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일그러진 性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6.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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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학교·사회에서 성교육 전무…교육 프로그램·상담기관 활성화 시급
광장은 없고 밀실만 있다. 청소년 성문제의 현주소다. 성인과 청소년, 청소년과 청소년, 그리고 성인들 사이에서도 성에 관한 공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광장이 성인(부모·학교)이라면, 밀실은 청소년(자녀·학생)일 것인데, 광장과 밀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성인 사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광장은 밀실로 일방 통행할 뿐이다.

광장에서 보고, 듣고, 읽고, 통신하는 청소년들은 밀실에서 브레이크 없는 욕망에 시동을 건다. 무한 질주. 광장 한구석에서 큰일났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만 들려온다. 대다수 성인들은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내 아이는 그럴 리 없어’, ‘내 아이만 괜찮으면 돼’라면서.

청소년의 성을 말할 때 문화라는 용어는 시기 상조다. 문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사라’들이 엄연한데, 공식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금기다. 한국 사회의 성문화는 이중성을 가장 큰 특질로 한다. 낮과 밤의 성이 다르고, 가정과 사회에서의 성이 다르다. 남성과 여성에게 적용되는 잣대가 판이하고, 세대간 격차까지 극심하다. 밤에는, 집 밖에서는 사라를 만나려고(소비하려고) 혈안이다. 하지만 낮에, 집안에서 사라는 ‘없다’고 말해진다.

성교육 교재·지도 능력 절대 부족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소년의 성 ‘문제’는 성인들의 일그러진 성 ‘문화’에서 기인한다. 윗물이 스스로 깨끗해지지 않는 한 아랫물의 문제는 결코 문화 수준으로 성숙하지 못한다. 청소년의 성문제가 그림자라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광원(光源)은 성인들의 성문화다. 성인 성문화의 광원은, 성을 매개로 성을 물질(수단)화하고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상품 논리와 남성·성기 중심주의 문화이다. 그리하여 성인과 청소년 둘 다 성에 노출, 아니 포위되어 있다.

‘가정의 달’이다. 이 달에는 어린이로부터 어버이, 스승을 기리는 날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어서, 가정과 학교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격동의 현대사를 헤쳐나온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가정과 학교 역시 건강하지 않다. 적응력과 유연성이 부족하다. 보호 받아야 마땅한 청소년이 억압과 피해를 받고 있다. 심지어는 방치되고 있다.

가정의 달을 맞아 곳곳에서 청소년 성문제를 주제로 한 조사 발표와 세미나가 열리고, 성 상담 센터들도 새로 문을 열고 있다. 지난 5월11일(토) 사단법인 한국여성민우회 부설 ‘가족과 성 상담소’(소장 양해경)는 개소 1주년 기념으로 ‘청소년의 성의식과 성문화--성폭력 예방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서울 종로성당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열린 가족, 건강한 사회, 바람직한 성문화를 이루기 위해 상담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 상담소는, 지난 4월 서울 시내 네 군데 인문계 고등학교 남학생 6백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4백87명(1학년 95명, 2학년 2백49명, 3학년 1백43명)이 응답한 조사 결과,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성에 대한 지식을 가장 많이 얻는 곳은 성인용 매체나 음란물(53.6%)이었다(<표 1>). 다음은 친구와 선후배(27.4%), 텔레비전·신문 등 대중 매체 (8.3%) 성교육 책자(4.6%) 순서였다. 선생님과 부모님에게서 성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고 답한 경우는 각각 1.0%, 0.2%로 나타나, 성교육에 관한 한 학교와 가정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올 가을 청소년 성교육 연구서를 펴낼 계획인 김성애 교사(서울 중앙여고)는 “교육부와 서울시 교육청이 발간한 성교육 자료가 있지만 너무 기본적이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재 개발이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위 설문 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 대부분이 학교와 가정의 성교육에 불만을 표시했다(92.5%)(<표2>). 그 까닭은 ‘다 아는 뻔한 이야기만 하기 때문’(34.7%)이었다(<표3>).
학교에서 성교육은 거의 없다. 사단법인 한국성폭력상담소가 펴내는 계간 <나눔터>는, 교사들이 성교육 교재 부족 다음으로 ‘지식 및 지도 능력 부족’을 어려움으로 꼽고 있다고 보고했다. 연구 조사에 따라 85~97%에 이르는 교사가 성교육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46%에 달하는 교사들이 대중 매체를 통해 독학으로 성지식을 얻는데, 학생들이 성지식을 습득하는 통로와 별 차이가 없다. 성에 관한 한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에 차별화가 불가능한 형편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최영애 소장은 성교육이 생리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학교 성교육이 여학생들에게는 순결 교육과 출산 과정을, 남학생들에게는 성병 예방을 가르치는 수준이라며, 학교 성교육이 보건학의 울타리를 벗어냐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눔터>는 ‘성교육이 성기(性器)나 성기(性技) 교육이 아니라 성과 관련하여 남녀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교육’이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선행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남성 클리닉 전문의나 신경정신과 전문의 들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이제 성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 이루어지는 건강한 대화여야 한다. 성교육도 단순한 성교육이 아니라 성적 의사 소통의 개념으로 새롭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 바람직한 성교육 목표는 ‘이성에 대한 이해를 도우면서 평등하고 자율적인 관계를 통해 능동적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남고생 10명 중 1명 이상이 성관계

가정으로 들어가 보자. 앞의 설문 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가정에서의 성교육은 학교보다 더 참담하다. 흔히 어머니와 딸 사이의 관계는 친밀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부정한다. 최영애 소장은 성을 부끄럽고 은밀한 것으로 생각하는 어머니 세대들이 하는 성교육은 생리에 관한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막 생리를 시작한 딸에게 어머니가 일러주는 말은 설명이나 충고가 아니다. ‘이제부터 몸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다. 최소장은 “생리를 시작한 딸에게는 이제 성숙한다는, 성인이 되어 간다는 기쁨과 자긍심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나 그 맨처음 순간, 딸은 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한다”라고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성교육은 그야말로 전무하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문제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의 몽정이나 자위 행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머니는 아들의 변화 앞에서 충격을 받는다. 성인이 되려는 아들을 ‘벌레 보듯이 하는’ 어머니가 대부분이다.

‘알 만한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춘기 청소년들이 보기에 학교 성교육이나, 성에 대한 부모의 어색한 태도는 당혹과 불신을 안겨준다. 앞의 설문 조사에서 ‘참기 어려운 성적 욕구를 느낄 때 어떤 행동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남자 고등학생들의 답을 보자. ‘그냥 참는다’가 22.2%, ‘운동이나 취미 활동을 한다’는 학생이 19.1%인 반면, ‘자위를 한다’가 26.4%였고, ‘음란 비디오나 서적을 본다’가 12.3%, 그리고 성관계를 한다고 답한 학생이 11.2%에 달했다. 10 명중 1명 이상이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미 청소년들에게 성은 분명한 현실인 것이다.

가족과 성 상담소 세미나에서 ‘청소년의 성의식과 성충동’을 발표한 김준기씨(‘마음과마음’ 정신과 클리닉 원장)는 ‘청소년기에 정상적이라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비정상이다’라고 한 정신분석학자 안나 프로이트(프로이트의 딸)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그러나 80%에 달하는 대다수 청소년이 이 시기의 어려움을 통과해 성장한다. 문제는 적응하지 못하는 나머지 20% 청소년들이다”라고 말했다. 김원장은 가정·학교와 지역 행정기관이 서로 협력해 다양한 치료 프로그램(개인 상담, 청소년 집단 치료, 가족 치료, 약물 교육, 성 상담, 위기 중재 등)을 개발해 부적응 청소년들을 인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소년 성문제는 그것이 성폭력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주목된다. 바른 성교육을 받지 못한 부적응 청소년들은 성에 대한 판단력이 거의 없다. 강간한 남자 청소년들은 여자가 반항하는데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으면 ‘비디오나 영화에 그렇게 나와서 여자는 으레 그러는 줄 알았다’라고 태연하게 답한다. 청소년 성폭력은, 그 충격을 스스로 소화하기 어려운 같은 또래 여자 청소년이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과, 가족·친인척·이웃 등 아는 사람에 의해 해를 입는 경우가 많아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가족과 성 상담소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여한 여성학자 윤양헌씨는, 성에 대한 이중 규범이 청소년 성폭력의 사회문화적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나라 성문화는 남자와 여자에 적용되는 성 규범이 다르다. 아직도 남자는 여자 관계가 복잡할수록 능력 있는 남자이고, 여자는 남자 관계가 복잡할 수록 더럽혀진 여자, 전과자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성문화에는 남성에 의한 강간적인 요소가 강하다. 성행위를 ‘따먹었다’라고 식욕에 빗대는 남성들, 성관계를 ‘당했다’ ‘빼앗겼다’ ‘줘버렸다’고 말하는 여성들 모두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윤씨는 말했다.

남성·성기 중심주의를 강화하는 성 담론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 없다’ ‘잠자리가 달라지면 아침 밥상이 달라진다’ 같은 경험칙이나, 드라마와 포르노그래피(위 상자 기사 참조) 광고에서도 남성·성기 중심주의는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YMCA 청소년상담실 이명화 실장에 따르면, 최근 성에 대한 청소년들의 고민은, 통계로는 나와 있지 않지만 동성애 문제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청소년 성문제의 심각성이나 그 변화 추세에 견주어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대응은 거의 없거나 매우 느리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신승철 박사(광혜의원)는 “성욕·소유욕·성취욕이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는 동인이다. 그러나 우리 가정과 학교는 소유욕과 성취욕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성문제는 방치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제 학교와 사회, 부모와 성인들이 나서야 할 때다. 청소년들이 지금 이대로 성인이 된다면, 성문제는 그 다음 세대에까지 그대로 이월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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