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부활한 신출귀몰 ‘다모’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r)
  • 승인 2004.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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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비밀 여자 경찰 ‘다모’가 부활했다. 나가요 걸·마사지 걸·포르노 배우로 위장 취업해 ‘적군’을 무수히 베어버린 하귀진 경사. 그녀는 2003년 한 해 동안 범죄자 1백53명을 소탕했다. ‘열 남자 경
조선 시대 포도청에 속한 비밀 여자 경찰, 다모(茶母)가 부활했다. 지난 7월1일 경찰청이 여경 창설일을 맞아 제1회 다모 대상을 선정한 것이다. 주인공은 부산지방경찰청 여경기동수사대 하귀진 경사(32·사진).

그녀는 드라마 <다모>의 채옥을 쏙 빼닮았다. 키 171cm, 몸무게 52kg에 검도 2단. 채옥만큼 변신에도 능하다. 하경사는 마사지 걸, 나가요 걸, 심지어 포르노 배우로 위장해 적진에 뛰어들었다.

2003년 한 해 동안 그녀가 소탕한 범죄자는 1백53명. 대부분이 여성을 상대로 한 성범죄자, 가정폭력 사범이었다. 전국 여경 3천5백24명 중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하경사가 자주 하는 말이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대신 30년 동안 아내를 구타한 폭군 남편, 어린이를 성추행한 변태 아저씨, 원조 교제를 일삼은 마초 등에게는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악을 베는 데 그녀는 주저하지 않는다. 때로는 ‘종사관’도 들이받는다. 그녀가 신청한 구속영장을 검찰이 반려할라치면, 검사를 찾아가기 일쑤다.

그녀의 별명은 ‘하리’. 부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여성 범죄를 해결하는 ‘마타 하리’라고 해서 붙여졌다. 다모 대상을 수상한 다음날인 7월2일 부산지방경찰청을 찾았을 때, 동료들은 그녀를 이제 ‘다모’라고 불렀다. 그녀의 황보윤(이서진 분)은 부산강서경찰서 신대헌 경감이다.

할아버지가 지어준, 귀한 보석이 되라는 이름값을 하게 되었다는 하형사. 좌충우돌한 모난 돌이 보석이 되어가는 과정을 들어보았다.
나가요 걸(1999년 7월15일):첫 번째 위장 잠입이었다. 동료 형사들 앞에서 몇 번을 연습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귀진 형사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부산시 수영구 광안동 소재 한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전형적인 보도방. 조그만 사무실에 ‘나가요 걸’ 서너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업주 정 아무개씨가 그녀를 맞았다. 당시 막내 형사였던 그녀가 맡은 임무는 보도방의 영업 형태와 사무실 구조를 알아내는 것.

“이름이 뭐냐?” 정씨가 물었다. 침을 삼킨 하형사는 “하수진입니다”라고 답했다. “누구 소개로 왔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하형사는 당황했다. 첫 번째 고비였다. 연기가 어설프면 들통 난다. 들통 나면 혼자 감당해야 한다. 면티에 청바지 차림인 그녀는 맨몸이었다.

소지품 검사를 할까 봐 호신용 무기를 지니지 않았다. 30분 안에 나오지 않으면 급습한다는 약속만 한 채, 남자 형사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급함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서면에 있는 은주 소개로 왔습니다.” 그녀는 아주 흔한 이름을 댔다. 업주 정씨는 속아넘어갔다. 윤락 1회당 25만원, 소개료는 7만원으로 하는 등 구체적인 구두 계약이 이루어졌다.

태연하게 답변하면서 그녀는 이들이 빠져나갈 비상구 등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오늘 저녁부터 당장 나와라.” 면접은 끝났다.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현기증이 날 만큼 아찔했다. 곧바로 동료 형사들이 급습했다. 15명 전원을 일망타진했다.
하형사는 1995년 8월12일 경찰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경남 합천 출신으로 광주대 행정학과와 중앙경찰학교(77기)를 졸업한 그녀의 첫 근무처는 민원실이었다. 면허시험장 근무를 거쳐 1999년 3월31일 기동수사대 형사계 외근요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편한 내근직을 뿌리치고 형사계를 지원한 이유는 단순하다. “제가 숫자에 약해요.”

보도방 위장 잠입 이후 그녀는 마사지 걸, 호빠(호스트 바) 고객으로 위장했다. 변신이 거듭될수록 대담해졌다. 포르노 배우로 위장했을 때 그녀는 스스럼없이 “2 대 1로 찍자. 돈만 많이 주라”며 업주를 속였다. 업주는 선뜻 시험용 데모 테이프를 찍자며 모텔로 직행했다. 촬영 직전 업주를 검거했다.

난감한 순간도 많았다. 마사지 걸로 취업했을 때, 면접이 끝나자마자 업주가 당장 손님을 맞으라고 다그쳤다. “마사지 기술이라도 배워야죠”라며 둘러댔지만, 업주는 손끝 터치가 중요하지 무슨 기술이냐며 인근 모텔까지 정해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던가? 위기 관리 능력이 타고난 하형사는 “오늘 한 달에 한 번씩 찾는 손님이 왔다”라며 뿌리쳤다.

독사(2000년 3월8일):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용의자는 신출귀몰했다. 하형사는 전국 최대 전화방 조직에 윤락녀 회원으로 등록했다. 업주 김 아무개씨는 휴대전화 번호만으로 영업을 했다. 여대생·가정주부 등 여자 회원만 2백명을 관리했다. 남자 회원은 전국적으로 5백명에 달했다. 생활정보지에 ‘부담 없는 만남, 애인 친구 연결’이라는 광고를 내고 윤락을 알선하는 식이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윤락 기법이었다.

전화번호부 네 권 분량의 통화 기록 추적

하형사는 위장 회원이 되어 업주 김씨와 여러 차례 통화했다. 김씨도 용의주도했다. 노숙자 명의로 되어 신원 파악이 불가능한 ‘대포 폰’을 사용했다. 하형사가 손에 쥔 단서는 휴대전화 번호와 김씨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하형사는 3개월치 통화 기록을 뽑았다. 전화번호부 네 권 분량의 통화 기록이었다. 추적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마타 하리’ 하형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휴대전화 발신지를 추적해 용의자 김씨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고, 두 달 동안 전화번호를 체크했다. 적어도 두세 번 이상 통화한 곳에 확인 전화를 했다. 휴대전화를 통해 집으로 전화했으리라는 심증은 적중했다.

딱 세 번 통화했던 번호로 하형사가 전화를 걸었는데, 40대 아주머니가 받았다. “혹시 미장원 아닙니까?” 하형사는 둘러댔다. “아닙니다”라며 아주머니가 답변하는 순간, 하형사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무슨 전화야”라며 수화기 저편에서 가늘게 들리는 남자 목소리. 그녀가 두 달 동안 애타게 찾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하형사는 즉각 전호번호 발신지인 한 아파트를 찾았다. 전화번호 소유자는 전화를 받은 여자였다.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해 하형사는 주차장부터 뒤졌다. 흔히 주차된 자동차에 연락할 수 있는 휴대전화 번호를 남긴다는 습관에 착안했다. 용의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차량에 연락처를 남겨둔 것이다. 하형사는 무릎을 쳤고, 용의자가 사는 아파트를 급습했다.

이 사건을 해결하자, 동료들은 마타 하리 하형사에게 별명 하나를 더 붙여주었다. ‘독사’. 하형사는 이 사건을 해결하면서 단짝을 만났다. 동갑내기 형사 이혜정 경장과 호흡을 맞춘 첫 작품이었다.

부산지방경찰청 여경기동수사대 소속 여형사는 4명. 남자 형사는 5명이다. 둘은 현재 최장기 근무자다. 눈빛만 보아도 통할 만큼 호흡이 척척 맞는다. 지난해 하형사가 올린 1백53명 검거 실적도 사실은 이혜정 형사와 짝을 이루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나가요 걸로 위장할 때도, 포르노 배우가 될 때도 둘은 믿음 하나로 함께 취업했다. 이형사는 앳된 얼굴이어서 주로 미성년자 행세를 했다.

다모 대상을 하형사만 받은 것이 배 아프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형사 답변이 걸작이다. “만시지탄이다. 하형사가 받고 넘칠 상이다.” 둘이 함께 ‘얼굴이 팔리면’ 장사 망친다며, 이형사는 사진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둘은 남자 형사들도 부러워하는 우정을 자랑한다.

유언(2000년 12월2일):부산지방경찰청 여경기동수사대로 고발이 접수되었다. 심장병을 앓고 있던 이 아무개씨(당시 41세)가 가슴에 묻어둔 비밀을 털어놓았다. “딸이 초등학생 때 성폭행을 당했다. 범인을 잡아달라.” 이씨는 이 말을 남기고 사흘 뒤 숨을 거두었다. 무덤까지 안고 가려던 어머니 이씨가 눈물을 흘리며 남긴 유언이었다.

당시 하형사는 임신 7개월, 예비 엄마였다. 사연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임신부여서 동료들은 그녀를 수사에서 배제하려 했다. 하지만 하형사가 자청했다. 수사 결과 용의자는 ㄱ양을 협박해 최근까지도 성폭행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3년 동안 ㄱ양은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기동수사대는 잠복에 들어갔다. 용의자가 하교길에 ㄱ양을 협박해 성폭행한다는 진술에 따라 학교 앞에서 잠복했다. 문제는 ㄴ 여중 앞이 허허벌판이어서 형사들이 쉽게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잠복은 하형사가 맡았다. 배가 불룩 나온 임신부가 교문 앞을 왔다갔다하니 누구도 경찰로 의심하지 않았다.

잠복 7일째, ㄱ양이 집으로 가다가 소리를 질렀다. “저 아저씨에요.” 순간 용의자가 달아났다. 하형사는 급히 지원을 요청하고 추적했다. 도망가는 용의자, 뒤를 쫓는 임신부. 쫓기는 용의자도 이상했던지 한참을 뛰다 뒤돌아보며 멈추었다.
쥐가 고양이를 물 참인데, 시치미를 뚝 떼고 하형사가 한 말은 이랬다. “혹시 도를 믿으시나요.” 용의자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었던지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하형사는 계속 시간을 끌었다. 결국 뒤따라온 동료들의 도움으로 용의자를 체포했다. 잡고 보니 변태 용의자는 전직 고등학교 윤리 교사였다. 용의자 황 아무개씨(62)는 3년 동안 ㄱ양과 그 친구들까지 미성년자 3명을 30여 차례나 성폭행했다.

하형사는 지금도 ㄱ양의 근황을 간접으로 듣고 있다. 하형사가 발벗고 나서 ㄱ양을 청소년 쉼터에 보내 치료를 받게 했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인 ㄱ양은 성적이 상위권에 드는 우등생이다.

하형사가 근무하는 부산지방경찰청 1004호에는 어린이방이 꾸며져 있다. 노란 벽지에 인형도 마련되어 있다. 어린이 성 피해자의 비디오 진술을 담기 위한 조사실이다. 주로 하형사와 이혜정 형사가 피해 어린이들과 인형놀이를 하며 진술을 듣는다.

네 살 난 딸을 둔 엄마인 하형사는 앞으로 어린이 성범죄 전문 경찰이 되려고 한다. 그녀는 야간에 남편과 함께 동아대 경찰 법무 대학원에 다니며 전문 경찰의 꿈을 키워 가고 있다.

멍석말이(2002년 6월25일):가정폭력 사건을 수사하다 보면 하형사는 ‘뚜껑’이 자주 열린다. 상습 가정폭력 사범 이 아무개씨(40)를 다룰 때도 그랬다. 18년 동안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했고, 네 차례나 처벌을 받았지만, 이씨는 또다시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구타했다. 하형사는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런데 검찰이 신청한 영장을 반려하려 했다. ‘살다 보면 한두 대 때릴 수 있지, 이걸로 인신 구속이냐.’ 부부 싸움 가지고 경찰서까지 오느냐는 남자 경찰들의 편견이 남자 검사에게도 그대로 배어 있었다.

그럴 때면 하형사는 검찰로 달려간다. 그리고 따진다. “검사님, 영장이 청구되지 않으면 이 여자 또 맞아 죽습니다.” 기동수사대여서 전담 검사가 따로 없고, 강력부 검사들이 수사를 지휘한다. 죽이고 패고 찌르는 조폭들만 다루는 검사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정폭력 사건을 가볍게 여긴다.

하형사가 짜낸 묘안이 멍석말이다. 영장이 나오게끔 폭력 남편에게는 폭력뿐 아니라 명예훼손, 협박 등 적어도 열 가지 이상, 많게는 스무 가지 혐의로 꼼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린다. 하형사의 표현대로 ‘똘똘 말아버린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 벌금형 정도 받으면, 경찰서를 나서는 순간 아내는 또 맞는다.”

그녀는 가정폭력 사범을 다룰 때면 철저하게 피해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대부분 가정폭력 사범은 만성 단계에서 경찰을 찾는다. 맞고 맞아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어서야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은 진단서를 끊을 생각도 못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한다. 하형사는 가정폭력 사범 피해자와 대화를 많이 나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피해자와 동생, 언니가 된다.

가정폭력 사범은 검거 과정보다 진술을 받기가 더 힘들다. 폭력 남편은 폭력 사실을 부인하거나, 기억이 잘 안난다고 얼버무린다. 이때 노하우가 필요하다. 여경기동수사대를 이끄는 박민자 경위는 하형사가 강약을 조절하며 폭력 남편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하형사는 ‘조질 때 조지고, 풀어줄 때 확실히 풀어준다’는 것이다.

그녀의 휴대전화는 쉴 틈이 없다. 지난 5년 동안 현장을 누비며 해결한 가정폭력·성폭력 사범이 6백여 명에 달한다. 전문 킬러로 이름을 날리면서 제보 전화가 빗발치지만, 가장 반가운 전화는 언니들로부터 고맙다며 걸려오는 웃음이 담긴 전화다.

‘열 남자 경찰’ 부럽지 않은 민중의 지팡이, 하귀진 경사의 신화는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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