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응징'으로 막 내린 3인의 추적극
  • 朴晟濬·金恩男·崔寧宰 기자 ()
  • 승인 1996.11.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두희 추적 30년, 곽태영· 권중희·박기서 씨 ‘이구동성’…<시사저널> 여론조사 결과 “안씨 살해는 잘못” 63.6%
백범 암살에 대한 응징은 결국 ‘피의 복수’로 끝을 맺었다. 백범 김 구를 암살해 ‘민족 반역자’라고 지탄 받아온 안두희씨(79)가‘민족 정기’라는 대의 명분을 내건 한 버스 기사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안씨로서는 65년 12월 곽태영씨(60)에게 꼬리가 잡혀 강원도 양구에서 첫 테러를 당한 이래 3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시달리던 끝에 맞은 최후였다.

비극으로 끝맺은‘역사 심판’ 드라마의 주역은 곽태영·권중희·박기서 세 사람이다. 이들은 육상 계주 경기에서 주자들이 바통을 주고 받듯 번갈아 안씨를 위해하여 개인의 힘으로 역사를 심판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자 나섰다. 최후의 계승자는 박기서씨(46)로 결론 났다.

안두희씨가 10월23일 오전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경기도 부천시 소재 소신여객 버스 운전기사들은 한결같이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안씨를 죽인 문제의 살인범이 소신여객 직원들 가운데서도 평소 책임감이 강하고 주어진 일만 묵묵히 하기로 소문난 박기서씨였기 때문이다.

소신여객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씨는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다. 소신여객 총무부 장영집 상무는 박씨가 내성적인 편이었으며, 근무 태도는 성실했다고 말한다. 동료 운전기사들의 증언도 일치한다. 박씨와‘형님’‘아우’ 하며 친하게 지낸 한홍도씨(38)는 “친한 동료들과는 가끔 술자리도 함께 하고 등산도 가고 잘 어울렸지만 대체로 과묵한 편이었다. 일에는 부지런한 편이어서 다른 동료들이 한 달에 보통 15일 정도 근무할 때 박씨는 18일 정도 근무했다. 성격이 워낙 섬마을 선생님 같아서 사람을 죽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살인 소식을 들었을 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기서씨가 안씨를 죽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사건 당일 아침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뒤 곧장 안두희씨를 찾아가 준비해간 ‘정의봉’으로 안씨의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 안씨를 살해한 직후 박씨는 가쁜 숨을 달래며 그가 평소 존경해온 또 한 명의 안두희 추적자 권중희씨(60·민족정기구현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저…박기서…지금…안두희 집에…” 박씨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권씨는 이 날 아침 일찍 박씨로부터 ‘안씨를 찾아간다’는 전화를 받은 상태였다. 잠결에 받은 전화라서 별 생각 없이 그저‘알았다’고만 했던 권씨는 조금 뒤에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숨을 헐떡거리는 박씨로부터 다시 전화를 받은 것은 서둘러 안씨 집으로 향하던 아들의 차 안에서였다. 권씨는 전화를 받는 순간‘사단’이 난 것을 직감했으며, 그것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박씨가 이미 안씨를 살해하고서 이 사실을 주임 신부에게고백하기 위해 자리를 뜬 뒤였다.

안두희씨를 살해한 박씨는, 한학을 공부하여 한때 훈장 노릇도 했던 부친 박승봉씨(작고)의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가 친척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씨는 효성이 극진하고 욕설 한 번 입에 담지 않은 성격이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으나 박씨 가족은 단란했다. 박씨는 그저 성실하게 사는 보통 가장이었다.
하지만 박기서씨가 안씨를 죽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사건 당일 아침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뒤 곧장 안두희씨를 찾아가 준비해간 ‘정의봉’으로 안씨의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 안씨를 살해한 직후 박씨는 가쁜 숨을 달래며 그가 평소 존경해온 또 한 명의 안두희 추적자 권중희씨(60·민족정기구현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저…박기서…지금…안두희 집에…” 박씨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권씨는 이 날 아침 일찍 박씨로부터 ‘안씨를 찾아간다’는 전화를 받은 상태였다. 잠결에 받은 전화라서 별 생각 없이 그저‘알았다’고만 했던 권씨는 조금 뒤에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숨을 헐떡거리는 박씨로부터 다시 전화를 받은 것은 서둘러 안씨 집으로 향하던 아들의 차 안에서였다. 권씨는 전화를 받는 순간‘사단’이 난 것을 직감했으며, 그것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박씨가 이미 안씨를 살해하고서 이 사실을 주임 신부에게고백하기 위해 자리를 뜬 뒤였다.

안두희씨를 살해한 박씨는, 한학을 공부하여 한때 훈장 노릇도 했던 부친 박승봉씨(작고)의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가 친척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씨는 효성이 극진하고 욕설 한 번 입에 담지 않은 성격이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으나 박씨 가족은 단란했다. 박씨는 그저 성실하게 사는 보통 가장이었다.

하지만 박기서씨가 안씨를 죽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사건 당일 아침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뒤 곧장 안두희씨를 찾아가 준비해간 ‘정의봉’으로 안씨의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 안씨를 살해한 직후 박씨는 가쁜 숨을 달래며 그가 평소 존경해온 또 한 명의 안두희 추적자 권중희씨(60·민족정기구현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저…박기서…지금…안두희 집에…” 박씨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권씨는 이 날 아침 일찍 박씨로부터 ‘안씨를 찾아간다’는 전화를 받은 상태였다. 잠결에 받은 전화라서 별 생각 없이 그저‘알았다’고만 했던 권씨는 조금 뒤에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숨을 헐떡거리는 박씨로부터 다시 전화를 받은 것은 서둘러 안씨 집으로 향하던 아들의 차 안에서였다. 권씨는 전화를 받는 순간‘사단’이 난 것을 직감했으며, 그것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박씨가 이미 안씨를 살해하고서 이 사실을 주임 신부에게고백하기 위해 자리를 뜬 뒤였다.

안두희씨를 살해한 박씨는, 한학을 공부하여 한때 훈장 노릇도 했던 부친 박승봉씨(작고)의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가 친척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씨는 효성이 극진하고 욕설 한 번 입에 담지 않은 성격이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으나 박씨 가족은 단란했다. 박씨는 그저 성실하게 사는 보통 가장이었다.
이준희 신부 “박기서씨는 정의감에 불탔다”

그러나 박씨에게는 한 가지 남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남산에 세운 안중근 의사비의 비문을 베껴 품속에 지니고 다녔으며, 틈 나는 대로 〈백범일지〉를 탐독하는 등 애국 지사와 독립운동가를 따르는 일에 유달리 열심이었다.

박씨가 언론에 밝힌 안두희씨 살인 동기는 순전히 애국심과 백범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그는 경찰에 자수한 직후 “의로운 일을 했다”라며 후회하지 않았다. 박씨로부터 고백 성사를 받은 부천시 천주교 심곡본동 성당 이준희 신부(51)도 “고백 성사하는 그의 모습은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으며 매우 침착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안두희씨와 같은) 민족 반역자를 내버려둔 것은 국민의 수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현대사의 비극이 대부분 광복 직후 사회상이 극도로 혼란했던 시기에 일어났듯이, 살인극으로 막을 내린 안두희씨 응징 드라마의 출발점 역시 백범이 피살된 49년 6월26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에 분노하여 가장 먼저 응징을 다짐하고 이를 행동에 옮긴 사람은 곽태영씨이다.

곽씨가 백범 암살범을 응징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곽씨는 “고향인 김제에서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 묘소에 참배를 갔다. 그 때 나는 ‘10년 안에 어떤 일이 있어도 암살의 진상을 밝히고 안두희를 처치해 한을 풀어드리겠다’고 선생님께 다짐했다”라고 그 때를 회상했다.

곽씨가 응징 의지를 실천에 옮긴 때는, 안씨를 처단하겠다고 맹세했던 ‘10년 기한’의 마지막 해인 65년 12월이었다. 당시 안씨는 강원도 양구에서 신의기업사라는 군납 회사를 운영해 도내 납세 실적 1~2위를 다툴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행상을 가장해 양구에 잠입한 곽씨는 며칠 동안 안씨집 주변을 배회하며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그 달 22일 ‘거사’를 결행했다. 아침 9시쯤 안씨 집에 침입하여 세수하던 안씨와 격투를 벌인 끝에, 그의 목덜미를 칼로 찌르고 마당에 있던 돌로 머리를 내리쳤다.
안씨는 이 사건으로 뇌수술을 세 번이나 한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2월 곽씨는 춘천지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1심에서 5년 실형을 언도 받았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66년 7월30일 풀려났다. 곽씨는 풀려나자마자 백범기념사업회에 들어가 일하면서 같은해 조직된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조경환)에서 활동했고, 92년 광복회 원로 이강훈씨를 위원장으로 하여 재건된 진상규명위원회에 참여해 지금까지 활동해 오고 있다.

“박기서씨 처벌하되 정상은 참작” 61.4%

곽씨가 안씨를 피습한 사건이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갈 무렵, 백범 암살에 대한 진상 규명 문제를 다시 사회적 관심사로 끌어올리며 ‘민족 반역자’ 응징 드라마의 속편을 연출한 이는 권중희씨(60)다. 87년 3월 서울 마포에서 각목으로 안두희씨를 구타한 사건, 92년 2월 안씨를 강제로 백범 묘소에 참배케 한 사건, 같은 해 9월 안씨를 납치해 경기도 가평의 한 농장에 감금해 놓고 암살 진상에 대해 증언케 한 사건 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주인공이 바로 권씨이다.

권씨와 안씨의 질기디 질긴 악연은, 안씨가 미국으로 도피하기 위해 은밀히 여권을 발급 받았다는 신문 기사가 보도된 81년 12월께 시작되었다. ‘중학교 때 존경하던 백범 선생 암살범이 안두희라는 소리를 듣고 마음 한구석에 응징의 칼을 갈아왔다’는 권씨는, 이 소식을 듣자 안두희씨를 붙잡아 암살의 진상을 자백케 하고, 그에게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사죄를 받아내겠다고 다짐했다.

권씨의 추적 및 응징 작업은, 안씨가 부인과 자녀를 모두 미국에 보내고 서울 가락동의 한 아파트에서 외롭게 숨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83년 본격화하여, 안씨가 박기서씨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은 최근까지 계속되어 왔다.‘사건이 있기 전 권씨를 두번 만난 적이 있으며, 권씨의 책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았다’는 박씨의 진술로 인해 또 한번 주목되고 있는 권씨는, 안씨의 죽음에 대해 “역사 앞에서 솔직하게 진상을 밝혔더라면 그처럼 비참한 죽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안두희씨가 죽음으로써 안씨 개인에 대한 역사 심판 작업은 끝났다. 그러나 이제 곽태영·권중희·박기서 씨가 법적 처벌까지 불사하며 시도해온 안두희씨 응징 작업은, 그 형식과 내용의 정당성, 그리고 의미에 대한 평가를 놓고 오히려 새로운 심판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시사저널〉이 전국 20세 이상 성인 남녀 1천3명을 대상으로 하여 코리아리서치센터와 공동으로 실시한 긴급 여론 조사는 의미 있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조사 대상자의 63.6%가 안두희씨 살해에 대해 ‘잘못한 일’이라고 응답한 반면, 안씨를 살해한 박기서씨에 대한 처벌 정도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조사 대상자의 61.4%가 ‘법대로 처벌하되 정상을 참작해야 한다’고 대답했다(26쪽 도표 참조). 안두희씨 살해를 부정 평가하는 응답자의 75.4%는 그 이유에 대해 ‘어떤 이유로도 살인은 용납될 수 없다’고 응답했다. 결국 여론은 박씨 살인 행위에 대해 정상을 참작할 수는 있지만 법 테두리를 벗어난 응징에 대해서는 결코 정당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민족 정기 회복, 개인의 분노에 맡길 것인가

그러나 당사자들 생각은 다르다. 65년 안두희씨를 찔러 죽이려다 실패한 곽태영씨는“박씨의 테러는 한마디로 장한 거사이다. 정통성을 갖지 못한 역대 정권이 공권력으로 해결하지 못한 일을 박씨가 해냈다”라며 박씨를 옹호한다. 권중희씨 역시 안두희씨를 응징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명백한 민족 반역자를 국가가 처벌하지 않으면 나라도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백범 암살 진상 규명 작업이 민족 정기를 회복하는 일과 직결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그같은 민족사적 과업을 곽씨나 권씨, 그리고 박씨 같은 몇몇 개인의 과격한 분노에 맡겨야 할 것인가. 안두희씨 피살은 이같은 질문에 귀중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