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색 창연’ 벗고 변신 꾀하는 ‘종친회’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5.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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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50여 중앙 종친회 활동 활발…현대에 적응 안간힘, 미래는 밝지 않아
전통 사회에서 큰 위력을 떨쳤던 ‘종친회’를 봉건 잔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재 서울을 무대로 삼아 대규모 중앙 종친회 조직 2백50여 개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소 의외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도 산업 사회 속에서 일부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다. 김해 김씨나 전주 이씨, 밀양 박씨, 해주 정씨처럼 인구가 많은 성씨는 서울에 종친회 자체 빌딩과 전국적으로 수백 개 지부·지회를 두어 거대 공룡처럼 움직인다. 비교적 씨족 수가 적은 다른 성씨들도 거의 전국 단위의 동성동본을 포괄하는 중앙 종친회를 갖고 있다.

서울에 각 성씨 종친회의 대규모 조직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때는 인간이 달나라에 첫발을 디딘 68년께부터였다.

시대적 조건으로는 교통·통신 수단의 발달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자양분은 산업 사회로까지 이어져 내려온 한국인의 뿌리 깊은 혈연 의식이다. 여기에 경제가 발전하면서 과거 어려웠던 시기에 다소 뒷전으로 미루어 두었던 조상을 돌볼 수 있는 생활상의 여유가 생긴 것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물론 요즘의 종친회는 옛날에 비해 그 성격과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 원래 종친회란 왕조의 방계 후손만이 칭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반면 왕실 후손 이외의 사대부 가문은 종친회 대신 화수회라 불렀다. 이런 구별이 사라진 때는 조선왕조가 붕괴된 일제 때부터였다. 왕실이 사라지자 모든 성씨가 종족 모임을 종친회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않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일족이 쉽게 모일 수 없었기 때문에 지역별 모임인 ‘파종회’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던 것이 현재와 같은 전국 단위 종친회로 규모가 커진 때는 60년대 후반이다.

대부분의 성씨는 67년부터 90년대까지 중앙 종친회를 결성했다. 이때부터 중앙 종친회 결성 붐이 일기 시작한 원인에 대해 이광규 교수(서울대·인류학)는 “현대적 의미의 종친회가 68년 이후에 집중적으로 출현한 것은 이때를 기점으로 전쟁의 상처가 거의 치료됐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 3공화국이 국민 통치 이데올로기로 조상 숭배 의식을 조장한 측면도 부인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어쨌든 서울에서 속속 결성된 각 성씨 중앙 종친회는 산업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 속에 철저한 기능주의적 활동을 폈다. 대부분의 종친회는 숭조(崇祖) 육영(育英) 돈종(惇宗) 위선(爲先) 등을 종시(宗是)로 내걸고 족보 발간 및 선조 유적지 성역화를 기본 사업으로 벌였다. 아울러 순한글로 된 성씨의 역사서와 인물지를 발간하거나 친족 집단의 공동 복리 활동도 폈다. 회관 건립과 장학 사업, 공원 묘지 조성, 신년 하례, 불우 친족 돕기가 그런 예에 속한다.
왜곡된 조상의 역사 바로잡기 열심

특히 과거 왕족을 배출한 성씨 가운데는 이후 역사가 당대를 왜곡·폄하했다며 연구를 통해 재조명 작업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가락중앙종친회와 횡성고씨종친회(고구려 왕족 후손), 개성왕씨종친회(고려 왕족 후손) 등이 그렇다.

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인천 이씨·김해 허씨의 연합 종친회로 67년에 결성됐다. 서울 마포구 신공덕동에 5층 빌딩을 소유하고, 1층을 종친회 사무실 및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으로 쓰며 나머지는 임대해 수익 사업도 한다. 이곳에서 역점 사업으로 펼치는 것이 가야문화 발굴·연구 작업이다. 연구진은 서울대 노태동 교수를 중심으로 전문가 42명이 참여하는데, 종친회가 이들에게 논문 한 편당 4백만원씩 연구 자금을 지원한다.

이 연구원은 또 부산대 정징원 박물관장(고고학)을 팀장으로 해 가야 문화 발원지인 김해 지역을 발굴하고 있다. 90년부터 연간 5백평씩 발굴해 유물들을 찾아냈는데 종친회가 매년 1억원씩 발굴 자금을 대고 있다. 유적 발굴에 드는 비용은 정부도 그간 절반 가량을 부담해 왔다. 가락종친회는 그동안의 연구 및 발굴 결과를 개정하는 역사 교과서에 새로 추가하기로 국사편찬위원회측과 합의했다고 한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의 후손인 횡성고씨종친회도 역사 바로잡기에 열성적이다. 횡성 고씨 종친회장이자 종손인 고복길씨는 “고려 때 고구려 부흥 운동을 벌인 안승은 보장왕의 넷째 아들 고안승인데, 고교 국사 교과서 상권 43쪽에 ‘안승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은 한성을 중심으로 고구려 복권 운동을 폈다’고 기록해 마치 안씨 성을 가진 승이라는 사람인 것처럼 엉뚱하게 해석되고 있다. 종친회를 중심으로 교육부에 ‘고안승 성 회복 진정서’를 냈다”고 한다. 그 결과 고씨는 최근 교육부로부터 교과서를 개정하겠다는 답신을 받아냈다.

횡성 고씨는 최근 고구려연구소장 서길수 교수(서경대·경제학)의 소개로 장수왕의 후손인 중국 요양 고씨들을 만나 같은 뿌리인 횡성 고씨 시조 묘(중국 흑룡강성 고려방진 소재)에 제향하고 족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고려 왕족 후손인 개성왕씨종친회는 조선 왕조에 의해 고려사가 상당 부분 왜곡·축소됐다는 인식 아래 고려사를 재편찬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고려 왕실의 역대 임금과 명신들을 기린 숭의전(崇義殿) 역사를 집대성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각 성씨 중앙 종친회가 일상적으로 벌이는 사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족보 편찬이다. 전통적으로 족보는 지역별 파종회가 따로 발간해 왔으나 전국 규모의 중앙 종친회가 결성된 이후에는 시조부터 모든 후손을 망라하는 대동보 발간을 시작하게 됐다.
영상 족보 등장, 여성·청소년도 제례 참석

종친회가 산업 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은 족보의 내용과 형식을 변화시킨 데서도 잘 나타난다. 80년대 이후 발간된 모든 성씨의 족보는 한글 표기와 여성(출가한 딸)·사위·외손까지 집어넣는 것이 일반화됐다. 더 나아가 희망자에게는 족보에 인물 컬러 사진도 넣어준다.

최근에는 영상 족보도 등장했다. 한산이씨종친회는 93년 족보를 비디오 필름에 담아 보급했다. 1백30분짜리 비디오에 담긴 내용은 한산 이씨 조상들의 역사와 터전, 후손과 인물 설명 등인데 컴퓨터 그래픽과 삽화까지 넣어 만들었다. 최근에 영상 족보를 제작한 가락종친회 김시우 사무총장은 이런 추세에 대해 “예도 시속에 따라 바뀐다는 말이 있듯이 종사(宗事)도 현 산업 사회에 전향적으로 맞춰야 한다는 것이 각 종친회의 일반적 인식이다. 옛날 법도만 내세워 문벌을 자랑하는 종친회라면 해산해야 한다고 본다”고 밝힌다.

변화는 족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종친회가 제문·축문을 과거의 한문 대신 순 우리말로 적고 있으며, 예복 없이도 제례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종친회 활동에 여성(부녀자)과 청소년을 참여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기도 하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전국적으로 청년부와 여성부를 조직해 선조 유적지 참배와 예절 교육을 한다. 이밖에도 안동 권씨나 밀양 박씨 종친회 등 대부분의 종친회는 방학을 이용해 중고생과 대학생을 모아 선조 유적지를 순례한다.

장학 사업도 연수 교육 못지 않게 중요한 분야이다. 종친회는 이를 통해 정체성 확인과 문중 인재 육성이라는 목적을 추구한다. 하동정씨종친회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 회장이 낸 9억원과 그밖의 출연금 1억원을 합해 10억원으로 장학회를 운영하는데, 학기마다 90여 장학생(대학생)에게 백만원씩 지급하고 있다.

안동권씨중앙종친회는 72년부터 법인체로 능동장학회를 설립해 매년 20명의 등록금 전액을 대고 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도 3억원의 기금으로 매년 26명에게 혜택을 준다. 이런 장학 사업은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대부분의 종친회가 주요한 종사(宗事)로 삼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층을 상대로 한 각 종친회의 연수 교육이나 장학금 지급이 실제 종친회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이공재 사무총장은 “후손으로서 뿌리 의식과 자긍심을 가지고 산업 사회에서 개성 있게 살아가라는 뜻이지 당장 뭔가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10, 20대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장 그들에게 종친회에 참여하라는 것이 아니라 훗날 40, 50대가 됐을 때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자는 데 뜻이 있다”고 설명한다.

종친회의 숭조 사업과 순례 교육, 장학금 지급, 그리고 일상 경비를 충당하려면 적잖은 예산이 필요하므로 각 종친회는 다양한 수입원을 갖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위토와 사패지이다. 위토란 제를 모시는 데 드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문중이 마련한 전답이고, 사패지는 과거 왕실에 내린 토지로 문중이 관리한다. 또 중앙 종친회의 경우 서울에 자체 건물을 갖고 임대료를 받는 곳도 있다.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위토나 사패지가 많은 종친회는 살림살이가 풍족하다. 그러나 씨족의 숫자나 상속 재산이 적은 종친회는 재정이 쪼들리기 마련이다. 김해 김씨·전주 이씨·하동 정씨·밀양 박씨 등 인구가 많은 종친회는 건물 수익 외에도 고문·이사 등 임원들이 내는 회비가 적지 않다. 가락종친회의 경우 고문으로 있는 김대중·김종필 씨를 포함해 각계 인사 1백60여 명이 적잖은 후원금을 내고 있으며 하동정씨종친회도 사실상 정주영씨가 큰 배경이다.
종친회 존립 흔드는 5대 과제

이에 비해 고령박씨대종회는 별다른 큰 수입원이 없어 애를 태우는 경우이다. 대종회 박용명 상무는 “중시조인 영성군(암행어사 박문수)을 기리기 위해 천안 군청이 20평짜리 사당을 지어줬지만 진열대와 통풍 시설을 종친회가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종친회 재정이 어려워 준공식도 못하는 처지이다”라고 말한다. 요즘의 종친회에도 세력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각 성씨별 중앙 종친회가 생겨나고, 앞다퉈 산업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벌여 왔지만 앞으로의 종친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무엇보다도 젊은층의 무관심이 갈수록 심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도 호주를 상속할 수 있게 한 가족법 개정이라든지 사후 양자제와 유언 양자제가 폐지된 점, 그리고 젊은 부모를 중심으로 급속히 늘어난 한글 이름짓기 풍조 등은 종친회의 존립 기반을 흔드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중앙 종친회 관계자들은 상황이 어렵기는 하지만 가통 승계와 조상 숭배 정신이 한국인의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종친회는 계속 존립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안동권씨중앙종친회 권오기 총무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선조의 음덕을 기리는 뿌리 찾기 사상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종친회 활동의 주된 목적이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염치 의식이기 때문에 건전한 국민 정신에도 도움이 된다. 지금도 전국 곳곳의 산에는 조상의 묘를 치장하고 중수하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이런 전통이 쉽게 없어지겠는가”라고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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