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외 스트레스가 멀쩡한 아이 잡는다
  • 이한기·구혜영(〈즐거운 뉴스〉기자) ()
  • 승인 2001.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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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소화장애 등 유발…무기력증에 빠뜨리기도


수업 도중 한 아무개양(16·서울 강남구)이 쓰러진 것은 올해 초였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복통을 호소하는 한양에게 의사는 신경성 장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었다.




한양의 스트레스는 과외에서 말미암았다. 상류층 집안 출신이면서 일류 대학을 나온 어머니는 딸이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영재 교육, 보습과 예체능 교육, 고액 과외 등 온갖 사교육을 시켜 왔다. 힘에 부친 한양이 불만을 표시할 때마다 어머니는 이렇게 응수하곤 했다. "너한테 들어간 돈이 얼만데, 나중에 일류가 되면 나한테 고맙다고 할 게다."


과외에 지친 여중생,
신경성 장염으로 쓰러져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과외의 강도는 더욱 세졌다. 어머니는 '너를 서울대에 보내줄 최고의 선생님을 찾겠다'며, 과외 교사를 석 달 간격으로 갈아치웠다. 이 과정에서 모녀 간에 말다툼이 잦아졌고, 급기야는 한양이 쓰러진 것이다.


인천에 사는 중학교 2학년 김 아무개군(15).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은 그를 컴퓨터에 중독된 아이라고만 알고 있다. 실제로 김군은 이 때문에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상담 결과 그가 컴퓨터에 빠지게 된 근본 원인은 따로 있었다.


교육열이 유독 강하고 남들이 한다면 무조건 따라 시키는 어머니 탓에 김군은 어려서부터 다니기 싫은 학원에 늘 끌려다녀야 했다. 재미가 없으니 성적이 오를 리 만무한 아들을 두고 어머니는 장탄식을 했다. "너는 커서 뭐가 될래. 어떻게든 중간이라도 가야 할 텐데."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김군이 완성한 조립품을 들고 가 자랑해도 어머니는 이렇게 핀잔을 줄 뿐이었다. "그것도 자랑이냐? 공부를 잘해야지."


결국 김군은 항상 기가 죽은 상태로 자랐다. 사춘기에 접어들어서도 반항한 적은 없다.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김군은 꼬박꼬박 과외를 다녔다. 단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컴퓨터 게임 생각뿐이었다.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쉬자? : 학원은 학교보다 6개월∼2년 진도를 앞서 나간다(오른쪽).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학교 수업(왼쪽)에 학생들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과외에 치인 아이들이 늘고 있다. 연세대 의대 신의진 교수에 따르면, 최근 들어 소아정신과를 찾는 환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2000년 3∼7월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영유아 환자 중 심각한 정신적 장애라고 진단받은 환자 수는 7백여 명으로, 전체 소아정신과 환자의 3분의 1을 차지했다(〈현명한 부모들은 아이를 느리게 키운다〉). 신교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부모의 극성스런 교육열에 휘말려 정신 질환을 앓게 된 것이라고 추정했다.


홍강의 교수(서울대·신경정신과)는 부모가 아이를 과잉 통제하려는 데서 과도한 사교육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영·유아기 때부터 자녀를 과잉 통제한 부모일수록 자녀가 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공부를 가지고 자녀를 통제할 가능성이 높다고 홍교수는 지적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느긋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에 비해 근육 긴장·두통·소화 장애 같은 스트레스성 질환이나 대장증후군 같은 신경성 질환, 우울증, 품행 장애, 틱 장애(반복해서 눈을 깜박거린다거나 어깨를 들썩이는 장애) 따위를 앓기 쉽다.


홍교수에 따르면, 과잉 통제형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타내는 지극히 한국적인 반응 방식이 바로 남의 뒤통수를 때리는 식의 '수동 공격적 행동'이다. 무슨 일을 시켜도 늑장을 부린다거나 매사에 의욕이 없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앞서 컴퓨터 중독에 빠진 김군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렇게 병리적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과외에 치인 아이들은 이른바 '과외 중독증'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과외·학원 강사가 곁에 없으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과도한 과외는 이처럼 △학생들의 자율적인 학습 능력 형성을 방해할 뿐더러 △건전한 신체적·정서적 발달을 저해하고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하며 △공교육을 황폐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것이 허경철 박사(한국교육과정평가원 수석연구원)의 지적이다.


과외 받는 아이들이 학교 수업 방해




일선 교사들은 과외에 과잉 노출된 아이들이 학교 현장의 수업 환경을 급속도로 악화시키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학원 과외가 학교 수업을 예습·복습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과거와 달리 이른바 선행 학습 형태로 굳어지면서 어떤 아이들은 아예 '수업 훼방꾼'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신봉초등학교 김현자 교사(53)는 "학원에서 미리 배웠다고 잘난 척할 때는 사실 짜증이 난다. 그럴 때는 다른 아이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잘난 척하지 말라'고 조용히 타이른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학원에서 공부한 아이들의 실력이 크게 우월하지 않을 뿐더러, 학교 현장에서 문제점이 거듭 지적되어 폐기 직전에 놓인 수업 방식까지 학원이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암기 위주의 수업 방식이 그것이다. 서울 대도초등학교 조희주 교사(51)는 최근 5학년 학생이 '증산작용'이 어떠니 '광합성'이 어떠니 떠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이런 용어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단계에서는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단어인데도 거리낌없이 사용한다는 게 문제다"라고 그는 지적했다.


요즘 교사들이 학교 수업을 하면서 가장 골치를 썩는 일 가운데 하나가 이처럼 학원에서 단편적인 지식만을 주입받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중학교 1학년 사회 시간에 '백두산 천지가 칼데라 호'라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하면 이미 학원에서 배운 아이들은 공식처럼 답을 이야기하고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정작 문제는 정답을 맞춘 그 아이들이 아는 것이 고작 '백두산 천지=칼데라호'라는 것뿐이라는 데 있다. 백두산 천지 그림을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묵묵부답이다. 결과적으로 교사는 가르치기도 전에 맥이 빠지고, 정답을 아는 아이들은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고, 내용을 아예 모르는 아이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서울 원촌초등학교 류언기 교사(28)는 응용 능력 저하를 학원 교육의 또 다른 심각한 문제점으로 꼽았다. 단기간에 성적을 높이기 위해 문제 풀이 과정보다 공식에 의존하는 학원 수업을 받은 학생은 고학년이 되면 될수록 응용 능력이 떨어지는데, 특히 수학 교과에서 이런 문제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그는 말했다. 자기가 암기했던 공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헤매기 일쑤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교육의 갈지(之)자 행보를 과외 교육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여기에는 학교라는 공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탓도 적지 않다. 다만 학교에서조차 잘못된 교육 방식이라는 지적을 받아 지양하려 하는 수업 모델들이 부추겨진다거나, 아이들로 하여금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게 하는 '되새김질 교육'이 학원을 통해 확산되고 굳어져 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외는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몸과 영혼뿐 아니라 싱싱한 두뇌까지 좀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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