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은 '약'이 아니다?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6.06.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약재 운용·조제 과정 ‘양약’과 천양지차… 약학의 ‘보편성 원리’ 적용은 무리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말장난하기 딱 좋은 논제가 하나 나왔다. ‘흰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장자(莊子)의 친구였던 혜시(惠施)와 더불어, 명가(名家) 계통 철학을 대표했던 사상가 공손룡(公孫龍)의 작품이었다. 공손룡은 “말이란 것은 형체에 붙인 이름이며, 흼은 색에 붙인 이름이다. 형체에 대한 명명과 색에 대한 명명은 같을 수 없다”라는 논리로 흰말이 말이 아님을 입증했다.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이라고 부르는 이 논제 덕분에 공손룡은 고대 중국 철학사상 논리학의 공헌자라는 매우 명예로운 지위를 얻었다.

약 2천 년이 흐른 오늘 공손룡의 논제와 비슷한‘현대판 백마비마론’이 한국땅을 뒤흔들고 있다.‘한약도 약이다’라는 논제가 바로 그것이다. 철학자가 아닌 약사와 한의사가 제출한 이 논제는, 결코 말장난이나 궤변 또는 논리학적 사유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공손룡의 논제와 확연히 구별된다.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이해 관계가 갈리는 약사·한의사 수만 명이 자존심과 생존의 권리를 걸고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한약은 약이다’라는 약사쪽 주장이다. 이에 맞서 한약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던 한의사들은 한약은 (일반) 약과 다르므로 절대로 약사들이 다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한·약 분쟁’의 당사자인 약사와 한의사들은 문제의 약사법 개정 논의가 시작된 93년부터 최근 한약 조제 시험을 둘러싸고 또 한번 대회전을 치르기까지 내리 3년 동안 한편으로는 실력 대결을, 다른 한편으로는 입씨름을 계속해오고 있다.

과연 한약은 약인가, 약이 아닌가. 이 논쟁에서 약사들은 먼저 약을 연구하는 학문인 이른바 ‘약학’의 보편·타당성을 내세워 한약이 약임을 주장한다. 약사들은 스스로 약학을 ‘질병을 고치는 데 이용되는 물질의 개발·제조·관리·조제를 위한 종합 과학’이라고 정의한다. 어떤 물질이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쓰이는 한, 그 물질에 대한 제조·관리·조제 권한은 약학을 전공한 약사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약 조제권을 갖는 것은 약사들에게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약사들은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때때로 약학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약을 지어온 사람들은 모두 같은 약재를 사용해 왔고,‘약학’이 전문화해 독립적인 지위를 얻은 오늘날에도 약사들이 채택하는 이른바‘생약학’의 소재는 한의학에서 쓰이는 약과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약사들이 약에 관한 한 전문가라는 주장은, 현재 한약을 가르치는 한의대의 교과목과 약을 가르치는 약학대의 교과목을 비교해 보면 한층 더 설득력을 얻는다. 한의대 교과목 가운데 약학 분야와 직접 관련이 있는 과목은 본초학(本草學)·방제학(方劑學) 등 6~7개 정도이다. 반면 약학대의 교과목은 해부생리학·내분비학 등 기초 의학 분야 과목 몇몇 개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약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중에서도 한약과 관련되어 있는 교과목은 약학 본래의 과목인 약용식물학·생약학은 물론 본초학·한방처방학까지 합쳐 최소한 10과목 이상 된다는 것이 약사측 주장이다. 한약과 직접 관련이 있는 교과목으로만 따져도 약에 대한 전문성의 우열 면에서 약대가 한의대를 앞선다는 얘기다. 약사들은 이같은 사실을 내세워 잠재력이 무한한 한약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한약을 약학에 흡수·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한약도 약’이라는 이같은 논제는 어디까지나 약사들 처지에 섰을 때에만 타당함을 얻을 뿐이다. 한약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한의사들은, 한약이란 보편성과 일반성 원리로만 설명할 수 없는 고유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무시하고 한약을 약에 합칠 경우 한약의 독립성은 고사하고 한의학 전체의 존립 근거마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의사들에게 한약은 ‘한약’일 뿐 결코 ‘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한약은 조제 과정이나 취급 방식, 약재 운용(用藥) 방식, 또 그 방식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한의학적 원리에서 양약과 구별되는 측면이 많다.

먼저 취급 방식에서 한약과 양약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한의사들은 주장한다. 양약이 서양 의학에서 분리·독립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제약 회사를 통해 대량 생산이 가능하며 세계 어느 곳에서 생산되더라도 성분이 동일하다는 데 있다. 아스피린이 좋은 본보기이다. 약효와 사용량 한도가 분명하고, 안전성이 확보된 이상 아스피린은 의사가 별도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 없이 어느 약국에서나 유통이 가능하다.

한약 제조, 규격화·표준화 불가능

그러나 한약은 다르다. 한의학에는 수치법(修治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수치법이란 천연물이 대부분인 약재를 한약으로 쓰기 위해 한의학 특유의 약재 분류 원리에 따라 가공·처리하는 방법을 말한다. 주로 약물의 치료 효과를 높이고, 독성·부작용 따위를 없애기 위해 행해지는 수치는 말하자면 한의학 분야의 제약 과정이다.

문제는 이같은 수치가 기계나 대량 생산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져 규격화·표준화하지 못하는 데 있다. 한약에서는 똑같은 약재라도 볶아서 쓰기도 하고, 삶아서 쓰기도 하며, 술이나 꿀에 담가 쓰기도 한다. 또 똑같이 술에 담가 만든 약이라도 얼마나 오랫동안, 몇번이나 담갔는가에 따라 용도가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한의사는 한약을 조제하기 전에 약업사를 통해 조달된 약재가 어떻게 ‘수치’된 것인지를 일일이 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한약과 양약이 이처럼 취급 방식에서 차이를 빚는 까닭은, 한의학과 약학이 똑같은 천연물(생약)을 다루더라도 약의 성상·성분·약리 작용(효능) 따위를 연구하고 이를 기술할 때 전혀 다른 방법론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학 쪽에서 한약을 연구하는 분야로는 생약학이 있다.

생약학은 말 그대로 생약의 성상·성분·약리 작용·응용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학문의 최대 특징은 생약에서 유효 성분을 추출해 그 성분의 약리 작용을 규명하는 일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생약학은 한약재인 부자(附子)에서 ‘아코니틴’이라는 성분을 뽑아내 ‘일과성 혈압 강하 작용이 있으며, 장관 수축 작용을 하고, 이뇨 억제 작용을 한다’라고 기술한다. 이같은 성분 분석과 기술이 화학·독성학·생리학 등 현대적인 인접 과학의 방법론을 응용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반면 한의학은 한의학 체계에만 존재하는 고유한 효능 분석법에 따라 약재를 연구해왔다. 한의학 분야에서 약재를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약학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기미론(氣未論)’이다. 약재의 효능을 연구하는 한의학쪽 학문인 본초학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는 기미론이란 약재를 기운(기)과 맛(미)에 따라 나누는 원리이다. 일반적으로‘기’에는 차가움(寒) 뜨거움(熱) 따뜻함(溫) 서늘함(凉) 네 가지 기운이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또‘미’에는 다섯 가지 맛이 있다. 맵고(辛) 쓰고(苦) 시고(酸) 달고(甘) 짠(鹹) 맛이다. 한의학은 이 기미론에 따라 약재를 분류하고, 약재의 성질에 의거해 약재의 효능을 일일이 규정한다. 이를테면 찬약은 더운 병에 쓰고, 더운 약은 찬 병에 쓴다는 것이다. 4기와 5미의 조합에 의해 똑같은 약재로도 무수한 처방이 생겨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약은 한약을 운영하는 근본 원리인 한의학적 진단·처방과 결합할 때 비로소 ‘한약’이 될 수 있다고 한의학계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한의학계가 주장하는 근본 원리란 무엇인가. 한의학계의 원로로서 한국한의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홍원식 박사는 “한의학을 구성하는 근본 원리에는 음양론·오행론·장부론·귀경론 따위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바로 음양·오행론이다”라고 설명한다.

음양론이란 문자 그대로 만물을 음(陰)과 양(陽)으로 나누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오행론은 세계가 다시 금·목·수·화·토 등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이들 요소의 상호 작용(相生相克)에 의해 자연 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하는 이론이다. 양쪽을 한데 묶어 ‘음양오행론’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 이론들은 원래 동양 전래의 세계관이었다. 음양오행론이 의학에 접맥된 것은 한의학의 경전이라 할 〈황제내경〉과 한의학의 법전으로 통하는 〈상한론〉이 저술되면서부터였다. 〈황제내경〉은 중국 한나라 때, 〈상한론〉은 중국 후한 시대에 각각 저술되어 오늘날까지 한의학의 양대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한의학·서양 의학, 인체·질병관 큰 차이

한의학에서는 사람의 체질에 대한 판단은 물론 질병의 발생 원인과 진단·처방 등 의료 행위의 기본이 음양오행론에 따라 이루어진다. 음양론에 입각해 사람의 체질을 분류하는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은 이 방면의 극치를 이룬다. 사상의학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체질을 타고 나는데, 여기에는 네 가지 형태가 있다. 태음인(太陰人)·소음인(少陰人)·태양인(太陽人)·소양인(少陽人)이 바로 그것이다. 또 각각의 체질은 차갑고(寒) 뜨거운(熱) 기운이 있다. 예컨대 소음인은 차가운 기운이 많고 뜨거운 기운이 적다. 이 때문에 소음인은 차가워지는 병에 걸리기 쉽지만 겉은 뜨겁다. 소양인은 정반대다. 소양인은 속이 뜨거워지는 병에 걸리기 쉽지만 겉은 차가워지는 양상을 띤다.

음양오행 원리에 따른 한의학적 판단은 실제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에서 서양 의학 또는 약학의 판단과 모순을 빚는다. 어느 질병에 대해 서양 의학에서는 해롭다고 판단되는 처방이 음양오행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대수롭지 않게 사용되어 큰 효과를 거두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서울 방배동 ㅇ한의원의 임상 실례도 그 중 하나다.

ㅇ한의원에는 몇달 전부터 간암 치료를 받으러 드나드는 환자가 한 사람 생겼다. 진주 사람인 그 환자는 유명하다는 종합병원을 두루 돌아다닌 끝에, 자신이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하기 어려운 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한의원 문을 두드렸다. ㅇ한의원의 전 아무개 원장은 예의 한의학적 관점에 따라 새 처방을 내놓아 상태를 호전시켰다. 그의 처방 내용은 ‘비(脾)의 양기가 불서(不敍)해 습담(濕痰)이 발생했으므로 거습(去濕) 제담(除痰) 위(爲)주로 방(方)함’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습한 기운을 없애고 담을 가라앉히면 병이 치료된다는 얘기였다. 전원장에 따르면, 한방에서 사용하는 제담 약재는 양방의 시각에서는 일반적으로 간에 해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양방에서 해롭다고 알려진 그 약재를 한의학 본래의 방식에 따라 처방해 실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서양 의학과 한의학이 이처럼 똑같은 질병을 치료하면서도 각기 다른 방식을 취하는 까닭은, 인체관과 질병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서 한의학은 다시 음양오행론으로 돌아간다. 사람 몸은 음과 양이 질서와 조화를 이룬 하나의 ‘소우주’로서, 조화가 깨진 상태가 ‘불건강’ 또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의학에서 질병을 치료하는 행위는 인체의 부조화 상태를 조화 상태로 복원시킴을 뜻한다. 반면 서양 의학에서의 질병 치료는 일반적으로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 물질의 제거 또는 퇴치’로 정의된다.

대부분의 한의사들이 약사들의 한약 조제는 물론 한의학계 내부의 의·약 분업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체를 ‘전체’로 파악하고, 부조화가 발생했을 때 이에 대처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서 어떻게 약을 다룰 수 있겠느냐 하는 주장이다. 안덕균 교수(경희대 한의대·본초학)는 “사람의 체질뿐만 아니라, 한약 자체도 음양으로 나뉘어 있다. 체질과 약성에 따라 수많은 ‘경우의 수’가 발생하는데 어떻게 처방과 조제를 분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묻는다.

음양오행에 입각한 질병관과 치료 방식, 한약 이론은 한의학을 한의학답게 하는 주요 특징으로서 한의학의 존속을 지탱해온 기둥이지만, 한의학이‘보편 의학’으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질병 치료에 관계된 모든 인과 관계가 음양오행이라는 ‘추상 이론’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또 진료와 처방의 효과를 객관적으로 검증하지 못하는 현실도 한의학의 최대 단점으로 꼽힌다. 전세일 교수(연세대 의대·재활의학)는 “예컨대 서양 의학에서는 ‘이 약을 먹으면 어느 환자든 70% 이상 치유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의학에서는 약의 효능을 입증할 객관적 자료가 없다. 객관성과 재현성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 의학이 치료하지 못하는 병을 한의학이 완치한 경우에도 대부분 ‘일회성 보고’로 치부되고 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말한다.

한의학계 내부에서 한의학 자체의 한계를 인정해 이를 적극 극복하려는 노력도 있다. 양·한방 협진 개념을 본격 도입한 서울 강남의 하나병원이 두드러진 사례다. 이 병원 최서영 원장은 “한의학 방법은 광대한 자연철학 사상을 인체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편차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미세한 부분에 대한 관찰이 정밀하지 못하고 소박함을 면치 못하는 측면이 있다. 병리 현상을 파악하는 주된 방법이 주관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한의학 영역의 대부분이 보편 의학의 테두리 바깥에 있다고 해서 한의학의 본질 전체를 부정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최원장은 강조한다. 서양 의학은 그 근거를 자연과학에 둠으로써 질병의 메커니즘을 밝혀내고 인체에서 그 원인을 제거하는 데에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사람의 질병을 환경(자연)과 인체라는 관점에서 종합해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의·약이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이상 이같은 논리는 ‘한약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더욱이 한의학 분야에서 의와 약은 2천 년 한의학 역사상 뗄래야 뗄 수 없는 특수 관계를 맺어 왔다. 한약은 물론 ‘약’이다. 그러나 한약은 2천 년간 개별성의 영역에 머물러 왔다. 이같은 한약을 하루아침에 보편성의 영역으로 옮겨 놓을 수 있을까. 한약이 ‘약’이면서 동시에 ‘약’이 아닌 까닭이 이 질문에 숨어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