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브리를 만들겠다"/류재운
  • 노순동 기자 (soon@e-sisa.co.kr)
  • 승인 2001.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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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터들의 회사' 설립한
류재운 전국 애니메이션 노조 위원장


사진설명 류재운 전국 애니메이션 노조 위원장. ⓒ시사저널 윤무영

처음에는 그림쟁이가 노조라니,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1990년대 초 5년 만에 류재운씨(37)가 애니메이터로 현장에 복귀했을 때 근로 조건은 더 악화해 있었다. 1999년 7월 류씨는 고심 끝에 산별 노조 전국애니메이션노동조합을 띄웠다(www.katu.co.kr). 추산에 따르면 2백여 곳에서 2만 여 명이 애니메이터로 일하고 있다. 그 가운데 회원은 2천5백명 남짓이다.

일은 많았다. 고용 구조가 취약해 단결하기 쉽지 않은 애니메이터들의 사랑방 역할에서부터, 부당 사례를 고발하고 당국에 애니메이터의 목소리를 전하는 일까지. 사이트에는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각 회사의 작업 단가도 공개하고 있다. 최근 자격증 논란이 불거지는 바람에 그는 곱으로 바쁘다.

그 와중에서도 류위원장은 '한국의 지브리'를 만들겠다던 평소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 지난 3월13일 서울 방배동의 한 사무실. 애니파워엔터테인먼트라는 현판 앞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애니메이터들의 회사를 차린 것이다. 자본금은 1억원. 작업 수주금과 민주노총 전·현직 노조위원장의 개인 호주머니를 털었다.

류위원장의 다짐은 다부지다.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도 일하던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려다 실패하고 지브리 스튜디오를 차렸다. 맨 처음 한 일은 애니메이터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었고, 그게 바탕이 되어 궤도에 올라섰다."

그는 일단 애니메이터들에게 기본급을 보장하고, 4대 보험에도 가입할 계획이다. 수주 계약서도 공개할 작정이다. 사주가 본인의 몫을 과도하게 챙기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장하고도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사진설명 첫발 : 지난 3월13일 '애니메이터의 회사' 애니 파워 엔터테인먼트가 출범했다. 맨 오른쪽이 이시우 감독. ⓒ시사저널 이상철

애니파워엔터테인먼트의 첫 작품은 한국 설화를 바탕으로 한 우화 <모비우스>와 백기완씨의 삶을 그린 극영화 <장산곶매>다.

현장 사령탑은 경력 25년째인 이시우 감독. 한국의 내로라 하는 프로덕션을 모두 거친 베테랑이다. 직접 회사를 차린 것도 대여섯 번은 되지만 모두 엎었다. 재하청을 받으니 이문이 남는 것이 적었고, 몇몇 회사가 일본과의 거래선을 독점하다시피 쥐고 있어 선을 뚫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라고 이감독은 말했다.

이제는 더욱 거친 싸움이 남았다. 시장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이다. 류위원장은 펜을 고쳐 잡는다. "우리가 어떻게 일해 왔는데요. 그 마음, 그 열성으로 하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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