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송찬호 <붉은 눈, 동백> 문학과지성사
  •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
  • 승인 2001.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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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의 전쟁과 평화

사진설명 '그의 해' : 송찬호 시인은 이번 시집으로 김수영문학상과 동서문학상을 동시 수상했다.

송찬호는 말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고 생각이 깊다. 이 점은 그의 타고난 자질이고 성향이기도 하지만 그가 시를 쓰는 방법도 그 안에서 설명된다. 그는 말을 고르기 위해 늘 한번 더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더 깊어진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또 말을 고른다. 말과 생각이 마침내 어우러져 어떤 모형을 따라 도려낸 것처럼 일상의 사물들 위로 이상한 기운을 띠고 떠오른다. 그것들은 모두 영탄이고 회한이고 소망이고 분노인데, 실제로는 그 이상이다. 그것은 영탄과 분노로 된 말이며, 말로 이루어진 영탄과 분노의 단단한 형식이다.


목이 부러지지만 항복하지 않는 동백꽃

<병뚜껑>을 예로 들어도 좋을 것 같다. 차에 치어 사망한 한 여자를 두고 시인은 '분명 저 여자는 그 동그란 입술을 / 재빨리 닫지 못했던 것 같다'라고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말한다. 몸 속에 있어야 할 것이 그 입술을 타고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와 버린 참상 앞에서 한 차례 인사치레 같은 안쓰런 감정을 표출해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냉정한 말은 인간의 생명과 그 복잡한 '설합'인 육체의 관계에 대한 성찰로 연결되고, 몸의 병뚜껑이 열려 버린 그 운명의 순간에 대한 물음으로 발전한다. '나는 그 병뚜껑만도 못한 시를 옆에 놓고 지나간다'는 말로 시는 끝나는데, 이 말의 병뚜껑이 한 여자의 생명을 다시 추스를 수는 없어도, 다른 여러 입술에서 낭비되는 탄식을 막고 생명의 슬픔으로 이루어진 뛰어난 한 형식을 여러 가슴 속에 눌러 새겨 둘 수는 있을 것이다. 감정은 흘러 사라져도 형식은 흩어지지 않는다.

시집 <붉은 눈, 동백>은 제목이 말해 주듯이 동백꽃을 주제로 삼은 시를 여러 편 담고 있다. 시인이 여수의 오동도나 돌산도의 향일암에서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지만, 이 동백꽃의 자리가 어느 구체적인 땅에 항상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동백꽃 숲은 오히려 찾아가 만나기도 하고 못 만나기도 하는, 그래서 그 여정이 더 중요한 이상향을 닮았다.

이상향? 이렇게 말하고 보면 또 이상한 말이다. 거기에는 분명 생명의 희열이 있지만 휴식할 자리나 안주할 공간은 없다. 게다가 동백들은 도원의 복사꽃처럼 평화롭지 않다. 그것들은 부주의한 손에 시달리고 자주 목이 부러지지만 '항복하지 않는다'. 이 이상향은 오히려 전쟁터를 닮았다. 그 선혈 붉은 꽃들은 권태에 주눅 들고 허망한 일상에 좌절하는 감정들이 자경(自警)의 모진 채찍 아래 또다시 악착을 부리며 눈 뜨는 순간들과 같다.

시인은 시집의 뒷표지에 쓴 짧은 글에서 '오랜 방황과 모색 끝에 오래도록 책들이 썩지 않고 노래가 죽지 않는, 시의 천축국'에 대한 열망을 말한다. 이 천축국, 이 동백의 이상향은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막중한 피로감과 맞서 겨루는 긴 싸움과 다른 것이 아니다.

● 추천인 : 고형렬(시인·<시평> 편집위원) 김사인(시인·문학평론가) 이광호(문학평론가·서울예대 문창과 교수) 황현산(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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