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그룹, 규모 줄였지만 권한은 여전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03.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대 그룹 비서실·기조실, 규모 축소에도 권한 여전…임직원에 ‘성공 지름길’ 각광
90년대 들어서 기조실과 비서실 조직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5대 그룹은 지속적으로 규모를 축소해 왔다. 5대 그룹 대부분이 지금은 백명 안팎으로 줄였다. 최근 경영기획실을 대폭 축소한 SK그룹은, 4개팀 56명의 초미니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또 일부 기능은 계열사에 넘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대우그룹은 95년 인사팀과 환경경영팀을 비서실에서 인력개발원 산하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적 기능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회장을 보좌하고 그룹 전체의 경영 상황을 챙기는 일은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기조실장이나 비서실장은 회사에 잘 들르지 않는 재벌 총수의 역할을 대신한다.

예를 들어 SK그룹의 경우 최종현 회장은 화요일과 목요일을 빼면 회사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주로 워커힐 빌라에 머무른다. 최회장의 오른팔이자 경영기획실장인 손길승 부회장의 임무는 수시로 그곳에 들러 현안을 문서로 보고하는 것이다. 다른 그룹의 경우도 기조실장이나 비서실장이 현안을 보고하기 위해 국내외를 막론하고 회장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

5대 그룹 기조실이나 비서실이 수행하는 기능에도 큰 차이가 없다. 인사팀·재무팀·홍보팀·감사팀·기획팀 등이 5대 기능이다. 물론 회장을 수행하는 본래적 의미의 비서팀도 있으나, 그 기능은 보조 역할에 그친다. 일각에서는 기조실이나 비서실이 회장 근처에 있는 한 그 권한은 여전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기조실이나 비서실의 막강한 힘은 회장실과 같은 층이나 아니면 아래층에 위치한 이 기구들의 지리적 여건에서 나온다는 견해도 있다(그렇다고 실무자들이 실제로 회장을 대면할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실무자는 회장 집무실의 구조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기조실이나 비서실은 최종적인 의사 결정 기구가 아니다. 그 위에 총수가 있고, 또 사장단회의나 운영위원회라는 이름의 집단 협의체도 있다. 국내 5대 그룹의 경우 예외 없이 사장단회의나 운영위원회가 주 1회씩 열려, 그룹과 관련된 현안을 협의한다. 그러나 상당수 사안의 경우 이미 방향이 결정되어 있으며, 사장단회의나 운영위원회에서 격론이 벌어지는 일은 없다. 정부로 치자면, 정책 결정에서 각 부처의 장이 모이는 국무회의보다는 청와대 비서실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수행하는 기능 자체는 비슷하지만, 기조실이나 비서실 권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5대 그룹 간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어떤 그룹에서는 사실상 의사 결정 기구에 해당하지만, 어떤 그룹에서는 순수한 의미의 참모 조직에 가까운 편이다. 비서실이 가장 먼저 들어선 삼성그룹이 아직도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이학수 비서실장과 지승림 기획홍보팀장 등 비서실의 실세들이 모여 방향을 정하면, 이 결정은 계열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반면 현대그룹과 대우그룹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권한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두 그룹에서도 기조실이나 비서실의 5대 기능은 모두 수행하지만, 총수들의 관심 사항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축적해 보고하는 면이 더욱 강하다. 요즘 같으면 새 정부의 재벌 정책이나 계열사 정리 같은 문제들이다. LG와 SK 그룹은 삼성과 현대·대우의 중간 정도라고 보면 된다.

5백명이 채 안되는 5대 그룹 기조실이나 비서실에 근무하는 것은 50만명에 육박하는 5대 그룹 임직원 모두의 꿈이었다. 파견 근무가 끝나고 나면 원래 계열사로 돌아가 탄탄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곳에서 근무하는 것이 성공적인 경력 관리의 필수 요건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 실무자들을 통해 기조실이나 비서실의 중요한 판단 사항, 즉 그룹의 주요 결정이 계열사에 유출되는 일도 생겼다. 삼성그룹에서는 이 때문에 지난해 비서실 근무가 끝나고 나면 소속사를 바꿔 복귀하도록 조처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막강한 비서실을 지원하는 희망자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