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테러리스트의 항변]다나카 요시미 옥중 인터뷰
  • 태국 방콕·李哲鉉 기자 ()
  • 승인 2000.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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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25일 태국 촌부리 형무소에서 옥중 인터뷰한 지 1년. 다시 다나카 요시미(田中義三·52)씨를 만나기 위해 태국 방콕을 찾았다. 쇼핑 센터와 특급 호텔이 즐비한 방콕 중심가 수쿰빗에서 돈무앙 국제 공항을 향해 자동차로 20분을 달리자 응암웡완 거리에 있는 클롱프렘 중앙 형무소에 도착했다. 다나카 요시미 씨가 갇혀 있는 클롱프렘 중앙 형무소는 얼핏 보면 휴양소처럼 보였다. 열대수가 곳곳에서 자라고 있고 연못까지 조성되어 있었다. 형무소 현관에 다가갈수록 철창 사이로 옅은 황토색 제복을 입은 간수들이 오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형무소 왼쪽 건물에 자리잡은 면회소는 아침 일찍부터 면회객으로 북적였다. 정규 면회 절차를 거쳐 15분 가량 다나카 씨를 만났지만 철창 2개를 사이에 두고 1m 가량 떨어져 있는 데다 한꺼번에 면회객과 수감자 50여 명이 떠들어대서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나카 씨가 알려준 대로 간수에게 천 바트(3만3천원 가량)와 죄수 이름이 적힌 면회 신청서를 건네자 특별 면회가 허락되었다. 대기소에서 20분을 기다리자 간수 한 사람이 다가와 면회 부스로 조용히 데려갔다.

간수를 따라 들어간 7번 면회 부스에는 1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지었던 밝은 미소를 얼굴에 담고 있는 다나카 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기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당신 기사를 촌부리 형무소에서 보았다. 외롭게 싸웠던 시절의 진실을 밝혀줘서 고맙게 생각했다.”손과 발에 채워졌던 수갑과 족쇄가 없었고 죄수복이 갈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달랐다. 일반 면회와 달리 면회 시간이 한 시간이나 주어졌고, 소음도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촘촘히 짜인 철창을 사이에 두고 면회객을 맞아야 했다.

1970년 일본항공 소속 요도호를 공중 납치해 북한으로 넘어간 적군파 테러리스트 다나카 씨는, 1996년 1월 북한에서 제조된 초정밀 위조 지폐 슈퍼K를 사용했다는 혐의로 미국 재무부 산하 비밀수사국(the Secret Service)과 캄보디아 경찰에 붙잡혀 태국으로 압송되었다. 체포된 곳은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 지대. 그는 비밀리에 방콕 돈무앙 공항을 거쳐 태국으로 끌려와 조사를 받았다. 미국 비밀수사국은 처음에 태국을 거쳐 미국으로 그를 데려가려 했다. 이를 막기 위해 그는 우연히 촌부리 형무소를 찾은 후지TV 기자에게 신분을 밝혔고, 요도호 납치범이 태국 형무소에 있다는 사실이 일본 전역에 보도되자 비밀수사국은 그를 미국으로 데려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그후 그는 지난 4년 동안 태국의 형무소를 전전했다.

<시사저널>은 지난해 2월18일 발행된 486·487 합병호‘억울한 희생자인가 북한 공작원인가’라는 기사에서 다나카가 위조 지폐 유통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가 무죄라는 것을 언론 매체로서는 처음으로 주장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 문인 들은 이 기사를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해 한동안 인터넷 홈페이지(www.zorro-me.com/miyazaki)에 게재하고‘이 기사만큼 진실에 가깝게 보도한 일본 언론은 없었다. 독재와 싸워 언론의 자유를 쟁취해 언론의 자유가 갖는 소중한 가치를 알고 있는 한국 언론은 달랐다’라고 덧붙였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진실은 승리했다. 태국 촌부리 지방법원은 지난해 6월13일 초정밀 위조 지폐 사용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동안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로 촌부리 검찰청 소속 뚱차이 검사가 제시한 것은 미국 비밀수사국이 캄보디아에 있는 다나카 씨의 사무실에서 압수했다는 초정밀 위조 지폐 1천2백39장 가운데 다나카 씨의 지문이 찍힌 위조 지폐 1장과 다나카 씨 동업자인 고다마 쇼고의 자백이었다.

다나카 지원 단체는 압수된 위조 지폐에 묻어 있는 다나카의 지문이 위조되었다는 감식 전문가의 소견을 얻어냈다. 위조 지폐 1천2백39장 가운데 오직 1장에서만 다나카 씨 지문이 나왔고, 그 돈이 담긴 비밀 가방에서는 지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자 가장 유력한 증거는 증거 효력을 잃게 되었다. 다나카 씨와 함께 북한산 초정밀 위조 지폐 슈퍼K에 관여했다고 자백한 고다마 쇼고 씨도 재판 도중 자백을 번복했다. 심지어 그가 범죄를 자백할 때 변호사와 통역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쇼고 씨의 자백도 증거로서 효력을 잃게 되었다.
일본 정부, 강제 송환 별러

무죄 판결을 확정하다시피 한 것은 평범한 일본인 관광객의 증언이었다. 미국 비밀수사국과 캄보디아 경찰은 위조 지폐 유통범으로 추적하고 있던 하야시 쇼지라는 인물이 다나카라고 단정했다. 캄보디아 경찰이 다나카를 체포한 후 작성한 조서에‘하야시 쇼지’‘36년 7월 9일생’이라고 기록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1936년 7월9일생인 하야시 쇼지라는 일본인이 촌부리 법정에 나와 자기 신원을 밝혔다. 더욱이 그는 위조 지폐 유통에 간여한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 다나카 씨가 체포될 때 태국 파타야를 돌아다닌 평범한 관광객이었다.

1999년 6월13일 무죄 선고가 내려졌고, 고다마 쇼고 씨는 12월3일 석방되었다. 하지만 다나카 씨는 아직까지 형무소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비행기를 공중 납치한 죄로 일본 정부가 강제 송환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그는 촌부리 형무소에서 방콕 클롱프렘 중앙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4년 동안 싸운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다나카 씨는 얼굴에 깊이 팬 주름 사이로 배어나는 근심을 숨기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요도호 납치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그를 일본으로 강제 송환하려 한다. 다나카 씨는“공소 시효 중지라는 법규를 갖고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일본과 한국밖에 없다. 이미 30년이 지나 기억마저 희미한 행위를 단죄할 증거가 충분할지도 의심스럽다”라고 말했다.

다나카 씨는 정치범으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정치 신념에 따라 행동한 정치범은 흉악범이 아니라면 국제 난민으로 취급받거나 망명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국제 관례이기 때문이다. 다나카 씨는 정치범으로 인정받은 후 유엔고등난민판무관실(UNHCR)에 국제 난민 자격을 신청하거나, 스위스 또는 북한으로 망명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일본으로 끌려가면 5년이 넘는 징역형을 살거나 잘못하면 사형 선고까지 받을지도 모른다. 다나카 씨는 강제 송환을 피하기 위해 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했다. 일본 정부가 국론이 분열될까 봐 그를 일본으로 송환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일부 다나카 지원 세력의 주장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는 무죄 판결을 받은 지 2개월이 지난 1999년 8월13일 일본 지원 단체의 도움을 받아 태국 변호사를 선임하고 소장을 접수시켰다. 그는 태국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태국 파타야에서 위조 지폐를 유통시켰다는 누명을 벗었고, 태국과 일본 사이에 범죄인 인도 협정이 없으므로 자기는 당장 석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국 사법 당국으로서는 그가 골칫거리이다. 무죄 판결이 났으니 석방해야 하지만 비행기 납치라는 중죄를 저지른 테러리스트를 섣불리 풀어주기도 꺼림칙하다.

일본 정부는 태국 법정이 그를 정치범으로 인정해 석방할까 봐 우려한다. 따라서 일본 경찰은 비행기 납치 외에 몇 가지 범죄 혐의를 덧씌웠다. 일본 경찰은 메이지 대학생 시절 경찰서 습격을 두 차례나 주도했다는 혐의를 추가했다. 다나카 씨를 일반 형사범으로 분류하려는 것이다. 공공기관을 파손한 이는 정치범이 아니라 형사범으로 취급되는 국제 관례를 감안한 듯하다.

다나카 씨는“언젠가 떳떳하게 조국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지막 꿈이다”라고 말했다. 자유인의 몸으로 조국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은 다나카 씨의 꿈이 실현될지는 의문이다. 비행기 납치라는 중죄를 자행한 젊은 날의 실수가 평생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질 것이다. 그가 30년이라는 망명 생활로 다 갚기에는 너무 큰 죄를 저지른 것일까? 늙고 지친 테러리스트는 자유를 찾기 위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젊은 시절 못지 않게 힘든 싸움을 치러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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