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종 울리는 언덕 위 뾰족집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8.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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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의 중심’ 명동성당 100주년/70년대 이후 민주화 성지로 우뚝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2가 1번지는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곳이다. 지금은‘부당 노동행위 척결을 위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이라는 긴 현수막을 내건 천막 속에서 민노총의 농성이 보름 넘게 계속되고 있다. 민노총 옆에는 택시 완전 월급제를 요구하는 농성 천막이 하나 더 있고, 그 한켠에서 농성하는 한총련 학생 수십 명은 수시로 성당 입구까지 몰려나와 전투 경찰을 앞에 두고 구호를 외친다.

‘민주화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명동성당에서 벌어지는 이같은 일들은 이제 시민들에게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 70년대부터 이곳에서 수없이 벌어졌던 항의 집회와 농성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892년 기공, 1898년 5월29일 축성

백년 전 북단재 혹은 종현으로 불리던 남산 줄기의 높은 언덕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명동성당은, 당시 한양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람들은 거대하고 생경한 고딕식 서양 건축물을 뾰족집이라 부르며 신기해 했다. 구한말의 대학자 황 현은 명동성당을 이렇게 묘사했다.‘한양의 남부 종현은 명동과 저동 사이에 있으며, 땅이 시원스러워 보일 뿐만 아니라 전망도 좋다. 10년 전 서양인들이 이를 사들여 언덕을 깎고 평지를 만들어 교당(敎堂)을 세우기 시작하여 6년 만에 끝냈는데, 높이 솟을 것(성당의 첨탑)이 깎아지른 산과 비슷하고 가히 수만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종현학당이다.’

백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명동성당이 오는 5월29일로 축성 100주년을 맞는다. 한국천주교서울대교구주교좌명동교회라는 정식 명칭을 가진 명동성당은 여러 상징을 함축하고 있는 공간이다. 일반 국민에게는 민주화의 성지요 보루로 각인되어 있으며,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한국 천주교의 모태로 여겨진다.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의 일터인 천주교서울대교구청이 명동성당에 있을 뿐 아니라, 명동성당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종교적 의미의 상징성은 먼저 명동성당의 위치가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라는 데서 연유한다. 1784년 2월 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그 해 9월 서울 수표교 근처(지금의 수표동) 이 벽의 집에서 최초로 영세식을 거행했다.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처음 탄생시킨 이들은 그 해 겨울부터 정기 집회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 모임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지금의 명동성당 부근 명례방의 김범우 집이었다. 역관 출신인 김범우의 집에서 이승훈·이 벽 등이 모여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공소(성당보다 작은 신자들의 집회소)를 만들고 새로운 신앙의 싹을 틔워 갔다.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의 명동성당이 자리잡은 옛 종현 언덕과 명례방은 천주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중심지였던 셈이다.
일제 때 민족 외면한 ‘부끄러운 역사’도 떨쳐

초기 신앙 공동체가 여러 박해를 거치며 깨지는 동안 명례방은 서서히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났다. 명례방이 한국 천주교회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백여 년 뒤인 1886년께였다. 한·불 수교가 이루어짐으로써 신앙의 자유가 사실상 허용된 1886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당시 행정구역상으로 명례방 종현계 종현동의 땅을 성당을 세울 목적으로 사들였다. 그곳은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동의 바로 이웃이었다.

서울대교구장이 거주하는 주교좌 본당으로서 명동성당은 1892년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을 시작으로 수많은 교회를 분가(分家)시켰는데, 현재는 서울교구에만도 교회가 1백97개나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명동성당만을 유독 ‘대성당’이라고 부르며 가톨릭의 상징으로 여기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명동성당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전국구 성당’이라 불린다. 백년 전 신자 수백 명으로 출발한 명동성당은 지금 가장 오랜 역사만큼이나 가장 많은 신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4만5천을 헤아리는 신자 가운데 명동 주변에 거주하는 이는 1천2백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이 다른 지역 신자들까지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다. 세계 가톨릭의 중심이 로마 교황청이라면, 한국 가톨릭의 중심은 명동성당인 셈이다.

교황청이 깜짝 놀랄 정도로 교세가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명동성당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신자 수가 79년 1백24만6천여 명에서 97년 3백67만6천여 명으로 3배 가까이 늘어난 가장 큰 배경으로는, 70년대 이후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전개해온 가톨릭의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사회 참여가 꼽힌다. 유신 체제와 군사 정권 시기에 부도덕한 정권에 맞서면서 가톨릭은 깨끗하고 정의로운 이미지로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명동성당이 있었다.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한국 가톨릭이 30년 가까이 겨레의 아픔을 함께해 왔지만, 한국 근·현대사가 전개되는 동안 부끄러운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일제의 수탈이 기승을 부릴 때 이른바 ‘성속이원론’ ‘정교분리론’을 강조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가르침을 받은 한국 천주교회는 민족의 참상을 외면했고, 심지어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살인 행위’라고 규정하고 ‘그런 살인자가 천주교 신자일 수는 없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신학교 학생들을 퇴학시켰는가 하면, 항일운동가 안명근은 두 외국 신부의 밀고로 투옥되기도 했다.

지학순 주교 구속 후 정의구현사제단 탄생

명동성당이 이 땅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나아가 불의에 항거하는 메카로 탈바꿈한 것은 70년대 들어서였다. 명동성당이 한국 천주교의 중심이라는 종교적 상징에서 민주화의 성지라는 사회적 상징으로 거듭난 결정적 계기는 74년 7월에 발생한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이었다. 지주교는 시인 김지하에게 돈을 주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로 연행되기 직전인 7월23일 명동성당에서 ‘양심선언’을 했다. 이후 숱하게 쏟아져 나온 양심선언의 효시였다. ‘정의를 위해 죽음을 각오했다’고 천명한 지주교가 구속된 이후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도회가 잇따랐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단체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사제들의 모임인 사제단이 탄생하고, 한국 가톨릭이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대응하게 된 배경은 65∼68년 로마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다. 20세기의 세계사적 사건이라 불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목헌장의 첫머리에서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 것은 신앙인의 책무다. 시대와 무관한 삶이 불가능하듯 시대와 무관한 신앙인은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가톨릭 성직자·신자 들로 하여금 현실 문제에 적극 개입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외부에서 온 명령이었다면, 68년 서울대교구장, 69년 추기경에 서임된 김수환 추기경의 현실 문제에 대한 ‘예언자적 관심’은 내부에서 이루어진 명령이었다. 김추기경은 68년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서울대교구장 취임식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라고 강조함으로써 한국 가톨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새롭게 제시했다. <시사저널>이 해마다 조사해 발표하는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에 김추기경이 언제나 상위에 오르는 이유는, 사회 정의와 인권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한국 사회에 미친 폭넓은 영향력 덕분이었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명동성당과 ‘동격’으로 평가되는 김추기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주교 구속 사건으로 현실에 비로소 눈을 뜬 한국 가톨릭은 사제단을 중심으로,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전국적인 활동을 펼쳐 왔다. “우리는 사제적 우정과 신앙적 결속으로 지역과 교구를 뛰어넘어 하나가 되었으며, 우리가 가야 할 곳이나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겁없이 뛰어들었다”라고 함세웅 신부는 말했다.

유신 정권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저항이라고 평가되는 76년 ‘3·1 명동사건’을 통해 명동성당은 민주 항쟁의 구심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80년대 들어 명동성당은 항쟁의 구심점일 뿐 아니라, 재갈 물린 언론을 대신해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는 언로 구실도 담당해냈다. 80년 광주에서 탈출한 김성용 신부에 의해 광주항쟁의 참상이 명동성당에서 처음 국민에게 전해졌으며, ‘땡전 뉴스’만 존재하던 86년에는 보도지침의 실상이 명동성당에서 폭로되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때는 공권력에 침범당하기도

87년 6월 명동성당은 항쟁의 기폭제이자 근거지였다. 5·18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군의 고문 치사 사건이 은폐·조작되었음을 폭로한 데 이어, 6월10일에는 경찰의 진압을 피해 성당 구내로 뛰어든 시위 학생들을 보호함으로써 항쟁의 불길을 이어갔다. 당시 김추기경은 ‘경찰이 진압하러 들어오면 내가 맨 앞에 나가 밟히겠다’고 선언해 군사 정권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쫓기는 자들의 피난처로 탈바꿈하면서 명동성당에도 작지 않은 상처가 뒤따랐다. 88년 성당 구내 교육관에서 당시 서울대생이던 조성만군이 ‘조국 통일’과 ‘양심수 석방’을 외치며 투신 자살했는가 하면, 95년 6월 6∼7일에는 한국통신 사태와 관련해, 군사 정권 아래서도 벌어지지 않았던 공권력 투입이 김영삼 정부에 의해 자행되기도 했다. ‘법 집행에는 성역이 없다’는 논리로 사상 처음 성역을 침범한 사건을 두고 김수환 추기경은 특별 미사 강론에서 성역의 의미를 이렇게 밝혔다. “명동성당이 성역이 된 것은 교회의 오랜 전통과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사회 정의를 추구한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적 힘 때문이었다. 정부의 공권력 투입은 공간적 의미의 성역을 침범한 것이 아니라, 이 자리를 사람들에게 피난처로 여기게 했던 도덕적인 힘, 바로 그것을 짓밟은 것이다.”

90년대 들어서도 ‘안전하게 농성할 수 있는 장소’로 각광받은 명동성당은 최근 들어 집단 이기주의·지역 이기주의의 농성장으로 변질되는 면모도 드물게나마 보이고 있다. 대성당 창문을 파손하는 등 피난처를 찾은 이들이 점잖지 못한 행동을 해서 신자들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시대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피난처의 모습도 점차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만 해도 길게는 6개월이나 지속된 농성이 62회나 벌어졌다. 그러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은 지금, 명동성당은 21세기의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는 ‘새로운 성지’로 거듭날 채비를 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문화 공간으로 다가가는 등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66쪽 상자 기사 참조).

1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로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회의 숨통 구실을 해왔다. 명동성당은 이제 가톨릭 신자들의 성전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성전으로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고 있다. 명동성당 축성 100주년 행사는 5월29일 11시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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