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혼자 독야청청하면 무슨 소용?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8.03.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개혁의 채찍’으로 사법부 후려쳐야…부정 막을 제도적 장치 마련 시급
윤관 대법원장은 대개 집무실에서 혼자 점심 식사를 한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 식사하면, 재판과 관련한 부탁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대법원장이 혼자 식사하는 동안, 일부 의정부 지원 판사는 변호사들과 어울려 룸살롱에 몰려가고, 명절에는 수십만원씩 통장에 입금받기도 했다.

현직 법관이 돈 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은 사법부 역사상 최초의 대형 사건이다. 그런데도 사법부의 분위기는 ‘부처 이기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며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 2월20일 안용득 법원행정처장은 의정부지원 사건 조사 결과 발표에서 ‘법관은 탄핵에 의하지 않고는 파면할 수 없다’는 헌법 106조를 들먹이며 ‘문제된 법관에게 징계 처분을 부과하는 것이 사법부가 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제재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판사는 뇌물 받아도 면직되지 않는다?

안처장의 이런 주장은 문제가 된 판사들에게 ‘법관 징계법’만을 적용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법관징계법은 지난 십수 년간 개정된 적이 없는 ‘솜방망이’ 법이다. 이 법은 면직 조항도 없이 견책·감봉·정직 세 가지 징계만 내리도록 규정하고 있다(반면 검사징계법에는 면직 조항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2월6일 열린 전국 법원 사무국장 회의도 법관징계법을 ‘사실상 사문화한 법률’이라고 자평했었다.

일반 공무원이 뇌물을 받았다면, 이들은 형법이나 특별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천만원 이상 수수했을 때) 위반 혐의로 형사 처벌을 받고, 다시 ‘공무원 징계법령’에 따라 자체 징계를 받는다. 검사의 경우, 뇌물을 받았다고 밝혀지면 형법이나 특가법 위반 혐의로 형사 처벌되고, 동시에 검사징계법에 따라 면직 등 내부 징계를 받는다.

판사도 대한민국 국민인 만큼 돈을 받았다면 검찰과 법원은 그 돈이 뇌물인지 여부부터 따져야 한다. 뇌물로 판단될 경우 형법이나 특가법에 따라 형사 처벌하고, 법관징계법에 따라 자체 징계해야 한다. 그러나 안처장은 헌법 106조를 거론해, 현직 판사가 검찰 피의자와 법정 피고인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을 차단했다. 이에 대해 한 헌법학자는 “헌법 106조는 판사가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신분을 보장한 것이지, 부정한 혐의가 있는 판사에게 면죄부를 주는 조항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안처장은 사무국장회의에서 “법원 부조리를 철저히 밝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각오로 엄정한 처분을 내려야 한다”라고 훈시했다. 한 법조인은 “이 말이 진정이었다면 안처장은, 문제 판사들에 대한 수사를 검찰에 의뢰해야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안처장은 사실상 사문화한 솜방망이(법관징계법)를 ‘가장 강력한 제재 수단’이라고 주장하며, 문제가 있는 판사들에게 형법 등이 적용될 여지를 차단해 버렸다.

지난 1월3일 열린 대법원 시무식에서 윤 관 대법원장은 ‘양형의 적정성과 공평성은 사법 정의 실현에 관한 국민 신뢰와 직결된다. 법관 사이의 양형 편차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사는 중요 원인이 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 연설의 메아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숱한 수뢰 사건을 판결했을 안처장은, 자기 식구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한 양형을 ‘언도’해 버린 것이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안처장은 “대법원의 입장은 공보관에게 일임하고 있다”라며 답변을 거부했다. 대법원 공보관은 “의뢰가 있어야만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는 것은 아니다. 수사 여부는 전적으로 검찰이 판단할 문제다”라며, 수사를 의뢰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법원의 이러한 버티기 작전은 검찰 또한 의정부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타의에 의해 개혁되면 사법부 독립 훼손된다”

이에 대해 한 대검 관계자는 “문민 정부 출범 직후 검찰은 이건개 대전고검장을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했지 않느냐. 만약 법원이 수사를 의뢰한다면 또다시 검찰 내부에 칼을 대는 부담이 있더라도 공정히 수사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법원의 수사 의뢰가 없는 한 검찰 역시 이번 사건을 피해 가고 싶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법원은 검찰에, 검찰은 법원에 공을 떠넘기다가 흐지부지 끝내고 싶은 것이 양측의 공통된 입장인 것이다.

이번 사건을 교묘히 넘기고 싶어하는 법원 관계자들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야릇한 기대’를 거는 듯하다. 80년 그를 내란 음모 혐의로 기소한 것은 신군부 세력이었으나, 거기에 화답해 사형을 언도한 것은 사법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통령은 사법부에 대해 감정의 앙금이 있을 것 같은데도, 사법부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뿐만 아니라 검찰·안기부·군·경찰·감사원·국세청 등 권력 기관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이 없어, 그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처럼 법원에 대한 여론이 악화한 상태에서 김대통령이 ‘사법부도 개혁에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한 마디만 던져도 법원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할 것이다.

김대통령이 사법부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데 대해 한 법관은 “김대통령은 사법부 독립에 대해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의정부지원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대응은 이러한 아전인수식 해석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한 법조인은 “아전인수 때문에 법원은 스스로 개혁할 기회를 놓치고 결국 타의로 개혁됨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하지 않겠느냐”라고 우려했다.

또 다른 법조인은 의정부지원 사건이 93년부터 지속되어 온 사법 개혁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안타까워했다. 올해 마무리될 예정인 이 개혁 작업은 예비판사제와 사법보좌관제 신설, 법관인사위원회 설치, 특허 법원과 행정 법원 개원, 단독 관할 확대, 영장실질심사제 도입, 불구속 재판 확대, 법관윤리강령 제정, 새로운 법복(法服) 도입, 시·군(市·郡) 법원 설치 등으로 착착 시행되어 왔다.

그러나 의정부 사건에서 개혁의 소산물인 시·군 판사들이 변호사로부터 실비(室費)를 지원받아 왔음이 드러났다. 법관윤리강령이 제정되었음에도 판사들은 변호사들로부터 여전히 돈을 받아 왔다. 참여연대로부터 고발된 판사들도 개혁 소산물인 단독 판사들이었다. 이에 대해 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사건 의뢰인부터 부정을 요구하는 것이 우리의 법 문화인데, 제도를 개선한다고 개혁이 성사되겠느냐며 이렇게 말했다.

“사건을 맡긴 의뢰인은 변호사가 판·검사를 만났다고 해야 안심한다. 판·검사를 만나지 않고 서면으로만 변호하면, 그들은 변호사가 일을 하지 않고 수임료만 챙긴다고 오해한다. 변호사도 사람인지라, 수임한 사건 때문만으로 판·검사를 만날 용기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수사비·판공비·실비 등을 지원하며 판·검사를 만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의뢰인부터 부정을 요구하는 우리의 법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제2 제3의 의정부 사건이 터질 수밖에 없다.”

한 중견 변호사는 술자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한탄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변호사를 인권 옹호자라고 보지만, 사실은 법률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언론 보도를 볼 땐 ‘저 나쁜 놈’ 하고 욕했던 사람이 내게 변호를 의뢰하면, 유죄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무죄 판결 받을 방법을 찾아 줄 수밖에 없다. 법을 공정히 다루라고 배웠는데, 실은 법을 악용하는 방법을 찾는 기술자로 변해 버렸다.”

치매 걸려도 변호사 자격증은 취소 안돼

분쟁과 소송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의뢰인-변호사-경찰-검찰-판사로 이어지는 검은 커넥션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이 커넥션의 핵심에 최고 엘리트인 변호사·검사·판사가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서울대 법대나 고려대 법대 등 특정 학교 출신들이어서, 인적 커넥션 또한 매우 강하다. 판·검사를 마치면 고소득이 보장된 변호사가 될 수 있다. 변호사란 직업은 정년도 없고, 치매에 걸려도 자격증이 취소되지 않는 영원한 ‘쇠밥그릇’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판·검사와 변호사는 더더욱 유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답답한 것은 지금까지 사법부에는 법관의 비리를 자체 감사할 제도와 부서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대검에는 감찰부가 있다). 사법부는 부정과 ‘접속’하기 쉬운 대민 부서인데도 법관의 인격에 모든 것을 맡겨 왔기 때문에 부정이 관행처럼 되어 왔다. 법조 개혁의 채찍은 3권 분립으로 독립성이 보장된 사법부 스스로 들어야 한다. 윤 관 대법원장은 혼자서 점심을 들며 독야청청할 것이 아니라, 법조계 전체가 깨끗해지도록 매질하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