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게놈 지도, 윤리 시대 종언인가
  • 李文宰 기자 ()
  • 승인 2000.07.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간 게놈 지도 완성 발표… 소비자 처지에서 생명공학 시대의 ‘그늘’ 논의 시급
왜대학이나 연구기관이 아니고 백악관이었을까. 왜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과학계나 의학계가 아니고 뉴욕 월가에서 먼저 나돌았을까.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두 질문이 이른바 생명공학의 시대가 드리우고 있는 커다란 그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앞의 두 질문은 분자생물학자나 거대 기업가 그리고 제1 세계 정치 지도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는 아직 잘 보이지 않는 생명공학 시대의 과거 현재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열어준다.

지난 6월27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오늘 우리는 신이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면서 사용한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위대한 발견을 소수의 선택받은 나라가 독점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백악관 기자회견에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통신 위성을 통해 참여하여, 인간 게놈 지도 초안이 완성된 것을 축하했다.

생명공학은 권력과 자본의‘아들’

클린턴 대통령의 발표가 나오자마자 언론들은 ‘질병으로부터의 해방’과 ‘IT(정보통신 기술)에서 BT(생명공학 기술)로!’라는 구호를 일제히 내걸기 시작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에 참여하고 있는 영국 월컴 트러스트(재정지원기관)의 마이클 덱스터 회장은 인간 게놈 지도가 인간의 달 착륙을 능가하는 업적이라고 말했다.

인간 게놈 지도 초안이 작성되기 전부터 생명공학 시대에 대한 논란은 벌써부터 있어 왔다. 질병과 노화로부터의 자유와 식량 문제 해결 등이 생명공학 시대 예찬자들이 내놓은 희망에 찬 설계도라면, 유전자 계급 사회와 생태계 교란 등이 반대론자들의 우려이다. 과학 기술 분야에서는 ‘가능한 것은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과학 전문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 엮은 신간 <맞춤 인간이 오고 있다>(황현숙 옮김, 궁리 펴냄)는 앞으로 10년 안에 목격하게 될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다음과 같이 꼽았다.

복제 인간(과학자들은 비밀리에 실험이 진행 중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인공자궁. 인공 장기. 후각과 촉각이 덧붙여진 가상 현실. 기성복처럼 만들어지는 맞춤복. 질병 예방 식품. 원하는 근육을 만들 수 있는 유전자 백신. 미국 신경외과 의사인 로버트 화이트는 현재 수준으로도 한 사람의 머리를 다른 사람의 머리에 이식할 수 있으며, 2250년에는 맞춤형 아기가 태어날 수 있다고 호언한다.
생명공학 시대는 인간 자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다위니즘에 토대를 둔 물리·화학 시대였던 산업 시대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유전과학에서 솟아난 생명공학 시대는 전적으로 다르다. 혁명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거니와, 인간이 제2의 창조주가 되려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지배를 넘어 자연을 발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과학 기술과 사회 변화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해온 제레미 리프킨이 명명한 ‘생명공학 시대’는 과학 기술이 주도한 것은 아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백악관-월 가가 이루는 삼각형이 은유하고 있듯이, 이 새로운 시대는 거대 권력과 자본의 아들이다. 그것도 과잉 보호를 받은.

생명공학 시대는 1930년대에 분자생물학과 더불어 출생했는데 이 분자생물학이 바로 ‘맞춤형 아기’였다. 김환석 교수(국민대·기술사회학)가 <녹색평론>(제34호)에 기고한 <양의 복제, 시민의 침묵>에 따르면, 록펠러 재단에 초빙된 물리학자 와렌 워버가 물리학이나 화학에 비해 처져 있던 생물학을 근대화하기 위해 막대한 재단 자원을 투입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분자생물학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급성장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분자생물학은 생물학에서 각광받는 분야로 정착했다. 1974년 과학 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인 ‘아실로마 선언’이 나왔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분자생물학자들은 기업과 손잡기 시작했다.

생명공학의 아버지는 화학-석유-비료-식품-곡물-제약 분야의 거대 기업들이라는 김환석 교수의 지적은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거대한 생명과학 회사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리학자이자 미래학자인 프리먼 다이슨도 과학과 기업(자본)과의 악수를 예의 주시해 왔다. 대중이 굳게 믿고 있던 과학의 순수성과 자율성이 종언을 고한 것이다. 프리먼 다이슨은 <상상의 세계>에서 응용 과학은 물론 순수 과학도 연구기금을 관리하는 위원회의 권력 아래에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자가 국가와 기업이 관리하는 연구 기금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연구 과정이나 결과는 비밀에 부쳐진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 비밀주의가 생명공학 시대의 가장 큰 장애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생명공학의 밝은 미래에 관한 보고서는 과학자와 기업가와 정치 지도자에게서 나온다. 시장 논리에 편입된 과학기술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학계의 목소리는 무시된다.
소비자인 시민이 적극 개입해야 할 때

제레미 리프킨은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전공학을 대중적인 관심사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전문가 집단의 밀실에 가두어두지 말고 공개적인 토론 마당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리프킨은 생명공학 시대를 인준하고 있는 ‘새로운 우주론’이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 전에 소비자인 시민이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과 자연을 새롭게 규정하는 생명공학 시대의 우주론은 유전자 결정론을 앞세운다. 유전자가 개인의 생각·성격·기질·질병(정신질환까지도)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생명공학 시대는 환경에 비중을 두는 후천성론에서 선천성론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생명공학 시대는 ‘존재의 철학을 과정의 철학’으로 대체한다. ‘유기체는 예측하고 목적 지향성을 갖는다’는 명제로 요약되는 화이트 헤드의 과정철학은 생물과 정신을 ‘변화를 처리하는 개념’으로 파악한다. 이같은 새로운 자연 개념은 자연 착취를 정당화한다고 제레미 리프킨은 지적한다. 인간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보 시스템을 제어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유전자 오염, 전지구적 불상사 야기할 수도

프리먼 다이슨은 ‘과학적 예언은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를 섞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보화 혁명과 신경공학 혁명과 더불어 진행될 생명공학 시대는 (가진 자의) 기술과 (가난한 자의) 필요 사이의 간격을 더 넓힐 것이라고 다이슨은 ‘예언’한다. 그는 기술과 필요 사이를 좁히는 것이 바로 윤리의 몫이라고 지적한다. 다이슨은 이렇게 말한다. “과학의 결과가 부자들에게 장난감을 제공할 때 과학은 악을 위해 봉사한 것이고, 과학의 결과가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때 과학은 선을 위해 헌신한 것이다”.

김환석 교수에 따르면, 최근 유럽에서는 시민들이 ‘합의회의’라는 제도를 통해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에 참여하고 있다. 덴마크에서 시작된 이 시도는, 정치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는 과학기술적 주제를 놓고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조직화한 공개 토론을 벌이는 방식이다. 과학이 자본과 손잡은 뒤로 강화된 비밀주의의 벽을 무너뜨리며 소비자 권리를 행사하는 새로운 참여 민주주의인 것이다.

국내에서도 이같은 시도가 있었다. 1998년 11월 서울 숭실대에서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과 생명 윤리에 관한 합의회의’가 열렸다. 과학기술자들이 검사와 변호사 역을 맡고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 시민 14명이 배심원을 맡은 법정이었다. 시민과 전문가들은 서로 불편해 했지만, 이 이색 법정은 과학과 시민(소비자) 사이의 간격을 좁힐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인간 게놈 지도 초안이 거의 완료되었다는 발표는 생명공학 시대 개막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그들만의 축제’다. 생명공학 기술의 소비자인 시민들은 새로운 시대 앞에서 기대와 동시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당장 난치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지만, 복제 인간으로 태어난 아들이 유전적으로는 아버지와 일란성 쌍둥이라는 사실이나, 영화 <가타카>에서처럼 유전자 계급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비관론 앞에서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생태론자들에 따르면, 20세기 석유화학 물질에 의한 환경 오염과 새로운 시대의 유전자 오염은 그 정도와 범위가 전혀 다르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피터 R. 윌스 교수(물리학)는 화학적 오염은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있지만, 유전자 변이종(種)에 의한 생태계 오염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복제, 팽창하기 때문에 전지구적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문제는 생명공학 시대에 대한 전면적 거부가 아니다. 과학 기술은 인간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영국 자본가를 대변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 것처럼, 과학 기술은 현실적인 가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지난 세기에 환경운동이 핵과 원자력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놓았듯이, 생명과학 시대의 우주론이 뿌리 내리기 전에, 소비자인 시민들이 시장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 거대 기업-국가 권력-과학 기술을 심판하는 배심원으로서 시민이 나서야 할 때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