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범신의 그리스 탐방기
  • 박범신 (소설가) ()
  • 승인 2004.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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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어울림 문화’는 올림픽 정신의 원형
놀라운 것은 아테네가 2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 새로 지은 빌딩들도 있고, 인구도 크게 늘어났으며, 도로들도 많이 개선되었으니, 지금의 아테네가 20여 년 전의 아테네와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내 눈에는 지금의 아테네와 20여 년 전 보았던 아테네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너무도 빠른 변화에 익숙한 서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테네에서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이를테면, 우리에게는 ‘빨리빨리’ 문화가 있고 저들에게는 ‘시가시가’ 문화가 있다. 아테네에서는 서둘러서 되는 일이 없다. 시가시가는 ‘천천히’라는 뜻이다. 노천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켜보아도 이삼십 분은 꼬박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일상 생활의 사이클 자체가 그렇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른다. 가령 공무원이나 대기업에 근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10시경에야 비로소 오전 일과가 시작된다.

진하게 탄 커피인 ‘쁘라뻬’ 한 잔을 아침 식사 대신 천천히 마시면서 시작된 일과는 오후 2시쯤 일제히 정지된다. 간단한 점심을 들고 나면 이내 낮잠 시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공무원·회사원도 예외가 아니다. 거리는 적막하리만큼 텅 빈다. 가게들이 다시 열리는 때는 낮잠 시간이 끝나는 5시부터 8시까지. 저녁 식사는 그러니까 대략 9시쯤 시작되어 일반적으로 11시까지 계속된다. ‘시가시가’ 식사를 즐기는 것이 아테네 스타일이다.

새로 짓는 올림픽 경기장도 나는 보았다. 경기장의 거대한 지붕을 개폐할 수 있도록 설계된 주경기장은 올림픽을 불과 한 달여 앞두고 있는데도 완공을 한참 남겨둔 것처럼 보였다. 도로와 정원이 들어설 자리는 땅이 파헤쳐져 있고, 경기장 내부도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경기장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공항에서 아테네 시가지로 뚫린 고속도로도 공사가 한창이었으며, 마라톤 출발지로 알려진 마라톤 시의 광장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서 올림픽을 위한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서두르는 기미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 ‘과연 올림픽을 치러낼 수 있겠느냐’고 묻자 한 그리스 인부는 크게 웃으면서 ‘관광객들만 그런 걱정을 한다’고 말했다. 시가시가 전통 속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는 조급증에 걸린 듯한 이방인이 오히려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그리스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얼마 전에야 올림픽 주경기장이 완성되었다는 외신을 들었는데, 그것 또한 경기장만 완성되었다는 것일 뿐 외곽 도로와 조경 공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 문명은 청동기 시대에 이미 금속으로 도끼와 단검을 만들어 썼고, 수염을 뽑는 족집게까지 사용했다. 4천5백여 년 전 일이다. BC 14세기의 도시국가에서는 전차 장교들이 이끄는 군대를 갖고 있었고, 문자로 된 주택의 등기문서를 발행했다. 서양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요람으로 알려진 BC 5세기 전후의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은 어느 날 뚝 하고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 아니다. 고대 올림픽의 근간이 되었던 체육대회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 대략 BC 1000년께였다고 알려져 있다. 초기의 체육대회는 나중에 그리스 문명의 핵심으로 발전한 인간 중심의 헬레니즘 문명을 낳았다. 나는 올림피아에서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운동장과 선수들이 드나들던 아치형의 문을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제1회 고대 올림픽이 열린 때는 BC 776년이다.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는 모든 전쟁이 중단되었다. 지금의 스페인 반도로부터 동쪽의 시리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서 선수들이 올림피아로 찾아왔다. 경기장에 오는 데까지만 몇 달씩 걸리는 길고도 험한 도정이었다. 그들은 오직 인간의 위대성을 입증해 보이기 위한 명예를 좇아 그 도정을 참고 견디었다. 승리한 사람에게는 올림피아 산야 어디에서든 잘 자라는 올리브잎으로 만든 월계관을 씌워주었을 뿐, 금메달과 상금은 물론 그 어떤 상도 없었다.

고대 올림픽은 근대 올림픽으로 이어졌다. 이번 아테네올림픽 때 양궁 경기가 열리기로 되어 있는 판아테나이코스 경기장은 1백8년 전 제1회 올림픽이 열렸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사설 학교 ‘뒤키온’이 있었던 곳이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입구 왼쪽에 세워진 대리석판에 역대 올림픽 개최지가 새겨져 있고, 그 맨 끝에는 ‘1988 서울’이 추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라톤 코스가 42.195km로 확정된 것도 1895년 제1회 올림픽 경기에서였다. 제1회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인 루이스는 경기 도중 길가 식당 주인에게 부탁하여 포도주를 한잔 가득 마시고 다시 뛰어 우승했다고 한다. 거대한 페르시아와 싸워 영광스런 그리스의 승리를 거두었던 아테네 평원은 불타는 대지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대지는 메마른 사막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우리의 이봉주 선수가 달려가게 될 길을 아득하게 바라보았다. 6시에 출발한다지만 그리스의 6시 햇빛은 한낮의 햇빛과 같다. 해가 9시쯤에나 지기 때문이다. 이번 마라톤은 아마도 그리스의 강렬한 햇빛과 불타는 대지가 뿜어내는 복사열을 이기는 자에게 우승이 돌아갈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낙관적이다. 우리와 달리 부자와 가난한 자, 젊은이와 노인, 날씬한 ‘쭉쭉빵빵’과 살진 ‘뚱뚱보’ 사이의 경계와 가름에 따른 갈등이 별로 없었다. 가진 것과 생긴 것의 차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다고 한들 그리스 사람들의 낙관주의를 깨뜨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구시가지 포라카 지역에 가면 수많은 노천 카페에서 밤새 그리스 고유의 악기 부주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데, 우리 민족이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달리 그리스 사람들은 춤추기를 좋아해, 흥이 나면 누구든 자연스럽게 일어나 춤을 춘다.

젊은이와 노인과 낯선 이방인이 함께 섞여 춤추다 보면 어느새 붉은 조명 아래 우뚝 선 아크로폴리스 위로 달이 떠오른다. 달빛을 받고 선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파르테논 신전은 정말 장관이다. 아테네에서는 시간의 경계도 없다. 현대의 건물에서 나와 열 발자국만 걸어가면 누구나 2천5백여 년 전의 고대 그리스를 만날 수 있다. 그 현대와 고대 사이에 태양은 불타고 달빛이 흐드러지게 젖으며 부주키 선율이 흐른다. 당신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가만, 그러나 신명으로 몸을 흔들면 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해변가 모닥불 앞에서 추던 바로 그 춤이다. 그러면 그리스가 당신을 끌어안는다.

그리스는 문화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이 아니다. 그곳은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접점이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질은 오히려 우리와 가깝다. 올림픽 경기장 공사가 좀 부실하면 어떤가. 세계인이 함께 모여 시간과 공간의 경계도 지우고 얼굴색과 이념의 가름도 깨뜨리고,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올림픽 정신이 아니겠는가.

소설가 박범신씨는 KBS 올림픽 특집 프로그램 촬영차 지난 6월 약 보름간 그리스 전역을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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