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에서 길 찾기 '적과의 동침'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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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기관 '2인1조', 집요하게 추적…
관계 기관 비협조 등 난관 많아


김준배 사건은 민·관 조사관의 합작품이다. 민간에서 파견된 강상구 조사관(30)을 비롯해 기관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이 지난 8개월 동안 3천5백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집요하게 사건을 파고들었다. 60명이 넘는 관련자를 세 번 이상씩 소환해 조사했고, 수시로 광주를 오가며 현장 조사를 벌였다. 민·관 조사관의 이런 협력이 미궁에 빠진 사건을 파헤친 원동력이었다. 강상구 조사관은 "경찰 쪽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근성을 발휘한 덕이다"라며 공을 넘겼다.




민간 조사관 한 사람과 기관에서 파견된 조사관 한 사람이 팀을 이룬 2인1조 체제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의 기본 단위다. 2명이 한 조를 이루어 보통 4∼5건씩 사건을 맡아 진행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어 호흡을 맞춘 것이다. 하지만 갈등을 빚는 경우도 많아서 위원회 활동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위원회는, 성과도 내고 있지만 현재 안팎의 난관에 봉착해 있다. 무엇보다도 관계 기관의 협조가 아쉽다. 지난 7월25일 양승규 위원장과 김형태 상임위원은 최경원 법무부장관을 만나, 김준배 사건과 관련된 검사를 소환하는 데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최장관은 검사가 수사한 내용 때문에 조사를 받으면 수사권 독립이 흔들린다며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김준배 사건의 경우 프락치 공작 여부를 밝혀줄 최상도씨에 대한 조사 기록도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광주지검 공안부가 제출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단 법무부뿐 아니라 국방부·국정원의 협력도 형식적이다.


유가협 등 시민단체 '무서운 시어머니'


관련 기관이 협력하지 않을 경우 사실상 실질적인 조사권이 없는 위원회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다. 최근 고문 사실이 드러난 최종길 교수 사건도 국정원이 자료를 제공해 단서를 잡았다. 국정원은 이 자료 역시 처음에는 없다고 발뺌하다가, 양승규 위원장이 신 건 국정원장을 만나 담판을 지은 뒤에야 내놓았다.


위원회의 산파인 유가족의 불만도 위원회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짐이다. 무려 4백22일 동안 국회앞 천막 농성을 벌여 특별법과 위원회를 탄생시킨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등 관련 시민단체는 가장 무서운 시어머니이다.



지난 7월 말 시민단체 출신인 과장급 4명과 팀장 1명이 일괄 사표를 제출했었다. 지금까지 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반성하고 인적 쇄신을 하라고 요구하며 벌인 집단 행동이었다. 위원회로서는 가장 큰 위기였다. 유가협 등 유가족이 진전이 없는 위원회의 활동을 지켜 보며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낸 뒤였다.


양승규 위원장은 곧바로 모든 사표를 반려했다. 양위원장은 "과장들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반려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양위원장은 진상 규명 과정에서 유가족의 기대와 반대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데, 이를 이해시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밝혔다. 유가족과 이해의 장을 넓히기 위해 위원회는 현재 '중간 설명회'를 열어 그동안 진행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9월1일 현재 열일곱 번째 중간 설명회가 열렸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문제는 위원회 내부에 있다. 지난 8월20일 최종길 교수가 고문을 받다 모멸감을 견디다 못해 투신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가 나가자 위원회는 발칵 뒤집혔다. 공식 기자회견을 거치지 않은 내용이 보도된 것도 문제였지만, 일부 내용이 위원회의 공식 입장인 것처럼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급한 불을 껐다.


실질적 조사권 없어 입씨름으로 일관


그런데 이 '사고'는 한동안 잠잠했던 내부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자체 파악되었다. '민·관의 불협화음'. 위원회로서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김준배 사건처럼 궁합이 맞아 진척되는 경우도 있지만, 자칫 2인 1조 시스템에서 반목과 질시가 생긴다면 위원회가 제구실을 못할 가능성이 높다. 관련자를 소환하기 전에, 서로 왜 그 관련자를 조사해야 하는지 의견이 엇갈려 논쟁하다가 지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지난 4월에는 경찰 쪽에서 파견된 한 인사가 개별 사안에 대해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경찰청에 구두로 보고하는 바람에 물의를 빚었다. 그동안 말로만 돌았던 기관원 출신들의 파견 기관 눈치보기 행태가 적발된 것이다. 내부에서 극비로 처리하고 문제의 인물을 원대 복귀시켰지만,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기관 출신 조사관이 소속 기관과 관련한 정보를 흘린다면 위원회 활동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양승규 위원장은 "기관에 보고했는지 안 했는지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그만둔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또한 위원회의 발목을 잡는 것은 다름아닌 특별법 그 자체다. 지난 정기국회 때 특별법이 개정되었지만, 6개월씩 시기를 연장할 수 있고 위원회가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실질적인 조사권을 주지 않았다. 통화 내역 하나 제대로 확인할 길 없고, 계좌 추적도 할 수 없다. 오로지 관련자를 불러서 입씨름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환에 불응하거나, 응하더라도 버티기만 하면 조사관들은 난감해진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정윤희 사업국장은 2차 법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금 이 상태로는 기간만 연장될 뿐이지 진척이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대 15개월 동안 조사하지만, 실제로 2명이 4∼5건을 병행해 조사하다 보니 한 건당 길어야 3개월씩만 조사할 뿐이다. 3개월이라는 시간은 관련 자료를 분석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더 효율적으로 조사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 위원회가 조사하는 시늉만 하도록 만들지는 않겠다는 방침이다. 박정기 유가협 회장(73)도 "위원회는 역사적인 진통 끝에 탄생한 만큼 힘을 모아주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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