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20주년, 변화하는 베트남
  • 卞昌燮 기자 ()
  • 승인 1995.04.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적과의 동침’ 통해 대변혁 박차…한·미, 베트남전 재조명해야
총선이 실시되지 못한 데 대해서는 미국과 당시 월맹측의 해석이 다르다. 다만 당시의 국제 질서를 살펴보면, 미국이 총선을 실시하지 않는 쪽으로 몰고갈 만한 몇 가지 요인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49년 중국 본토가 공산화한 데 이어 한국전쟁을 치른 미국은 반공 이념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다. 특히 47년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한 미국은, 베트남 민족의 투쟁을 독립 투쟁이라기보다는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으로 판단했다. 투쟁의 선두에 선 사람이 공산주의자 호치민이었기 때문이다.

사이공 함락으로 통일 베트남에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 혁명 1세대들은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89년 캄보디아를 침공하는 등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다. 이들은 85년까지 2차에 걸친 경제 계획을 단행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유 재산 몰수와 철저한 배급제 실시 등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베트남은 물가 상승률이 연 평균 9백%대에 이르고 1인당 GNP가 1백25달러에 머물러 세계 최빈국 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베트남이 전쟁의 상처를 딛고 경제 발전의 기초를 마련한 것은 86년 12월 제6차 당대회에서 개혁파인 구엔 반 린이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면서부터다. 그는 이른바 ‘도이 모이’(개혁)를 채택했다. 87년에는 외국인 투자법을 제정하는 한편 개인 사업을 허용하고 생산성에 따른 보상을 약속하는 등 구미식 시장 경제 요소를 적극 수용했다. 그 결과 87년부터 물가 상승률은 연 평균 30%대로 떨어졌고 경제 성장률은 연 평균 5~6%를 기록했다. 현재 베트남에는 현대와 삼성 등 한국 기업을 포함해 외국 기업 8백여 개가 진출해 있다.

개혁파 서기장 구엔 반 린의 뒤를 이어 베트남 경제 개혁을 주도하는 사람이 도 무오이 서기장이다. 그는 91년에 시작돼 올 연말에 끝나게 되어 있는 제5차 경제개발계획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한국의 경제 발전에 특히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정한 화해 필요

미국은 엄청난 인적·물적 희생을 치러가며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으려다 실패해 베트남은 공산국가가 됐다. 공산화한 바로 그 나라가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는 등 ‘탈공산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요소를 과감히 도입하고 있는 베트남은 오는 7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에 정식으로 가입한다. 67년 공산주의 월맹에 대한 위협 때문에 생긴 이 지역 안보기구가 마침내 어제의 위협 당사국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상징성이 크다. 그만큼 베트남전쟁으로 등을 돌렸던 이웃 나라들도 어제의 상처를 묻은 채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베트남전쟁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진정한 화해가 그것이다. 베트남 정부는 그 ‘과거’를 현재로서는 덮어두려 하는 것 같다. 7천만 국민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이기에, 과거 문제와 같은 정치성 이슈를 미국이나 한국 등 관련 당사국들에게 제기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런 때에 미국의 맥나라마 전 국방장관이 회고록을 통해 과거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며 미국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에서 숱한 부상자를 내고 5만8천 병력을 잃은 미국 정부는 베트남과 대사급 수교 협상을 벌이고 있는 지금도 베트남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베트남과 이미 수교한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종전 20주년을 맞은 올해 진정한 의미의 베트남전쟁 재조명 작업은, 베트남전에 대한 관련 당사국의 솔직한 재평가부터 시작돼야 할 것 같다. 베트남의 최고 실권자인 도 무오이 공산당 서기장이 ‘세일즈 정치인’으로 변신해 서울을 방문중이던 4월12일, 워싱턴으로부터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 외신을 타고 전해졌다. 그 내용은, 60년대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내며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결정에 깊숙이 간여한 로버트 S. 맥나마라씨(79)가 마침내 입을 열어 “당시 미국 정부의 참전 결정은 중대한 실수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20~21쪽 참조).

국방장관 시절 ‘살인자’ ‘전범’이라는 비난을 듣다가 67년 반전 논리를 폈고 68년 해임된 뒤에는 ‘반전 운동가’ 소리를 듣기도 한 그는, 베트남전에 관한 한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그런 그가 4월30일 베트남전 종전 20주년을 앞두고 당시 미국 정부의 참전 결정이 잘못됐다는 것을 처음 인정했다. 이는 연인원 31만명의 병력을 파견했던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참전을 사과해야 하는가

남베트남(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북베트남(월맹)군에 함락된 75년 4월30일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세상은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전의 이념적 원인이기도 했던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으로 점철됐던 냉전체제가 막을 내렸다. 올해 초 세계무역기구(WTO)가 정식으로 출범한 데서 알 수 있듯이, 21세기를 눈앞에 둔 현재 국제 질서는 통상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때 남베트남 쪽에 섰던 한국은 어제의 ‘적’인 베트남과 92년 12월 수교했다. 베트남전 패전국인 미국도 94년 초 베트남에 대한 금수 조처를 해제한 데 이어 대사급 관계로 복원하기 위한 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경제가 정치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신통상 시대’를 맞아 어제의 적들이 국익을 앞세워 다시 손잡기 시작한 것이다.

변한 것은 베트남을 둘러싼 국제 질서뿐만이 아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사회주의 나라 베트남이 지난날의 이념 족쇄를 벗어던지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도이 모이’(개혁) 정책을 통해 구미식 시장 경제의 장점을 수용하고 있다. 그같은 개혁의 선두에 선 사람이 도 무오이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다.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과 같은 혁명 세대인 도 무오이 서기장은 1주일 동안 한국에 머무르면서 주요 산업 시설을 돌아보고 경제계 인사들을 만나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썼다. 김영삼 대통령과 가진 회담에서 그가 꺼낸 주요 화제도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투자 문제였다. 그가 김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베트남전 참전에 관해 언급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를 수행한 구엔 만 컴 베트남 외무장관은 한국 기자들에게 “과거를 뒤로 미루고 현재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다”라고 넌지시 과거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말한 ‘과거’란 베트남인만 1백90만명의 사망자와 4백50만명의 부상자, 9백만명의 난민을 낳게 한 베트남전쟁을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과거’를 보는 관련 당사국들의 시각이다. 베트남을 둘러싼 국제 질서가 변하고 있고, 베트남이 변하고 있지만, 정작 베트남전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직 지난날 미국 중심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진보적 학자들을 중심으로 베트남전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지만, 정작 미국이나 한국 등 관련 당사국들의 재조명 노력은 아직 미미하다. 특히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64~73년 군대를 파견했던 한국 정부는 물론 한국 국민 가운데 많은 사람이 베트남전을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인 월맹군이 반공주의 국가인 월남을 침략한 전쟁’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94년 5월 하순 베트남을 방문했던 당시 한승주 외무부장관이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과 관련한 사과성 발언을 서울에서 부인하는 소동이 벌어진 것도, 베트남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시각이 변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장관은 당시 레 둑 안 베트남 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두 나라 사이에는 상처가 있었다”며 간접적으로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한국 정부는 지금도 베트남 참전이 ‘반공과 민주주의 수호’ 차원에서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56년부터 시작된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

흔히 스페인 내전(1936~1939)과 함께 베트남전쟁은 ‘20세기 인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 표현될 정도로 성격과 역사적 배경이 복잡하다. 따라서 단순히 ‘월맹군이 월남을 침략한 전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이 전쟁의 진실과 거리가 먼 논리라는 지적이 있다. 베트남전쟁에는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라는 이분법적 요인말고도 민족주의·식민주의·독립투쟁·통일·억압·혁명·선입관 등을 포함한 온갖 갈등 요인이 한데 뒤섞여 있다. 50년대 초에 소련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조지 케넌은 66년 2월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가 개최한 베트남 문제에 관한 공청회에서 “베트남전쟁은 지극히 복잡하고 지극히 긴 역사적 배경을 지녔으며, 그 대부분은 남베트남 내부에서 일어난 사태에 원인을 두고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베트남전쟁의 뿌리는 미군이 직접 개입한 64년이 아니라 베트남 민족이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 투쟁을 벌이던 46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45년 연합국의 승리로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지금의 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을 구성하고 있는 옛 프랑스령)에서 철수하자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삼기 위해 군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독립 지도자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민족은, 54년 7월 제네바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8년에 걸쳐 항불(抗佛) 독립 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갈라졌다. 국토는 갈라졌어도 베트남 민족은 협정 체결 2년 뒤인 56년 7월 남북 베트남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정부를 세워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총선 실시일이 다가오면서 베트남 주민의 80%가 공산주의자인 호치민에게 표를 던질 것이 확실해지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56년 미국에 망명중인 고 딘 디엠을 남베트남에 보내 총선을 거부하게 했다. 미국과의 전쟁은 바로 이 때부터 실질적으로 시작돼 사이공이 함락된 75년 4월30일 끝났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