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차완은 조선 승려의 발우"
  • 경남 사천·이문재 편집위원 (moon@e-sisa.co.kr)
  • 승인 200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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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펴낸 소설가 정동주


인터뷰하는 동안 정동주씨는 연신 찻잔을 건넸다. 정씨는 1970년대 초반, 한국 다도의 중흥 시조로 일컬어지는 효당 스님으로부터 차 마시는 법을 배운 다인(茶人)이다. 차를 처음 배울 무렵, 석성우 스님으로부터 일본에 이도차완이라는 대단한 찻잔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것이 조선에서 건너간 막사발인 줄 알았다. 1990년대 중반에야 이도와 조선 막사발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번에 나온 〈조선 막사발…〉은 지난해 9월부터 올 4월까지 〈부산일보〉에 매주 연재한 원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연재 당시 독자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10개가 넘는 스터디 그룹이 생겼고, 소장하고 있던 이도를 들고 오는 독자도 있었다. 근거 없는 가설이라는 반론도 있었다. "이 책에 대한 논란은 이미 연재할 때 다 겪은 것이다"라고 정씨는 말했다.


그가 이번 저서에서 전개한 새로운 이론은 국내 최초일 뿐만 아니라 매우 파격적이다. 우선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동양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학설을 정면에서 공격하고 있다. 정씨는 "이도차완에 담겨 있는 미학을 읽어낸 야나기의 눈은 천재적이다. 그러나 이도가 조선 서민들이 사용하던 막사발이라는 진단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도의 기원과 역사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는 1994년 6월17일 오전 11시, 한국인으로는 4백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국보인 기자에몬이도를 '친견'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그날 도쿄 다이도쿠샤에서 일곱 겹 오동나무 상자에서 '조선에서 끌려간 막사발'이 나오는 순간, 정씨는 두 가지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명물'을 직접 보게 되었다는 감격은 잠깐이었다. 일본에 끌려와 일본의 미학이라는 성채 안에 유폐되어 있는 조선 막사발을 절간 마당에 내던져 깨뜨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오직 한국인만이 이도차완의 미학 창조할 수 있다"


'조선 막사발'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신의 정점에 자리 잡게 된 까닭은 당시 일본 정국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최고 권력자들은 조선에서 가져온 막사발을 사무라이 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조선의 막사발은 동맹 관계를 증명하는 징표이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사품이었고, 영지와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소장품이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 다도를 완성한 센노 리큐는 이도를 새로운 정신 문화의 상징으로 삼았다. 조선에서 건너간 찻사발이 일본 대변혁기와 맞물리며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정씨는 책 앞부분에서, 도쿄 국립박물관 학예실장을 역임했고 이도차완에 대한 미학 이론과 역사 고증의 권위자인 하야시야 세조를 찾아가 막사발의 미학을 캐묻는다. 하야시야는 이렇게 말한다. "이도차완이 지닌 아름다움만큼은 중국인도 일본인도 흉내 낼 수 없다. 오직 한국인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한 미적 표현이다."


정씨는 세 가지 단서를 들고 이도의 뿌리를 추적한다. 우선 관요가 아닌 민요여야 하고, 진주 동남쪽에 위치하며, 14∼16세기에 제작된 것이어야 한다. 이도(井戶)라는 용어에 주목한 그는 이도차완의 이도가 경남 사천의 새미골이라고 못박으면서 단호한 문체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즉, 이도는 조선 서민들이 사용하던 막사발이 아닐 뿐만 아니라 분청사기와도 무관한, 조선 시대 승려들이 사용하던 발우였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경남 사천 지역은 일찍이 남방 불교를 받아들인 가야 불교의 터전이었거니와, 이도만이 갖고 있는 비파색이나, 높은 굽, 매화피, 단순 소박한 형태 따위 특징들이 남방 불교의 세계관(만다라)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씨에게 물었다.


객관적인 근거가 희박해 보인다.


학문에서도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론도 없고 증거도 없을 때, 상상력만이 문을 열 수 있다. 나는 완성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나올 연구자들을 위해 하나의 문을 열었을 따름이다.


왜 지금 이도인가?


이도의 미덕은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고,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는 데 있다. 일본에서 국보가 된 까닭도 형태나 색깔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질을 사유케 하기 때문이다. 이 그릇은 물질적 소유욕이나 권력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가장 순결한 흙이 빚어낸 투명한 빛깔과 단순한 형태가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한다. 여기에 이 그릇의 현재성과 미래성이 있다.




이도차완의 주역들 : 조선에서 건너간 '막사발'은 당시 일본 최고 권력층과 더불어 일본 정신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위 왼쪽은 일본 다도 창시자인 센노 리큐, 위 가운데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공을 일본으로 납치해 일본 문화에 조선 도예를 이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위 오른쪽은 조선에서 가져간 찻잔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오다 노부나가.


길 성씨 부녀가 이번에 재현한 이도를 어떻게 보는가?


비파색은 거의 원형에 가깝다. '월파차완' 같은 그릇은 작은 것이지만 색깔이나 형태가 대단하다. 안정감 속에 역동성이 느껴진다. 매화피를 보고 있으면 잔잔한 호수 위에 부서지는 달빛이 연상된다.


재현은 어떤 의미의 재현인가?


일본에 있는 이도를 재현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우리 시대 정신에 맞는 작품을 창조하기 위한 한 단계이다. 원형에 대한 고뇌를 거쳐야 한다. 재현은 자기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도차완이라는 명칭에 문제는 없는가?


그렇다. 막사발도 적당한 이름이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라면 나는 '발우차완'이라고 하고 싶다. 앞으로 학자·도예가·소장가 들이 모여 새로운 이름을 붙였으면 한다.


인터뷰하는 도중 부산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25년째 부산과 후쿠오카를 오가며 한국 전통 도예를 일본에 소개해온 재일 동포 최복철씨(미술공예 가야 대표·큐레이터) 부부였다. 이도 전문가인 최씨는 정씨가 건넨, 길 성씨 부녀가 재현한 이도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정씨는 "형태보다는 색깔을 보아 달라"고 주문했다. 최씨는 "비파색 범주에 들어가는 색깔이다"라고 말했다. 매화피와 초생달(달무리굽이라고도 한다)도 원형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정씨가 주창한 새로운 이도론에 대해 학계는 아직 본격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전문 연구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도자사를 전공한 원광대 윤용이 교수(문화재 전문위원)에 따르면, 이도에 대한 국내 연구가 부진한 까닭은, 우선 이도 진품을 볼 기회가 거의 없고, 이도와 불가분 관계인 일본의 말차 문화가 한국인에게는 생소하기 때문이다.


윤교수는 "이도차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정동주씨의 취지와 노력에는 공감한다. 정씨와 같은 접근법도 필요하다"라면서, 다만 이도가 제작된 시기와 장소 문제, 이도가 승려의 발우였다는 주장, 이도의 색깔 등에 대한 견해는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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