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총선 북풍’ 뒷거래 물증 있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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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고위급 인사 대화 녹음테이프·문건·대북 지원 관련 서류 존재
‘국민의 심판(대선)이 끝난 뒤에는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북풍을 유인하고 거래한 이적 행위에 대한 사법적 심판도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시사저널〉 제426호 ‘한나라당, 북한과 북풍 뒷거래 의혹’ 기사에서)



〈시사저널〉이 지난 대선 직전인 12월16일에 단독 보도한, ‘한나라당, 북한과 북풍 뒷거래 의혹’이라는 제목을 붙인 기사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이 기사는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이 대선 직전에 베이징에서 북한의 대남 공작 수뇌부와 비밀 접촉을 했다는 ‘팩트’(사실)와, 이 자리에서 거액(3백여만 달러)을 주고 대선 개입을 유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과 정의원은 이 엄청난 사실과 의혹에 대해 침묵과 부인으로 일관했다.

구 청와대·신한국당·안기부 개입

〈시사저널〉은 국기(國基)를 뒤흔드는 이 사건의 파장을 고려하여 그동안 ‘조용히’ 사법적 심판을 기다려 왔는데, 위 기사에서 예고했던 대로, 대선이 끝난 지 열 달 만인 지금 ‘이적 행위에 대한 사법적 심판’이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대선 직전 북한측에 총격전을 요청한 이른바 ‘총풍(銃風)’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96년 4·11 총선 직전에 북한군 중대 병력이 판문점에서 무력 시위를 벌인 이른바 ‘북풍 사건’이다. 그러나 미수에 그친 총풍 사건과 이른바 ‘장풍’(장학로 비리 파문)을 누르고 당시 여당에 총선 승리를 안긴 북풍 사건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42∼43쪽 관련 기사 참조). 총격 요청 사건은 4·11 총선 전 북한과의 거래에서 재미를 본 구 여권의 친위 세력들이 다시 거래를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따라서 96년 북풍 사건을 수사하지 않고서는 총풍 사건의 전모를 캘 수가 없다.

북풍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4·11 총선 전이었다. 당시 장학로 청와대 부속실장 비리 사건의 파장을 ‘장풍’이라고 이름붙인 것과 짝을 맞추어 북한군의 난데없는 무력 시위 여파를 설명하는 언론의 조어(造語)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거 때면 나타나는 이같은 ‘북한 변수’는 의혹으로만 존재해 왔다. 그러다 50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자 지난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구 안기부와 여권의 북풍 공작 의혹이 처음으로 사법부의 심판을 받았다. 하지만 4·11 총선 관련 북풍 거래 의혹은 여전히 의혹 수준에 머물렀다. 사안의 성격상 그것을 입증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풍 사건을 계기로 4·11 총선 무력 시위가 남북 지도부의 뒷거래로 만들어진 ‘인공풍’이라는 사실이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 의해 확인되었다. 여기서 신뢰할 수 있는 출처는 사람일 수도 있고 특수 공작원 정보 보고를 토대로 작성된 안기부 공작 보고서일 수도 있다.

이 ‘출처’의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근거는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하나는 녹음 테이프이고, 다른 하나는 이 테이프를 녹취한 문건이고, 나머지 하나는 녹음 테이프에 나오는 대화 내용이 사실인지를 추적해 입수한 제3국에서의 대북 지원 화물 송장과 수출증명서 같은 증빙 서류이다.

이 공작 보고서에는 안기부 특수 공작원들이 비밀 입북을 포함한 대북 공작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접촉한 북한 대남 공작 수뇌부의 대남 공작 전략과 사례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테이프에는 대북 특수 공작원과 북한의 김용순(아태평화위 위원장) 장성택(노동당 조직부 제1 부부장) 김영룡(국가보위부 부장 대리 겸 제1 부부장) 안병수(조평통 위원장대리) 전금철(아태평화위 부위원장) 강덕순(아태평화위 참사 겸 통일전선부 국장) 등 북한 최고위급 인사들과의 관련 대화가 생생한 목소리로 담겨 있다(특히 강덕순은 97년 10월∼12월19일 베이징에 상주하면서 대남 대선 공작을 지휘한 실무 총책으로서, 대선 직전에 정재문 의원과 총격전을 요청한 한성기·장석중 씨를 만난 장본인이다).

이들의 대화 내용에는 △4·11 총선 전 무력 시위 배경 △대북 식량 및 물자 지원을 대가로 북풍(무력 시위)을 요청한 한국 정부 기관과 핵심 인물 △한국이 비밀 지원한 물자와 돈을 댄 한국 기업들 △YS를 비방하면서 총선 때 신한국당을 지원한 북한의 의도 △지난 대선 때 DJ 낙선 공작을 펼친 북한의 ‘DJ 불가론’의 논거 같은 96·97년 북풍 의혹을 둘러싼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다. 대화 내용을 분석해 정리하면 4·11 총선 전 판문점 무력 시위는 이렇게 전개되었다.
4·11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권(청와대·신한국당)과 안기부 간부들은 대북 비선(밀사)을 통해 북한의 대남 공작 지도부인 안병수·전금철 라인을 가동했다. 당시 YS 정부는 95년 6월 지자체 선거에서 참패한 이후 96년 총선을 앞둔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참패가 예견되었다. 더구나 총선 직전인 3월에 터진 YS 측근 장학로씨의 뇌물 사건으로 휘몰아친 ‘장풍’의 영향력 때문에 여권으로서는 ‘특단의 조처’를 취하지 않고서는 참패가 뻔했다.

특단의 조처는 바로 ‘북한 변수’였다. 대북 밀사를 동원해 북한의 체제 유지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지원해 주는 대신에 총선 전에 ‘적정한 수준의 무력 시위’를 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같은 공모에는 청와대에서는 장·차관급 고위 관계자 2명, 신한국당에서는 핵심 중진 의원 2명, 안기부에서는 국장급 2명과 특보급 간부 1명이 가담했다. 안기부는 주로 대기업을 동원한 대북 비밀 물자 지원 업무를 맡았다. 대북 사업을 하고 있는 현대·삼성·대우·진로 그룹 같은 대기업들이 동원되었다.

삼성·현대 등이 물자 지원

이 중 대북 물자 지원을 가장 많이 한 기업은 삼성과 진로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업들은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이나 홍콩의 무역회사를 통해 물자를 지원했으며, 대금은 현지 법인이 결제하는 무상 지원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삼성의 경우, 홍콩에 본사를 두고 평양에도 지사를 두고 있는 (주)ㄱ회사(대표 리○○)를 통해 물자를 지원했다. 호주 교포이면서 미국 시민권도 갖고 있는 리씨는 그동안 북한의 은하·대성총국과 거래해 왔다.

진로그룹 또한 북한 용강 식음료 공장 투자 사업을 명분으로 내세워 유사한 형태로 대북 물자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시사저널〉이 96년 11월 처음 보도하려다 청와대·안기부의 압력으로 기사화하지 못했다가 97년 3월에 보도한 이른바 ‘청와대 밀가루 북송’ 사건은 96년 4∼11월에 남북한간 뒷거래로 진행된 대북 비밀 지원 사업이라는 ‘빙산’의 일각이었던 셈이다.
안기부와 검찰은 96년 북풍이 남북한 뒷거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이같은 결정적 물증(녹음 테이프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난 3∼5월에 진행된 1차 북풍 사건 수사 과정에서 확인했다. 이 테이프에 녹음된 대화 당사자들이 최고위급 인사들이기 때문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쉽게 확인된다.

이 테이프에 실린 대화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는, 대화에 나오는 기업들과 그 기업들이 물자를 보낸 시점과 수량 등이, 당시 관련 기업들이 중국에서 무역회사를 통해 물자를 보낼 때 작성한 화물 송장과 수출 증명서 같은 근거 서류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 당국은 95년 지자체 선거 직전에 ‘쌀 주고 뺨 맞은’ 이후 95년 9월 베이징 쌀회담(이석채-전금철)마저 결렬되자 정부 차원은 물론 민간 차원의 대북 식량 지원을 중단했으며, 더구나 96년 9월은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따라서 잠수함 침투 사건의 와중에서 물밑으로 식량을 지원했다는 것은 남북 지도부 간의 뒷거래가 아니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당초 거래에서 약속받은 물량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녹음 테이프에는 북한 고위층이 이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대목도 들어 있다. 이같은 발언은 96년 6월 ‘남북한 지도부 공모설’을 처음으로 공식 제기한 고 조영환 박사가 YS 정부의 대북 밀사였던 김양일씨한테서 들은 북한 고위 관계자의 발언과도 일치한다(40쪽 딸린 기사 참조). 한국측이 당초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물자 북송이 장기화하면서 비밀 거래가 노출될 위험에 처했거나, 예기치 못한 잠수함 침투 사건이 불거져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리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그토록 배척하던 YS 정부의 ‘반민족 행위’에 가담했을까. ‘신뢰할 수 있는 출처’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선 극심한 식량난에 처한 북한의 처지에서는 식량 지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당국간 비밀 지원이었기에 자존심이 상할 이유도 없었다. 또 지자체 선거에서 참패한 YS 정부가 총선에서도 패할 경우, 북한으로서는 ‘다루기 쉬운’ YS 정부가 곤경에 처하고, 그렇게 되면 ‘상대하기 껄끄러운’ DJ가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북한한테는 YS를 적당히 돕는 것이 꿩 먹고 알 먹는 기회였다.”

당시 여권의 핵심 수뇌부는 이수성 총리·권영해 안기부장·김광일 비서실장 체제였다. 당시 안기부 간부와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뒷거래에 개입한 인사 대부분은 현직에서 물러났다. 현재 한나라당 중진인 당시 신한국당 중진 의원은 여전히 총풍 배후 의혹을 받고 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YS 또한 사전 또는 사후 인지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런 의혹들을 규명하는 것은 이제 DJ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것은 지난 50여 년간 지속된 남북한의 ‘적대적 의존 관계’라는 분단의 사슬을 끊고 ‘평화적 공생 관계’로 전환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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