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분양원가 공개하소서”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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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정치 풍자 코미디 ‘제17대 어전회의’ 인기몰이
시청자들의 ‘정치혐오증’ 때문에 정치는 오락 프로그램의 좋은 소재가 못 되었다. 외국에서는 정치 풍자 코미디가 자리 잡혀 있지만 한국 방송에서는 정치인 목소리 흉내나 정치인의 캐릭터를 패러디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본격적인 정치 풍자 코미디는 없었다. 그런데 감성 정치 바람으로 정치가 가벼워지면서 정치 풍자 코미디도 새롭게 둥지를 틀고 있다.

봄철 프로그램 개편을 하면서 KBS는 본격적인 정치 풍자 코미디를 시작했다. 바로 <쇼 행운열차>의 ‘제17대 어전회의’ 코너다. 이 코너는 조선 시대 당쟁에 빗대어 정치권의 행태를 풍자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패러디한 옥종대왕(정종철 분)과 영의정 고건대감(박준형 분)을 비롯해 열린파(황승환) 나라파(이계인) 민노파(조수원) 민주파(황기순) 자민파(최병서) 대감이 출연한다.

지난 6월19일, ‘제17대 어전회의’ 코너의 제작 현장을 찾았다. 제작진과 출연진은 한 주간 가장 이슈가 되었던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아파트 분양원가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지 토론하고 있었다. 이 날 어전회의는 의금부에 끌려가 ‘심통(心痛)을 가슴에 안고 가지 않도록 관대한 조처를 취해달라’고 사정한 자민파 영수와 ‘가마떼기’로 받은 돈으로 천막당사 시절을 마감한 나라파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어전회의로 들어가자 나라파 대감이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 국민투표를 하자고 주장한다. 이에 옥종대왕이 필요 없다고 묵살하자 영의정인 고건대감이 반기를 든다. 고대감은 ‘전하가 약속한 내용이다. 인터넷에 동영상이 뜨고 있다’고 충고한다. 고건대감은 ‘초가집 분양원가’ 공개 문제도 따지고 든다. 민노파 대감은 분양원가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백성에 대한 사기극’이라며 옥종대왕을 비난한다. 열린파 대감도 분양원가를 공개해야 한다며 옥종대왕에게 ‘계급장 떼고 토론하자’고 반발한다. 옥종대왕은 과일 안주 원가를 공개하면 누가 과일 안주를 먹겠느냐고 말한다.

‘제17대 어전회의’ 장덕균 작가는 “정치 풍자 코미디 대본은 쓰기가 쉽다. 소재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매주 사고를 쳐서 패러디의 소재를 공급해준다”라고 말했다.

각 정당의 정치 행태에 따라 역할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기 때문에 출연진은 정치권 소식에 민감하다. 대통령 탄핵에 정치적 도박을 걸었다가 총선에서 참패한 민주당은 카지노로 재산을 날린 코미디언 황기순씨가 패러디하고 있는데, 그는 “신문에 민주당 기사는 거의 없다. 도대체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민주당이 안 움직이니 내 역할도 작아진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자민파 대감을 맡고 있는 최병서씨는 “자민련은 패러디할 게 없어서 내내 조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박근혜 대표를 패러디하고 싶다”라고 말했다가 담당 PD에게 자민련이 해체될 때까지는 그냥 하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17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코너에도 탄력이 붙었다. 옥종대왕 역을 맡고 있는 정종철씨는 “정치인들이 또 정치를 싸움판으로 만들면 정치인 이종격투기 코너로 바꾸자”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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