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위기 고래가 돌아왔다
  • 부산·울산·포항/宋 俊 기자 ()
  • 승인 1997.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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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부터 한반도 연·근해 출몰 급증…보호 방안 마련, 연구 기관 설치 절실
희부연 물체가 빠르게 다가왔다. 바람 한 점 없는 연초록빛 바다, 물속 4~5m에서 어뢰처럼 밀려든 것은 고래였다. 쇄도하던 유선형의 거구는 배를 가로질러 맞은편에서 솟아올랐다. ‘푸우’ 한 차례 물기둥을 쏘아올리고 고래는 다시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7m는 족히 될 커다란 덩지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4~5분 가량이 흐른 뒤 이번에는 배 뒤쪽에서 물결이 일었다. 가슴지느러미에 흰색 완장을 두른 밍크고래 일가족이었다. 배 앞뒤에서 숨었다 솟기를 서너 차례, 밍크고래들은 숨바꼭질을 그치고 먼바다로 유유히 멀어져 갔다.

8월 초순 울산 감포 앞바다 20㎞ 해상에서 교육방송(EBS) 다큐멘터리 팀이 고래와 가진 침묵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시 10㎞ 가량을 달려나가자 예기치 않은 장관이 펼쳐졌다. 참돌고래 수천 마리가 번갈아 물 위로 솟구쳐 오르며 물보라를 피워댔다. 이들이 빚어낸 포말의 띠는 3~4㎞에 걸쳐 아침 햇살을 반사하며 눈부신 파노라마를 펼쳐 보였다.

혼획된 고래 95년 4마리에서 96년 1백77마리로

8월 중순 <시사저널> 취재진이 위와 같은 풍경을 다시 한번 기대하며 감포 앞바다를 찾았을 때, 바다는 다른 얼굴이었다. 새벽 5시부터 물살을 가르며 배를 몰았지만, 2~3m 높이의 파도가 뱃전을 흔들며 고래 만나러 가는 길을 막았다. 옷자락이 거센 바람에 흩날리며 비명을 질렀다. 갑판이 요동을 치는 사이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졌다. “저기 새들 모인 곳에 고래가 있는데….” 말꼬리를 흐리며 선장이 뱃머리를 돌렸다. 멀리서 갈매기들이 파도를 스칠 듯 떼지어 날았다. 고래가 나타나면 물고기들이 놀라서 튀어오르기 때문에 갈매기들이 늘 그 주위를 맴돈다는 설명이었다.

한반도 연·근해에서 고래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였다. 국제포경위원회(IWC)가 86년 ‘상업 포경 모라토리움(시한부 전면 금지)’을 시행한 지 10년째 되는 시점이었다. 모라토리움은 고래를 살리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수세기 동안 무자비하게 살육이 자행된 반면 고래의 번식이 워낙 완만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고래의 임신 기간은 10개월. 그나마도 3~5년마다 한 배에서 한 마리만 낳는다. 새끼가 자라서 짝짓기를 하기까지는 대략 10년이 걸린다.
고래의 부활은 혼획(고래가 그물이나 통발에 걸려 잡히는 것) 통계로도 입증된다. 95년 4마리에 불과하던 우리나라 연·근해 혼획 고래 수는 지난해 무려 1백77마리로 늘었다. 올해 들어서는 2월 중순에 벌써 26마리나 잡혔다.

모라토리움 시행 10주년을 맞아 EBS는 다큐멘터리 <한국의 고래>(50분·김주홍 PD)를 기획하고 3월부터 촬영에 나섰다. 일본 오가사와라 섬에서부터 대마도 근해를 거쳐 독도에 이르는 바다를 훑어오면서 EBS 팀은 밍크고래·상괭이 등 한국 고래와 돌고래 6종을 영상에 담는 데 성공했다(87쪽 상자 기사 참조). 울산 KBS도 5월부터 고래를 좇았다. 밍크고래·리소돌고래 등 바다 이야기와, 고래 해체 시설과 유통 구조 따위를 살펴본 뭍의 이야기를 담은 ‘고래 특집’(45분·유태진 PD)을 9월에 방영할 예정이다.

어렵사리 돌아온 고래의 소식은 반갑고 신선하다. 고래의 삶과 진화 과정 자체가 신비할 뿐만 아니라, 멸종에 직면하게 된 죽음의 역사마저 비장하고 또 극적이다. 더구나 그 죽음의 행로를 견디어내고 돌아온 주인공이 바로 우리의 고래, 한국 고래인 것이다.

박구병 교수(부경대·수산경영학)에 따르면, 오래 전부터 한반도 연·근해에서 발견되는 고래는 대략 11~13 종류이다(86쪽 사진 참조). 이 가운데 밍크고래·솔피·흑고래 등이 현재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돌고래 20여 종도 활발히 활동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지만 대형 고래 존재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EBS 김주홍 PD는 “어부들이 큰 고래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해 희망을 갖고 있다. 8월 말~9월에 배와 헬기를 동원해 큰 고래를 찾아나설 작정이다”라고 말했다.

중형 고래 천만원 호가…불법 고래 사냥 우려

박구병 교수는 귀신고래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귀신고래는 겁이 많고 느린 반면 매우 영리하며 보호 본능이 강하다. 포경선을 만나면 물 속에서 감쪽같이 방향을 바꿔 귀신처럼 사라진다고 해서 귀신고래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고래의 특징은 규칙적인 회유 성향이다. 베링 해에서 멕시코까지 왕래하는 북미 귀신고래와 오호츠크 해에서 중국 해남도까지 회유하는 아시아 귀신고래 두 종류가 있다.

아시아 귀신고래는 다시 한반도 연안을 끼고 가는 종류와 일본 동해안을 따라 가는 것으로 나뉜다. 이중 동해쪽 귀신고래를 학계에서는 ‘Korean Great Whale’이라고 부른다(90쪽 그림 참조). 안타까운 것은 거의 멸종되었던 귀신고래가 미국 서해안과 일본 동해안에서는 목격되는데도 동해에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62년 정부는 ‘울산 귀신고래 회유 해면’을 천연기념물 126호로 지정했으나, 고래 보호에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고래가 돌아오면서 새로 발생한 문제도 있다. 어민과의 마찰이다. 고래가 나타나면 오징어·멸치 따위 어류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흩어져 버린다. 3~4시간 동안 공들여 불러모은 고기를 잡다가도 고래가 보이면 그 날은 공치는 날이다. 어민들 계산에 따르면, 제철에 수확을 못하게 된 피해와 경비를 평균으로 따졌을 때 고래를 만나 공친 날은 1백50만~2백만 원은 손해를 본다고 한다.
혼획도 미묘한 문제를 유발한다. 고래가 정치망이나 통발에 걸렸을 경우, 무조건 해경에 신고해야 한다. 이때 고래가 죽은 경우와 숨이 붙어 있는 경우는 하늘과 땅 차이다. 검·경찰이 고래의 사인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자연사라는 판정을 내리면, 어민은 수협을 통해 고래를 경매할 수 있다.

경매에서 2~3m급 소형 고래나 돌고래는 마리당 60만~1백20만 원, 3~8m짜리 중형 고래는 6백만~2천만 원을 호가한다. 고래가 살아 있는 경우는 그물 값도 못 건진다. 무조건 놓아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혼획 고래 처분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경매를 통해 천만원대 거금을 횡재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숨이 붙은 혼획 고래를 고의로 방치하여 죽게 만들 수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 고래 연구비, 일본의 6천분의 1 수준

경매를 거친 고래는 전문 요릿집으로 넘겨진다. 울산·포항·부산 등지에 왕고래집·할매집 등 10개 정도의 고래고기 요릿집이 있다. 고래고기는 부위에 따라 열두 가지 맛을 내는데, 대략 1인분에 2만~2만5천원 정도로 쇠고기보다 비싸다.

현재 국제포경위원회가 상업 포경 금지 대상으로 지정한 고래는 모두 11종인데, 정부는 돌고래를 포함해 고래류 전체를 철통 보호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불법 포획하면 3백만원 이하 벌금). 어민들은 최근 몇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난 돌고래가 어장에 많은 피해를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마침내 생태 보호 문제와 민생 문제가 정면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국립수산진흥원(부산 소재) 이장욱 어업자원부장(국제포경위원회 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국제포경위원회도 수가 늘어난 일부 고래에 한해 포경 허가를 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특정 고래만 잡고 나머지를 보호하는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략 5~10년 정도면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 본다.” 78~96년 국제포경위원회의 회의에 줄곧 참석해 온 공 영 박사(수산해양학)는 이를 위해 고래 조사·연구가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정보가 있어야 대책을 마련하든 국제포경위원회와 협상을 벌이든 할 것 아닌가. 그러기에는 우리 연구 현실이 너무 열악하다.”

실제로 한국의 고래 연구 여건은 숨막힐 정도로 궁핍하다. 국내 고래 연구자로 모두 네 사람이 꼽히는데, 그중 세 사람이 정년 퇴임한 원로들이다(88쪽 상자 기사 참조). 국립수산진흥원은 유일한 고래 연구 기관이다. 이곳의 유일한 고래 연구 담당자 김장근씨(42·수산연구사)는 어업 자원 조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결국 고래만 연구하는 전문가는 국내에 한 사람도 없는 셈이다. 이웃 일본만 해도 ‘소형고래류연구소’ ‘대형고래류연구소’ ‘鯨類연구소’ ‘수산청 연구부’ 와 각 대학 연구소가 활발히 고래를 연구하고 있다.

예산 문제도 심각하다. 미국이 고래 연구에 투자하는 1년 예산은 1백50만달러(약 13억원), 일본은 1백60억엔(약 1천2백억원)이다. 우리의 경우 고래 관련 예산은 올해 국립수산진흥원의 <한국 고래류 현황> 보고서 제작에 배정된 2천만원이 전부다.

고래 연구는 첨단 과학

실정이 이렇다 보니, 연구 결과도 턱없이 부족하다. 희귀 고래의 멸종 여부도 알 수 없고, 돌고래 20여 종 가운데 상당수는 이름도 짓지 못했다. 올해부터 해경의 협조를 받아 혼획 고래를 조사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진전으로 꼽힌다. 종전까지는 실물 고래를 놓고 조사하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물었다. 개인 논문이나 보고서를 제외하고는 고래에 관한 이렇다 할 단행본도 거의 없다. 2~3종(어린이 책 포함)이 대형 서점의 구석에 숨어 있을 뿐이다.
고래 연구는 단순히 어업 차원이나 생태·환경 범주에 국한하지 않는다. 선진국의 ‘고래 과학’은 어느덧 환경 논리를 앞세운 채 정보 전쟁의 국면으로 돌입하고 있다. 고래 생태 연구에 앞장선 나라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래 죽이기에 앞장섰던 포경 선진국들이다. 고래의 죽음을 통해 산업·과학·경제 역량을 축적했던 나라들이 이제는 고래의 삶에서 첨단 과학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89쪽 관련 기사 참조).

예컨대 잠수함의 골격은 향유고래의 몸체를 원용한 것이다. 음파 탐지 연구도 마찬가지다. 눈이 몸의 옆에 붙어 있는 탓에 고래는 앞을 보지 못한다. 그 대신 고래는 음파 탐지 방법이나 자기장 분석 요령을 터득했다. 기름기가 많은 특수한 눈물을 분비해 염분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기능도 고래만의 특징이다. 강한 수압을 견디며, 거대 물체가 빠르게 전진하는 데 최적의 기능을 하는 고래의 피부도 연구 대상이다. 특정 고래의 기름은 매우 섬세하면서도 얼지 않는 특성 때문에 우주 산업·첨단 기기 등에 특별히 쓰인다.

돌고래 연구도 활발하다. 돌고래와 인간의 의사 소통 연구는 이미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인명 구조·정보 심부름에 대한 실험도 진행되고 있다. 한켠에서는 돌고래를 이용한 군사 작전 실험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고래 구경 상품화할 때다”

고래 구경(Whale Watching)도 고도로 복합적인 연구 방법의 하나이다. 관광 수입의 일부를 연구 기금으로 활용하면서, 관람객에게 교육적·정신적 효과를 제공하고, 살아 있는 고래 자원을 마음껏 연구하는 일석삼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고래 구경은 현재 국제포경위원회에서도 정식 의제로 채택되어 논의되고 있다. 국제고래류보존협회 자료에 따르면, 94년 현재 65개국에서 고래 관람객을 5백40만명 유치해 5억달러를 벌어들였고, 그 수익률이 연 17%씩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아시아 지역은 94년에 일본·중국·홍콩·필리핀 등 13개국에서 4백만달러 수익을 올렸는데, 이 가운데 일본이 3백40만달러를 벌었다. 또한 일본이 고래를 소재로 한 기념품을 팔아서 번 돈은 무려 2천3백만달러에 이른다.

관광선을 타고 인접 해역에 다가간 다음 소형 보트로 고래가 나타나는 지역을 관람하는 것이 고래 구경의 주요 방식이다. 수산연구사 김장근씨는 “우리나라에서도 고래 구경의 가능성을 검토할 때가 왔다”라고 말한다. 78년부터 5년간 포경 선원으로 일한 적이 있는 황성국씨(38)는 “날씨만 좋으면 얼마든지 고래를 볼 수 있다. 고래 구경 사업을 할 마음은 있지만, 허가 문제도 복잡하고 자금 마련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어부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일본 오가사와라 섬의 고래 구경을 취재한 김주홍 PD는 “섬 주민의 3분의 2가 고래 구경 수입으로 살아간다. 관람객들은 강한 고래 보호 의식을 갖게 된다”라고 밝혔다. 고래연구소 직원이 파견되어 고래 분포 조사·연구를 벌이고 있으며, 자체 규약까지 정해 엄하게 준수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PD에 따르면, 오가사와라 주민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고래니까 우리가 보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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