이제는 헌병 장교들도 수사에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대위는 “여군도 남군처럼 똑같이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커가는 것 아니냐”라며 여군 헌병 장교 1호로서 큰 부담은 없다고 말했다.
육군 2군지사 경리 장교 이종옥 대위(34). 고려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1년간 ‘몰래바이트’를 하다 여군학교에 입교했다. 그가 군대에 갔다는 소식은 복학한 남학생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수녀원에 간 것처럼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가 88년 소위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자 ‘잘 간 것 같다’고 말하는 남자 동기생이 늘어났다.

수학과 출신인 그는 임관 직후 경리 초군반에 차출되어 경리 교육을 받았다. 90년 육군에서 여군 병과가 없어지고, 여군들도 보병·헌병·경리 등 17개 병과에 흩어지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제1호 여군 경리 장교가 되었다.

이대위는 매달 수십억 원을 만진다. 그래서 그는 ‘命 예산 장교’라는 육군본부 인사명령 외에, ‘회계법’에 따라 ‘命 일상 경비 출납 공무원’이라는 인사 명령도 받았다. 이대위는 매월 한번씩 결산 보고서를 작성할 때 입금액과 출금액 간의 차액이 정확히 0으로 떨어질 때 ‘돈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쁨을 누린다고 말했다.

허춘자 대위, 음악 전공 살리려 군에 입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가 시작된 후 이대위에게 ‘군대에 참 잘 갔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대위는 어쩌다 동창회에서 사병 출신 남자 동창생을 만나면 “최소한 영관 장교는 해보고 제대하라. 고대 출신 최초의 여군 장군이 되라”고 성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6군단 감찰 장교로 활약하는 박미라 소령(37). 이화여대 법학과 시절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생각한 것이 군대였다. 군대는 계급 사회여서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경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지체없이 군대에 들어갔다. ‘과대표’도 못해 본 그였지만 군대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많았다.

보병인 그는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감찰 장교로 일하고 싶다며 특파를 신청했다. 육군 감찰감실은 행정부의 감사원과 비슷한 곳이다. 감사원 감사 요원들이 행정 부처 업무를 감사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듯, 감찰 장교는 예하 부대의 운영 상황을 조사해 군단장에게 보고한다. 따라서 감찰은 법학과 출신인 그로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분야였다.

여군으로서 최초로 감찰 장교가 된 그는 “감찰이야말로 모든 부대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병과이다. 나는 15년이나 군복을 입고 있었으나 감찰 장교가 되고 난 다음에야 내가 아는 분야가 너무 적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라고 말했다. 지금 박소령은 ‘보고서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예하 부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취재’해 낱낱이 적고, 그 개선 방안을 적시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일요일에도 책상에 앉아 끙끙거린다.
지금 하는 일이 ‘신나는’ 것으로만 따진다면 26사단 군악대장 허춘자 대위(35)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목포대 성악과를 졸업하던 해 그는 ‘군대는 매우 큰 조직이니 전공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주위에서 ‘실연을 당했거나 사연이 있는 사람만 여군에 간다’고 하건 말건 과감히 여군 사관후보생에 응시했다.

여군 사관후보생은 고등학교 성적과 수능 성적 그리고 대학 성적을 중심으로 1차 선발한 후, 신체검사와 체력 검정, 면접 등을 거쳐 최종 선발한다. 따라서 수능 점수가 낮은 예·체능계 대학 출신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한데도 그는 음대 출신으로는 최초로 여군 장교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공을 살릴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행정 장교, 여군 부대 지휘관 등으로 지내는 8년 동안 여군 하사들에게 군가를 가르치는 일 정도가 가장 전공에 가까운 일이었다. 갈등을 줄여가며 어느 정도 군 생활에 익숙해지던 96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여군 장교 중에서도 군악대장을 뽑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96년은 그를 비롯한 임관 동기생들이 1차로 소령 진급 대상자로 들어가는 해였다. 그러나 전공을 살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진급까지 내팽개치고 군악대 특파를 신청했다. 그 결과 26사단 군악대장이 되었다. 여군 최초로 군악대장이 된 그는 취임 첫날부터 군악대원들을 몰아붙였다. 악기를 하도 불어서 대원들의 입술이 부르트면 잘 듣는 ‘사제 약’을 사다 주면서 연습을 독려했다. 덕분에 그 해 벌어진 군사령부 주최 군악 연주 대회에서 26사단 군악대는 2등을 차지했다.

허대위는 음악 대학 작곡과 출신 군악대원과 편곡할 때 가장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연주회를 할 수 있는 지휘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군악대면 어떻고 오케스트라면 어떤가.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음악을 한 사람이 지휘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군 생활이 대단히 만족스럽다”라고 기운차게 말했다.

“군대는 성차별이 거의 없는 직장”

얼마전 육군이 여군에게 성희롱을 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이러한 보도는 여군들이 어떠한 성희롱을 당하는가 하는 또 다른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허대위를 비롯한 여군들은 “군대는 계급 사회이기에 오히려 성희롱이 없다”라고 말했다. 허대위는 “여자로서 가끔씩 보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한 배려도 없다. 군대야말로 성차별이 거의 없는 직장이다”라고 말했다.
육군 3군지사 항공정비대 연수경 중사(29)는 500MD헬기와 UH1H 헬기 엔진을 정비하는 유일한 여군 정비사이다. 강원도 태백시 장영여고를 졸업하고 88년 여군학교에 입교한 그는 한동안 타자수로 활동했다. 군인다운 일을 하고 싶었던 그에게 타자수 일은 매우 따분했다. 그는 비행기를 몰고 싶었다. 그러나 90년 여군에게 각 병과가 부여될 때 헬기를 조종하는 항공 병과만은 여군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헬기 정비였다. 하늘을 훨훨 나는 조종사 대신 하늘을 나는 헬기의 심장을 쓰다듬게 된 것이다.

활달한 연중사는 연애도 자신 있게 해, 같은 부대에서 헬기 기체를 정비하는 석동현 중사와 결혼했다. 연중사는 “남편이 나보다 1년 어리고, 임관도 1년 늦다”라고 말했다. 여군은 병과 별로 나누어서 근무하는데도, 진급은 여군들끼리만 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다. 연중사는 여군도 남군과 똑같이 자기 병과에서 진급 경쟁을 벌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군 장교 4백여 명, 하사관 7백여 명

현재 육군에는 장교 4백여 명, 하사관 7백여 명 등 1천3백여 명의 여군이 남군과 똑같이 병과 별로 흩어져 활동하고 있다. 여군 중 최고 선임자는 논산훈련소 연대장 엄옥순 대령(43)이다. 여군 최초로 보병 연대장이 된 그는 지난 8월 단국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군 지휘관으로서 애로 사항을 묻자 엄대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훈련병을 군인으로 만드는 것인데, 여성이라고 해서 애로가 있을 이유가 없다. 훈련병들은 나를 엄마 같다며, 내가 이끄는 연대를 ‘꿈의 연대’라고 부른다”라고 말했다.

여군들이 겪는 가장 큰 부담은 다른 직업 여성들처럼 ‘육아’이다. 내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는 생각과 군대에서 내 꿈을 펼쳐야 한다는 야망 사이에서 이들은 고민한다. 한 여군 장교는 “아이를 위해 직업을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오지 않는 한 군대는 나의 평생 직장이다. 육아 문제만 극복된다면 한국에서도 여군 장성이 나올 수 있다. 여군은 이제 꽃이 아니라, 직업 군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달라”고 말했다.

지난 9월6일은 여군 창설 48주년이었다. 이렇게 긴 역사를 통해 여군은 새로운 여성 직장으로 자리잡았다. 자기 병과에서 약진하는 병과별 1호 여군들의 진지한 모습에서 여군에게 추월당해 고민하는 남군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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