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견인차의 태생적 한계
  • 宋 俊 기자 ()
  • 승인 1998.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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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속 ‘한국형’, 독립·엄정성 확보에 한계…“감찰·사정보다 회계 검사 주력해야”
환란 특감으로 발화한 거짓말 파동은 한국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거짓말이 버젓이 횡행하는 세태도 기가 찰 노릇이지만, 더 답답한 것은 핵심을 놓치고 지엽적인 시시비비에 온 나라가 매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환란 책임을 무겁게 물리려고 ‘직무 유기’ 혐의를 찾다 보니 IMF행을 알았느니 몰랐느니 말싸움이 벌어진 형국인데, 어쨌든 망국을 부른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해 11월19일의 기자회견이었다. IMF행을 발표하기로 한 자리에서 ‘IMF로 갈 필요가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국가 신인도가 급락했고, 그로 인해 환율 인상의 악순환이 빚어져 천문학적 수치의 환차손이 발생한 것이다.

왜 하필 김영삼 대통령은 운명의 날 아침에 중대 발표를 앞두고 강경식씨를 경질하고 임창렬씨를 부총리로 선임했는가. 임씨는 무슨 근거로 IMF에 갈 필요가 없다고 발표했는가. 그는 왜 중대 발표에 앞서 대통령의 견해를 묻지 않았는가. 법적 책임과 무관할지 모르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진실성 여부가 국민의 의혹을 풀어 주는 유력한 열쇠였다.

“감사원은 암행어사가 아니다”

이 질문이 감사원의 환란 특감에서 빠져 있었다. 감사원은 또한 환란 당시 총리였던 고 건씨를 감사 대상에서 아예 제외했다. 그런데 환란 책임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여당 후보로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이 과정에서 감사원은 ‘봐주기 감사를 했다’는 구설에 휘말렸다. 알리바이로 보면 감사원은 억울하다. 외환 특감이 열린 시점은 1월30일∼3월7일. 당시는 두 사람이 여당 후보로 나서기 훨씬 전이었다.

그럼에도 감사원을 향한 질책이 가시지 않는 까닭은, 감사원이 정치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지적이 바로 감사원의 기형성 문제다. 전문가에 따르면, 감사원은 태생적으로 불구다. 대통령 직속이라는 헌법 조항 때문이다. 48년 처음 헌법이 생길 때부터 지금까지 감사원은 행정부 수장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구조를 덮어두는 한 이번 사태에 대해 아무리 감사원을 매질해도 해답이 나올 수 없다.

왜 그런가. 감사원이 대통령 직속이어서 무엇이 나쁘다는 말인가. 박영희 교수(건국대·행정학)는 “예컨대 대통령의 친동생이 이끌던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비리를 감사원이 어떻게 적발할 수 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군사 독재는 감사에 성역을 만들었다. 17대 감사원장 가운데 9대(중임 기간 포함)가 군인·국보위 출신이었다.

93년 이회창 감사원장 때부터 감사원의 위상이 현저히 높아졌다. 헌법상 독립을 보장받은 감사원장이 국무회의에까지 ‘끌려 나가는’ 관행을 혁파했고, 계좌를 추적해 공직자 비리를 폭넓게 감사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그래도 바뀌지 않는 게 있다. 열심히 감사해 행정 비리를 잔뜩 적발하면 정권의 이미지가 나쁘게 비칠 테니 행정부 수장이 이를 즐거워할 리가 있겠는가. 어차피 대통령과 감사원은 불가근의 관계인 것이다.”(김명수 한국외국어대 교수·행정학).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감사의 엄정성을 확보하려는 각국의 노력은 기발한 제도들을 낳았다. 미국·영국처럼 의회 소속형도 있고, 독일·대만처럼 완전 독립형도 있다(65쪽 기사 참조). 감사원장을 뽑는 방식도 다채롭다. 의회가 정한 사람을 대통령(국왕·총리)이 임명하는 방식이 가장 흔하다. 이스라엘은 감사원장을 뽑기 위해 따로 소집한 국회에서 비밀 선거로 선출한다. 헝가리 역시 의회에서 선출하는데, 감사원장 후보에 대한 인사 청문회를 개최한다.

대통령에 직속된 감사원의 장을 대통령이 정하고 국회가 동의하는 한국의 방식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때문에 여당인 국민회의도 야당 시절에는 감사원을 의회에 소속시켜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것이다.

기형적인 위상 못지않게 감사원 역할에 대한 인식의 혼란 또한 심각하다. 박영희 교수에 따르면, 감사원의 시원은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예혁명의 핵심은 권리장전을 제정해 의회가 조세권을 장악한 데 있다. 국왕과 의회가 조세권을 놓고 힘을 겨루어 온 과정이 바로 의회 정치의 역사다. 조세권은 이후 2백여 년에 걸쳐 △예산 편성(정부) △의결(국회) △집행(정부) △회계 검사(감사원)라는 네 과정으로 진화했다.

어렵사리 완성된 감사 제도는 프랑스·미국 등을 거치면서 각 나라의 특색에 맞게 전세계로 전파되었다. 현대적 감사는 국민의 혈세가 한 방울이라도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방비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단순히 비리를 막는 차원이 아니라, 얼마나 효과적이고 경제적으로 예산이 집행되는가를 밝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감사 제도는 세계 추세와 상당한 거리가 있는 셈이다. 예산 의결과 감사 어느 것도 정부의 전횡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는 형편이다.

80년대부터 감사 제도에 천착해 온 이성춘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초기 헌법학자들이 감사 개념을 혼동했다. 사헌부·사간원·암행어사에 감사 개념을 접목시킨 탓이다. 암행어사 식의 인식이 오히려 감사를 망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헌부·사간원은 사법부에 해당하며, 암행어사는 청와대 사정실에 가깝다. 전제 군주가 민심을 달래려고 가끔씩 탐관오리를 혼내 주던 미봉책이 지금껏 유효하다는 사실은, 현대 감사 추세에 견주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탐관오리에 비해 어사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까지도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감사 결과 평가·감시하는 기구 필요

일반 국민이 감사원을 대하는 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감사원은 암행어사이자 신문고다. PC통신의 ‘열린 정부’ 마당 한구석에 ‘감사원 신문고’가 개설되어 있는데, 별의별 민원이 다 밀려든다. 재판에 져서 억울하다는 사례, 고스톱 국회의원 벌 주라는 당부, 감사원에 청원했다가 오히려 무거운 벌금을 받게 되어 억울하니 재심의해 달라는 호소에 이르기까지, 감사원의 역할과는 거리가 한참 먼 민원이 적지 않다. 감사 개념이 왜곡된 채 50년이 지나다 보니, 한국에서 감사는 감찰·사정으로 인식되는 정도가 되었다. “국민이 감사의 본 뜻을 모르게 된 것은 정부 책임이다. 정부가 언제 이를 알리려고 애쓴 적이 있는가”라고 김명수 교수(82∼97년 감사원 자문위원)는 지적한다.

물론 그 와중에 대통령의 그늘 아래서 양지를 지향해 온 감사원의 노력은 눈물겹다. 사안에 따라 청와대를 감사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감사 개념도 진일보했다. 90년대 중반부터 도입한 성과 감사 개념이 정착 단계에 들어섰다. 올해 초 발족한 국책사업감사단이 대표적인 예다. 사업 현장을 수시로 감사하여, 계획·설계·시공 어느 단계에서든 시정을 요구해 예산 누실을 막는 장치다. “감사원은 합법성 감사에 안주하지 않고 이른바 3E, 즉 효율성(efficiency)·효과성(effectiveness)·경제성(economy)을 중시하는 감사에 매진할 생각이다”라고 한승헌 감사원장 서리는 말했다.

‘열린 감사’ 개념도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각 분야 전문가 1백8명을 명예감사관으로 위촉해 제보 및 정책 건의를 감사 활동에 반영(명예감사관제:95년 시행)하고, 지역 주민에게 감사 일정을 알려 현장에서 직접 부당한 행정 처분·토착 비리·불편 사항 따위를 접수해 감사(공개감사제: 96년)하고, 시민단체·지방의회·주민 집단으로 하여금 감사를 청구하게 하여 감사 결과를 통보(감사청구제:96년)하는 방식 등이다. 민원실·188전화·PC통신을 통한 민원 감사도 지난해 만여 건에 이를 정도로 활발하다.

그런데 왜 이처럼 두드러진 변화가 좀체로 느껴지지 않을까. 무엇보다 감사원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감사원 총 인원은 8백22명(감사직 6백50명)인데 감사할 기관은 6만8천41개(1백66만1천3백25명)에 달한다(98년 1월1일 현재). “도 단위로 치면 3년에 한 번 감사하기도 힘들다. 10년에 한 번 감사한 곳이 있을 정도다”라고 한승헌 감사원장 서리는 밝혔다.

반대로 1천15개 기관(각 부처·자치단체·정부투자기관 등)에는 자체 감사요원이 6천1백70명 있다. 자체 감사요원의 감사 실적은 미미하다. 구조적 모순 때문이다. 백상기 교수(영남대·행정학)는 자체 감사요원을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64쪽 상자 기사 참조).

현행 감사원의 또 다른 한계는 해당 부처로 하여금 감사 결과를 집행케 하고 그 이행 정도를 평가·감시하는 전담 기구가 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감사원(GAO)의 감사 결과는 의회로 넘겨져, 상시 열리는 부문별 청문회에서 정책 담당자를 채근하므로 감사 내용을 집행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영국은 감사 결과 이행률이 95%를 웃돈다.

정책 평가할 고도의 시스템 갖춰야

한국 감사원은 감사 결과를 대통령(2주마다)과 국회(회기중 보고. 8월에 결산보고서 제출)에 보고하고, 범법 사실을 고발하거나 해당 부처에 감사 사항을 집행하라고 요구·권고·통보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감사원장(또는 사무총장)과 감사 담당자가 국회로 찾아가 감사 내역을 점검받는 의회 보고 방식은, 미국식 이행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성춘 논설위원은 “감사 결과는 최우선으로 국회에 전달돼야 한다. 정당 구분 없이 원하는 의원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열린 자료’ 성격이 중요하다. 감사위원회의 내용도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처럼 언론을 통해 감사 계획과 적발 결과를 보도하는 현실이라면, 공무원이 복지부동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라고 주장했다.

검찰에 고발한 사건이나 해당 부처에 대한 ‘요구’ 사항 이행률은 90%를 넘지만, 권고·통보에는 문제가 있다. 96년에는 권고 이행률이 61.9%, 통보 이행률이 81.2%에 불과했다. 전체 감사 결과 가운데서 권고·통보는 30% 안팎을 차지한다. 이행 실태 점검만이라도 의회가 담당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지난 4월22일 김대중 대통령은 삼청동 감사원 청사에서 업무 보고를 받았다. 한감사원장 서리와 김대통령은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사이이다. 감사원의 위상이 역대 어느 때보다 든든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감사원의 기형적 위상에 대한 우려는 가시지 않는다. “국가 차원에서 감사 시스템 전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의회 소속이든 단독 기관이든 감사원 독립은 최우선 과제다. 헌법 개정 문제를 포함해, 법률 개정·기구 조정 같은 과도기적 방안을 두루 검토하는 중·장기 자문(연구)위원회라도 띄워야 한다”라고 김명수 교수는 주장했다. “특히 현대 감사의 특징은 정책 프로그램 평가에 있다. 고도의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느냐 여부가 감사의 후진성을 탈피하는 관건이다.” 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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