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놀이에도 계급성이 있었네
  • 魯順同 기자 ()
  • 승인 2000.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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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 매화 감상하며 봄맞이… 서민·부녀자들, 화전놀이 즐겨
‘꽃놀이에도 계급성이 있었다. 양반들이 가장 즐겨 찾은 꽃은 매화였고, 서민들은 상징성에 집착하기보다는 지천에 널린 개나리와 진달래, 제비꽃에 흥겨운 마음을 실었다.

선비들의 봄맞이는, 가지에 얹힌 눈을 털어내며 피는 매화를 찾아 나서는 심매(尋梅) 혹은 탐매행(探梅行)으로 시작되었다. 매화를 사랑한 매월당 김시습은 <탐매>라는 제목의 시를 14편이나 남겼을 정도. 선비의 탐매행은, 심사정의 <파교심매도에 드러나 있듯이 눈덮인 산길이어야 제격이었다.

산과 들에 꽃이 흐드러지면 본격적인 상춘(賞春)이 시작되었다. 꽃놀이는, 화류(花柳)놀이·화노리·화류유(花柳遊)·꽃다림·화전(花煎)놀이 등으로 불렸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화류놀이는 삼짇날 답청(踏靑)의 흔적이다. 중국 당에서 유래한 봄 풍속인 답청은, 3월3일에 새로 돋아난 푸른 풀을 밟고 꽃놀이를 하는 것으로, 9월9일 산에 올라 경치를 완상하는 가을철 등고(登高)와 짝을 이루었다. 묵객들의 화전놀이에는 꽃과 술뿐 아니라 시를 곁들이기 마련이었다. 서당에서는 두견주와 화전을 준비해 학동들을 들로 이끌었다. 꽃을 보며 시를 짓는 것으로 개접(開接:시짓는 수업을 시작하는 것)했다고 하니, 춘계 개학식치고는 운치가 있었던 셈이다.

화전놀이는 부녀자의 해방 공간

화전놀이 가운데 가장 요란스럽고 흥겨웠던 것은 아무래도 부녀자들의 꽃놀이다. 시집살이 굴레에서 벗어나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 즐길 수 있는 공식 나들이였기 때문이다. 어찌나 꽃놀이가 성행했던지, 조선 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사대부가 여인이 산이나 내를 찾아 놀이를 벌일 경우 장(杖) 100대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을 정도였다. <꽃으로 보는 한국 문화>를 쓴 이상희씨는 ‘신분이 귀할수록 외출이 어려운 풍토였지만, 화전놀이에 관한 한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라고 지적한다.

상춘의 흥겨움은 시인 묵객의 몫만은 아니었다. 지역마다 구전되는 <화전가>에는 여염집 여인의 흥취가 잘 드러난다. ‘놀음 중에 좋은 것은 화전밖에 또 있는가. 단오명절 좋다 해도 꽃이 없어 아니 좋고 추석 명절 좋다 해도 단풍들이 낙엽지니 마음 슬퍼 아니 좋고 놀이 중에 좋은 것은 꽃이 피고 잎이 피는 화전놀이 제일이라(청송군 진보면에 내려오는 <화전가>)’. 여인들의 놀이라고 해도 술이 빠지지 않았다. 상주·벌주를 빙자해 청탁을 가리지 않고 마셨다. 이긴 편에 떡을 상으로 주고, 진 편은 이긴 편에 절하고 노래를 부르는 놀이도 있다. 이 때 화전은, 미리 만들어 가기도 하지만 들에서 진달래 꽃잎을 따서 바로 부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은 그 곁에서 꽃싸움을 하며 놀았다. 제비꽃·진달래꽃이 주로 사용되었다. 제비꽃싸움은, 갈고리처럼 생긴 꽃을 서로 걸어 잡아당기는 것이었으며, 진달래꽃싸움은 꽃술로 싸움을 걸었다. 이때 붉은 암술이 흰 수술보다 질기기 때문에 반드시 같은 꽃술로 시합해야 한다. 그래서 한용운의 <꽃싸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던 꽃싸움 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중략)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수염을 가지고 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하략)

굳이 작정하고 찾아 나서지 않아도, 늘 곁에서 피고 지는 꽃이기에 기쁘고 쓰린 마음을 이처럼 정감 있게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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