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봤지! 정대철도 치는 판이야"
  • 李叔伊 기자 ()
  • 승인 1998.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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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읍참 대철’로 여권 사정 의지 드러내…중진 구도 타파·친정 체제 강화 포석
정대철 부총재가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검찰에 소환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시종 웃음을 잃지 않고 여유 만만했다. 법무부 고위 관계자로부터 2시간만 조사받고 나오면 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그는 이강래 청와대 정무수석과 9월4일 만나기로 한 약속을 구속 직전까지도 취소하지 않았다.

국민회의는 정부총재 구속을 ‘대형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정부총재 부모와의 인연으로 볼 때, 김대중 정부가 정부총재를 구속한 것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문 집안 출신 엘리트의 허무한 추락

4선인 정부총재는 한마디로 명문 집안 출신 엘리트형 정치인이다. 야당 원로였던 고 정일형 박사와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84) 여사의 외아들로, 경기고·서울 법대·미국 미주리 대학 정치학 박사 등 화려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33세 때인 77년 부친 지역구(서울 중구)에서 치러진 보궐 선거를 통해 9대 국회에 진출한 그는 10·13·14대 의원을 지내며 차세대 주자의 꿈을 키워 왔다.

그의 부친은 70년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DJ를 지지해 김영삼 후보를 꺾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71년 대선 때는 DJ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61년 DJ와 이희호 여사를 맺어 준 사람도 정부총재의 부모이다. 김대통령으로서는 정부총재 부모에게 톡톡히 신세를 진 셈이다. 이런 인연 때문에 김대통령은 정부총재 일가를 남다르게 대해 왔다.

그럼에도 정부총재가 그동안 김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린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멀리는 91년 정치발전연구회를 만들어 독자 계보를 형성하려 했고, 지난해 15대 대선을 앞두고는 ‘DJ 불가론’을 내세우며 당내 비주류 대표로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와 DJ와 맞붙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정부총재의 ‘일탈’은 계속되었다. 지난 3월에는 안기부 이대성 문건 파문을 일으켜 김대통령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고, 얼마 전에는 현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경제 청문회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김대통령 측근들은, 만약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DJ에게) 퇴출당해도 일찌감치 당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그런 그를 지난 5월 한국프로야구협회(KBO) 총재로 앉히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정부총재 역시 잦은 구설이 부담스러웠던 듯 최근 들어서는 언행을 신중히 하며 재기의 각오를 다지는 모습이 역력했다. 프로 야구 관계자들은 정부총재가 구단들의 경영난과 프로 축구 바람에 치인 프로 야구를 되살려 보고자 밤낮으로 구단주 등과 만나 머리를 맞댔다고 전했다. 이런 노력 끝에 채택한 ‘어린이 관객 무료 입장’이라는 아이디어가 프로 야구 관중 수를 증가시키는 효과를 거두던 참이었다.

정부총재는 틈틈이 지역구 관리에도 힘을 쏟았다. 하루 2시간씩은 반드시 지역구민과 만난다는 계획을 세운 그는 특별한 사정으로 약속을 못 지킬 경우 다음날 지역구 순방 시간을 4시간으로 늘리는 등 촘촘하게 일정표를 운영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가는 곳마다 한나라당 박성범 의원 부인 신은경씨를 만나는 통에 내가 박의원과 싸우는지, 신씨와 싸우는지 헷갈리더라”는 농담까지 했던 그였다.
그는 9월10일 KBS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위해 그는 8월24일 강원도에 있는 대리석 광산에서 무려 16시간이나 광부 노릇을 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정부총재가 구속됨으로써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정부총재 구속은 여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읍참 대철’을 할 정도면 김대통령이 여당 의원에 대한 사정을 결코 흐지부지 끝낼 것 같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김대통령은 정부총재가 구속된 직후 “설사 내 자식이 연루되었다 하더라도 예외를 두지 말라는 뜻을 사정 당국에 전했다”라며 다시 한번 성역 없는 사정 의지를 내비쳤다.

한나라당은 정부총재를 구속한 데 대해 야당 의원을 탄압하기 위한 끼워넣기식 수사라며 폄하한다. 여권의 희생양을 만들려다 보니 애꿎게도 비주류에 원외인 정부총재가 걸려들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부총재 구속이 야권에 던진 충격도 만만치 않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대통령의 ‘읍참 대철’을 단순히 ‘사정’ 차원에서만 볼 것은 아니라는 관측도 나온다. 국민회의의 전국 정당화와 내년 5월 정기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대통령이 기존 중진 구도를 완전히 뒤흔들려는 의도를 지닌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범동교동계 주류도 전전긍긍

그도 그럴 것이 정부총재 구속으로 당내 비주류는 거의 파산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총재와 함께 비주류 수장 노릇을 해온 김상현 상임고문은 이미 한보에 발이 묶여 행동 반경이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래가 불투명한 것은 비단 비주류뿐만이 아니다. 정가에 나도는 괴문서에 이름이 올라 있는 ㅇ·ㄱ·ㄱ 등 범동교동계 의원들도 언제 사정의 칼끝이 자신을 겨눌지 몰라 잔뜩 움츠러들었다.

범동교동계 중진까지 이런 불안감을 가지게 된 것은 다름 아닌 DJ의 용인술 때문이다. 김대통령은 정치적 고비 때마다 옛 사람을 멀리하고 새 사람을 전면에 포진하는 방법으로 난국을 돌파해 왔다. 따라서 그가 평생 숙원으로 상정한 지역 감정 타파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옛 동지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갈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난무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정치인 사정을 거치면서 ‘DJ 친정 체제’가 더욱 강화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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